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확실히 믿고,
포용하고, 낮아진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기독교는 왜 그렇게 독선적이고 편협합니까?”라는 질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왜 당신들만 절대적 진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까?”라는 질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다른 종교도 많고, 좋은 종교도 많은데 그들에게는 왜 구원이 없다고 말합니까?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지 않습니까?”라는 질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서 여러분이 믿는 종교를 믿으라고 선교하는 일은 교만한 일이라는 말도 들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주장에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들은 이러한 질문이 많은 경우 등산에 비유해서 합니다. 산봉우리로 올라가는 길이 여러 갈래지만 모두 산봉우리로 간다는 것입니다. 여러 갈래의 길이 있을 뿐이지 구원으로 가는 길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길만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믿는 것은 단순한 생각입니다. 예화조차 문제가 많습니다. 여러분, 모든 길이 산봉우리로 올라갑니까.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길도 있고, 계곡으로 가는 길도 있고, 막다른 길도 있고, 정상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헤매는 길도 있습니다. 모든 길이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 핍박
이러한 질문이 본격화된 것은 20세기 들어서입니다. 18세기와 19세기를 역사적으로 모더니즘, 근대주의, 현대주의라고 합니다. 계몽주의가 일어나면서 과학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부정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과학적 진리를 최고의 권위에 올려놓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을 믿지 않게 되었고, 성경은 신화적인 책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20세기 들어서면서부터는 과학적 권위마저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권위를 부정하는 시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절대적 진리는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각자가 진리라고 받아들일 뿐이지 모든 사람이 믿어야 하는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서운 사상과 흐름들이 지난 100년 동안 더 심해졌습니다.
일본이 복음화 되기 어려운 이유는 18세기와 19세기 모더니즘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사고를 최고의 권위에 올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잘 믿지 않는 것입니다. 20세기 들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력한 세상의 흐름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개개인의 의견과 생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무섭습니까. 인간의 경험과 생각, 판단을 최고의 권위에 올려놓으면 무서운 영적 사사시대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100년 전만해도 유럽이나 북미에서는 인간이 존재하는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고백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믿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의 의견일 뿐이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진리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시대로 변해버렸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유럽, 북미,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물들어버렸습니다. 이 시대 교육과 문화사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종교다원주의가 교계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WCC나 세계교회협의회에 모여든 사람들의 발표하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모두가 예배드리고, 구원을 추구한다고 합니다. 무서운 혼합주의 시대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관용과 포용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모든 사람은 동등하고, 모든 종교는 동일한 구원을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것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관용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 유독 기독교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품으면 기독교가 절대적 진리라고 하는 것도 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품지 않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가짜 관용입니다. 세계복음주의 대표적인 운동 ‘2010년 제3차 로잔대회’에서 케이프타운의 서약에서 이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이 이데올로기는 절대적이거나 보편적인 진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진리 주장을 관용하면서도 그것을 문화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입장은 논리적으로 자기 파괴적인데 그 이유는 유일한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일한 진리로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원주의는 관용을 궁극적 가치로 주장하지만 세속주의나 공격적인 무신론이 공적 영역을 지배하는 국가에서는 억압적인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이것이 지금 이뤄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억압적인 형태입니다. 미국에서는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를 법적으로 못쓰게 합니다. 억압적인 형태가 이미 시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유일한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성도들이 주장하든 그것을 쓰던 상관없는데 못쓰게 합니다. 이런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동성애가 죄라는 것을 설교하는 것이 우리가 믿는 진리라고 인정한다면 설교하고, 전파하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죄가 되는 시대입니다. 동성결혼을 주례하지 않으면 목사도 잡혀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억압적인 형태입니다. 왜 그럴까요. 유일한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고, 관용하고, 포용한다는 것을 절대화하면서 기독교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무서운 시대적 흐름 속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만 절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외에 다른 어느 누구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아래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행 4:12).
포스트모던 시대에 거대한 파도를 이기고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붙잡아야 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걷지 못한 사람을 고친 후에 자신을 체포해 심문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던진 베드로의 메시지 가운데 있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씩이나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반복합니다. 부정강조는 최고의 강조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중심입니다. 만약 이것을 흔든다면 모든 것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종교의 껍데기만 가지고 있는 이단일 뿐입니다. 여러분,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걷지 못한 이를 고친 것은 예수님이 새 생명의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보여주신 증거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많은 기적들이 예수님을 과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죽어가는 우리들을 건져낸 구원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아 있는 사람에게 걷는 법을 강의하지 않았습니다.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새 생명의 능력을 공급해 준 것입니다. 기독교는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을 명령만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죽은 자들에게 새 생명을 줍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서 추구하도록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주장을 보면 구원은 어떤 궁극적 실제를 향하여 변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궁극적 실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하지 못합니다. 실체가 없습니다. 막연한 것입니다. 추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형태를 추구하든지 궁극적인 실제를 추구하면 모두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입니다. 우리와 대화하시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고, 우리를 건져내셨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구원은 자기 경험 속에 갇혀 있습니다. 자기 경험이 곧 신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이뤄내는 변화가 아닙니다. 구원입니다. 어떤 도움이나 조언이나 본보기가 아닙니다. 새로운 본성이 필요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되는 새 생명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종교적 수행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새 생명이 있기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은 인간 이상의 존재가 우리를 구원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진정한 구원자는 우리와 동일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아픔을 알고, 시험을 이해하고, 빠져 있는 죄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 되신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진정한 구원자의 자격이 있습니다. 그분은 자격이 있을 뿐만 아니라 능력도 있습니다. 그 능력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자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희생으로 구원자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진정한 진리는 배타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한없이 긍휼이 여겨주시는 분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눈물을 흘려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스스로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 스스로 유일한 구원자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내 아버지를 보았다’”(요 14:6~7).
예수님은 자신을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없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쓰신 아랍어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바’입니다. 아바는 아랍어로 아빠입니다.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기에 아버지와 동등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아멘’입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절대적으로 그렇다는 뜻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진다는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단어입니다.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자신을 절대적 존재라고 내세운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만이 배타적이고, 절대적 권위를 가진 분이라고 스스로 주장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주장과 그분의 행실과 그분의 능력이 그 주장과 맞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감히 자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능력이 없는데 주장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분으로 절대적 진리로 주장하셨습니다. 모든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분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심판자라는 것을 주장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예수님의 주장을 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어떤 역사적 인물이 주장을 하면 그 주장이 진짜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같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면 예수님은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주장이 틀린 것인지 모르고 했다면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주장에 삶이 변화 될까요.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 한 말에 수많은 사람들 따라다니고, 그분을 위해서 순교하는 일이 일어날까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단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주장대로 사셨고, 능력이 나타났고, 교회 역사를 통해서 그분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일하신 구원자라는 것을 부정하려는 수많은 핍박이 있었지만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면서까지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사실이고, 지금도 살아계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그것이 사실이기에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은 독선이 아닙니다. 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려고 할까요. 하나님이 다른 신도 경배하고 나눠가져야 좋은 것이라고 해야 포용적인 것입니까. 그렇게 주장하는 존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뿐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진실을 진실 되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배타적이고 독선적이 아닙니다. 과학적 진리만큼 배타적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1더하기 1은 2입니다. 왜 2만 답입니까. 3도 되고, 4도 될 수 있지 않냐고 주장해봐야 바보취급 당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배타적이라고 애기하지 않습니다. 수학 공식을 말할 때 답이 하나라고 해서 왜 답이 하나만 있냐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진정한 진리는 배타적입니다.
모든 사람을 향한 포용과 낮아짐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더 확신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전하는 태도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지 우리가 유일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절대적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유일한 구원자 되심과 나의 삶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전하는 자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억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아브라함을 택하셨지만 모든 민족을 향한 포용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배타적 진리는 언제나 모든 사람을 향한 포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선교입니다. 선교는 모든 사람을 향한 포용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는 포용이 없으면 사람들이 배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전하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고, 나누고, 섬기는 포용으로 나아가면 누구도 기독교를 배타적인 종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절대적인 분이 십자가에서 힘없고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교회도 세상을 향하여 세상의 힘과 무력과 어떤 정복자의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는 희생과 낮아짐과 겸손을 통해서 나아가야합니다. 그럴 때 세상은 교회를 절대로 배타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낮아짐과 겸손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희생이 부족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향하여 나아가는 선교적 포용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독교를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모습, 낮아지는 모습, 겸손한 희생의 모습으로 나아가면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통해 유일한 구원자 예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오직 예수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온 세상에 증거함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넓은 포용의 마음을 이 세상에 온전히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확실히 믿고, 세상을 향하여,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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