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멈출 수 없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운동력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증인들입니다.”
어떠한 박해와 핍박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 교회는 멈출 수 없는 힘이었습니다. 시대가 악해서 교회가 악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는 언제나 악했습니다. 환경이 나빠져서 교회가 힘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 문화가 너무 빨리 변해서 교회가 뒤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언제나 문화의 선도자였고, 창조자였습니다. 문제는 교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운동력, 멈출 수 없는 힘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문화가 성령님의 역사로 형성된 것일지 모르지만 성령님은 바람처럼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 문화자체를 보존하려는 사람은 문화의 수치스런 죽음에 동참하게 됩니다. 문화 속에 교회가 함몰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씨는 바람과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면 안 됩니다. 교회의 가장 큰 적은 외부환경이 아니라 교회가 운동력을 상실해서 종교기관화 되거나 종교문화화 되는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기독교가 종교로 구분되지만 사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종교를 창시하지 않았습니다.
종교화된 교회와 본래의 기독교
종교화된 교회의 모습과 본래의 기독교의 모습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종교화된 교회는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본래의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내려오십니다. 둘째, 종교화된 교회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본래의 기독교는 하나님이 역사하셔야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셋째, 종교화된 교회는 구조화되고, 형식에 얽매입니다. 그러나 본래의 교회는 힘이 넘치고 자유롭습니다.
넷째, 종교화된 교회는 교회만을 중요시하며 인간을 높입니다. 그러나 본래의 기독교는 교회만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높여드립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뒤에서 조종한 사람들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붙잡았던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하나님은 율법의 테두리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율법으로 만들어진 문화를 보존하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율법이 만들어낸 문화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참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1,500년 이상 그들의 체계를 유지해 왔던 종교체계를 뒤흔드는 것 같으니까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가 얼마나 선한 탈을 쓰고 악해질 수 있는 지를 보여줍니다.
사도행전에는 힘의 대결이 나타납니다. 세상적인 정치의 힘이 아니라 영적인 힘의 대결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세상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자들이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패배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사도들을 제압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멈출 수 없는 하나님의 운동
오늘 본문은 3장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반응이 나타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예수님 이름의 능력으로 일으켰습니다. 그가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했을 때 그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가 모여든 군중들을 향하여 “이 사람이 걷고 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으로 행한 것이다. 우리를 주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 제사장들과 사두개인 성전 경비대장이 함께 모였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가두고 산헤드린 재판에 넘겼습니다. 진리를 위해서 아니라 진리를 말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공모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또다시 뭉쳤습니다.
병자를 고쳐주고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 준 사람을 가두고 재판하는 것이 얼마나 불리한 재판입니까. 이것은 복음증거에 대한 최초의 박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한 역사를 행한 이들을 악한 이들이 세상의 힘으로 억누르려고 하는 최초의 박해입니다. 복음증거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의 증거는 멈출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의 증거는 당시 막강한 권력의 힘으로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멈춰지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만약 교회가 이 시대에 조금 번성하다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성경은 오류일 것입니다. 한 지역에서 교회가 쇠퇴하면 또 다른 교회들이 일어나고, 한 나라에서 교회가 쇠퇴하면 또 다른 대륙에서 복음이 일어납니다. 유럽에서 복음이 쇠퇴할 때 북미대륙에서 교회가 일어났고, 북미대륙에서 교회가 쇠퇴할 때 아시아에서 교회가 일어났고, 아시아에서 복음의 역사가 쇠퇴할 때 남반구에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의 불길은 세상의 문화로 끌 수 없고, 세상의 권력으로 끌 수 없고, 박해와 핍박으로도 끌 수 없습니다. 멈출 수 없는 하나님의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진실을 가둬둘 수 없다
왜 사도들의 증거가 멈출 수 없었습니까.
첫째, 거짓은 진실을 가둬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증거는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기적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베드로가 설교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내용에 놀란 것입니다. 당시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성전관리자의 허락 없이 모여들었다는 이유를 들었을 것입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자신들만이 율법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교육할 수 있었는데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니까 잡아 가둔 것입니다.
“그들은 두 사도가 사람들을 가르치며 예수를 들어 죽은 사람의 부활을 전파하는 것 때문에 심기가 몹시 불편했습니다”( 행 4:2).
“그러고 나서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다시 불러들여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18절).
그들은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8주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지금까지 행했던 거짓된 위선이 예수님에 의해서 폭로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대로가 아니라 자기들 마음대로 각색해서 가르친 잘못된 가르침과 거짓과 위선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폭로되었디 때문입니다.
여러분, 산상수훈을 먼저 읽고 구약을 읽어보십시오. 구약을 예수님이 올바로 해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과 구약을 읽어보면 차이점이 없습니다. 구약의 십계명과 율법을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통해서 해석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해석한 탈무드나 율법 해석서를 보면 전혀 새로운 책입니다. 예수님이 1,500년 동안 그들이 해석해서 내려온 것들이 잘못되었고 왜곡되었다는 것을 말하니까 죽인 것입니다. 진실만을 억누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교체계가 무너지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없어지고, 위치가 없어지니까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선과 거짓을 감추기 위해서 베드로와 요한을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몸은 가둘 수 있었지만 진실은 가둘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 일어난 사실은 가둘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으로 역사를 행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증거하니까 두려웠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반응한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5장에서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다음에 38년 동안 누워있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일을 시킨 것입니다. 문제를 만든 것입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일어났던 것에 놀라지 않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38년 된 병자가 걸어간 일인데 사람들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에 놀랐습니다. 교회가 종교화되면 진짜 중요한 것에 놀라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믿고, 예수 믿고 싶어서 교회 나왔다는 것에 놀라지 않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뭐라고 심문합니까. “너희가 무슨 권세로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심문합니다. 그들의 옹졸하고, 편협하고, 완악함을 주목해야 합니다. 진실을 막으면 막을수록 더 확산됩니다. 베드로가 모인 사람들에게 설교했을 때 남자만 오천 명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거짓은 진실을 결코 가둘 수 없습니다.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
둘째, 그들의 증거가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사도들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당신들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지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9~20절).
베드로와 요한은 당시 권력자들이 경고하고 위협하는데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담대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었습니다. 그렇게 연약하던 사람이 권력자들 앞에서 당당합니다. 말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말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말만 바꾸거나 말을 하지 않으면 잡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약을 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지적능력에도 놀랐습니다. 그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잘못을 말씀을 근거해서 도전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짓고 있는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지적인 영역에도 변화가 있습니다. 말씀이 깨달아지고, 말씀이 나에게 역사됩니다.
무엇인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역사적 사실이어야 합니다. 사실이 아닌 것은 잊어버리고, 거짓은 시간이 지나면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 개인적인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사실이 나와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 사실이고, 나와 관련된 체험이어야 합니다.
셋째, 능력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능력과 용기가 있어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어떤 것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와 능력입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바보행전도 우리가 바보가 되자고 외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이 역사적 사실이고, 나의 체험 속에서 증명되고, 성령의 능력과 기름 부으심이 합해져야 가능합니다.
사도들에게는 복음이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아니라 그들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의 종이 되고, 복음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복음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고, 우리를 사로잡을 때 어떠한 상황 속에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기 때문에
셋째, 왜 그들의 증거가 멈출 수 없었습니까.
사도들은 세속적인 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함께 소리 높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여, 주께서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주께서는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해 성령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어째서 민족들이 분노하며 사람들이 헛된 음모를 꾸미는가? 세상의 왕들이 일어나고 통치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분의 그리스도를 대항하고 있구나.’ 그런데 정말 헤롯 안티파스와 본디오 빌라도가 주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반대하며 음모를 꾸미려고 이방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성에서 만났던 것입니다. 주의 능력과 뜻에 의해 미리 정하신 일을 그들이 단지 이룬 것뿐입니다. 그러니 주여, 그들의 위협을 보고 주의 종들을 도와 주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게 하소서. 주의 손을 펴서 주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을 통해 병을 고치게 하시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소서. 그들이 기도를 마치자 모여 있던 곳이 진동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져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24~31절).
그들은 함께 모여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기도 내용이 놀랐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핍박이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방해세력을 무너뜨려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런 상황을 ‘세상의 헛된 왕들이 모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하나님의 종을 대적하는구나. 하나님이 비웃으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 기도할 때 상황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난을 이기고, 어려운 환경을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상황을 세상의 방식과 철학으로 해석하면 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해석하는 사도들을 보십시오. 지금 대적자들의 행동은 시편 118편 22절의 말씀이다. 자신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시편 2편에 메시야를 대적했던 이들의 헛된 음모구나. 저들은 우리를 압박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이뤄질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으로 상황을 해석해야하기 때문에 큐티를 하는 것입니다.
큐티를 통해 상황이 해석되는 사람은 절대 멈출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승리하신 예수님처럼 십자가로 이깁니다. 교회는 세상적인 힘으로 대응하지 않고, 연약하게 죽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에 다시 부활합니다. 교회는 멈출 수 없는 힘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의 운동력입니다. 기관이나 종교화된 교회 권력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증인들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진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때 교회는 멈출 수 없는 하나님의 힘으로 계속해서 역사 속에 증거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멈출 수 없는 하나님의 운동력을 체험하는 주인공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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