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예수님 이름의 능력

새벽지기1 2017. 12. 12. 06:05


예수님 이름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살아있고,
지금도 우리를 통해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예수바보교회입니다. 예수 바보란 예수님을 세상에 바로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은 이 세상의 가치를 거부하고, 세상과 다른 시각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살아가기에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고, 바보처럼 여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벨론 같은 이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고,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하는 위험한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는 교회입니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연약한 교회입니다. 이렇게 예수바보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작은 예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작은 예수들이 재생산되어야합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흉내 내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재생산되는 역사가 바로 사도행전적인 교회입니다.


CS 루이스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오로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그들을 작은 예수로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만일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교회와 성직자, 선교활동과 설교, 심지어 성경까지도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오직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아니, 온 우주가 이것 말고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성경은 온 우주가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고, 만물이 그분 안에서 다 함께 모이게 되어있다고 말씀한다.”
예수바보는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성육신적인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사도들과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계속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기전에는 예수님이 직접 일하셨지만, 성령님이 오신 이후에는 성령 받은 제자들과 교회를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이 사도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이루어가는 것이 바로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면 살아있는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살아있습니다. 교회는 생명이요, 능력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소망을 갖게 하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갖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령체험으로 변화된 베드로와 요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나타난 베드로와 요한은 과거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순절 성령의 오심을 경험했고, 방언을 말하며, 능력을 체험하고, 덧입은 사람들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직후 어부 베드로가 설교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은 감정적인 기쁨만이 아니라 지적인 영혼, 지혜의 영으로도 임합니다. 그들의 기도도 달라졌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인의 습관대로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지만 그들의 기도는 더 이상 습관적이고, 형식적으로 중언부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기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뚜렷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기도가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기도입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 예수님이 내 앞에 계십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손을 붙잡아주시고, 나와 대화하십니다. 성령체험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축복은 기도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변화되게 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기도로 변화되어야합니다.
시몬 레이유라는 프랑스의 기도자는 기도를 “이목집중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예수님께 완전히 집중하여 주목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 참된 기도”라고 말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은 이 본문을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기적을 준비합니다. 기도는 기적을 잉태합니다. 기도는 기적을 낳습니다. 기적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생깁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늘 기적 같은 일이 따라옵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대인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기도처럼 보였지만 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성령 안에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적은 어디서부터 생겨났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평소에 주목하지 않았던 상황과 사람을 주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평소처럼 기도하러 올라가고 있었는데 이방인의 뜰로부터 여인의 뜰로 인도하는 그 아름다운 문 앞에 아름답지 못한 걸인이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전 같으면 그 사람을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날은 달랐습니다. 그 사람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역사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내 안에 임하고, 역사하면 평소에 주목하지 않았던 상황에 주목하게 됩니다.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을 주목하게 됩니다. 왠지 마음이 끌립니다. 시선이 그리로 향하게 됩니다. 그는 평소 하던 대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구걸하는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뚜렷이 쳐다보지 않습니다.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도 쳐다보면서 감사하다고 인사하지 않습니다. 도와주면 그만이고, 안 도와줘도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특별히 기대를 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그 사람을 주목하고 그 사람에게 자신들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지나가는 사람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구걸하는 사람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들을 보라고 하는 것은 틀림없이 무엇인가를 주려고 하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줄 마음이 없는 사람이 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대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봤습니다. 그는 돈 한 푼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라고 말하고”(6절).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실망했을까요. 그 다음 말은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그 사람은 그 말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고,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사람에게 걸으라고 말하는 베드로와 요한이 무모해 보였을 것입니다. 아마 그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은과 금이 없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들은 은과 금이 있는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이 충만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연약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실 수밖에 없는 일을 하고자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그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어 뛰어 서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7~8절).
그는 믿음도 없고,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잡아 일으킨 것입니다. 믿음의 행동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사람을 잡아 일으켰겠습니까. 베드로의 마음에 살아계신 예수님이 임재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손을 뻗었지만 사실 예수님의 손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이 그를 통해 일하시기 때문에 그는 담대하게 손을 뻗어 그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준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손을 잡아 일으켰지만 그것은 베드로의 능력이 아니라 베드로 안에 임재하신 예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임재 하셔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라지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계셔서 사도들을 통해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예수님 이름의 능력을 부여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과 하셨을 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들을 그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일들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이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 14:12~14).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는 말씀은 원하는 무엇이든지 다 아뢰면 이뤄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하셨을 일들을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통해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기적을 일으키려고 하면 절대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행하시기 원하시는 일들을 하려고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병을 고치는 일이든, 연약한자가 일어나는 일이든 간에 반드시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행하시기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믿지 않는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을 구하면 반드시 응답됩니다. 기적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이 모습은 마치 요한복음 5장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베다스다 연못을 가실 때 그곳에 앉아있던 38년 된 병자를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고자 하느냐?” 병이 오래되면 낫고자 하는 마음도 없어집니다. 그 사람이 포기하면 낫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먼저 소원을 일으켜 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구걸하는 사람에게 우리를 쳐다보라고 말한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역사가 베드로와 요한이라는 작은 예수들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참된 기적은 성령 안에 거하는 예수님의 백성들을 통해 이뤄집니다. 그래서 기적 같은 일이 나타났을 때 사람을 주목하면 안 됩니다. 어떤 기적이나 역사, 놀라운 표적이 나타났을 때 목회자든 사역자를 주목하는 순간 예수님의 임재는 사라지고, 그 사람 또한 시험에 들게 됩니다. 예수님이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통해 일하시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것이 진짜 예수바보입니다.

 

예수, 그 이름의 능력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사람은 기대한 것 이상의 것을 얻었습니다. 그는 돈을 기대했는데 그보다 값진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는 것을 당장 해결해 주시지 않더라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응답은 주십니다. 근본적인 치료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진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내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상은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더 우선적이고, 근본적이고, 중요한 필요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고, 뜻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았던 고난이 찾아오는 이유도 내가 바라고, 구하는 것이 진짜 나에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런 각도에서 실패를 바라보면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삶의 실패를 경험했습니까. 진짜 내가 필요한 것이 그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필요, 더 중요한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는 필요만 붙잡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생명답게 살아가는 필요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임할 때는 사람들이 바라던 것 이상의 것을 얻게 됩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책에서 어느 청년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청년이 교회에 출석하게 된 이유는 성가대에 있는 예쁜 아가씨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청년이 예배당에 앉아 있는데 예배를 안내하시는 분이 갑자기 찾아와서 부탁을 했습니다. 오늘 성경봉독하기로 한 청년이 나오지 않아서 그러는데 대신 성경봉독을 해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도 성경을 읽어보지 않은 청년이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그 순간 그 예쁜 아가씨 생각이 났습니다. 나가서 성경을 읽는 모습을 보면 그 아가씨가 자신을 다른 시각으로 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날 그가 읽은 본문은 요한복음 10장 10절이었습니다.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온다. 그러나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하게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 청년이 말씀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가 도둑처럼 교회에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깜작 놀란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 청년이 그 말씀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 성령님이 임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충격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 순간 그 청년은 자신이 여러 사람 앞에서 성경봉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 아가씨도 잊어버리고, 단상에 계신 목사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이게 사실입니까? 정말 예수님이 우리가 생명을 얻고, 풍성하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까?”


그 질문에도 성령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능력이 임하면 언제나 사람들이 기대한 것 이상의 것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임재하심은 인생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사람은 돈 한 푼을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사도들을 통해 그에게 생명의 능력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여러 사역을 통해 구제하고, 나누고, 보살펴야 합니다. 교회는 생명의 문제를 다루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의 구제도 헛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제를 통해 진정한 생명양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은 인생의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필요를 해결해 주는 이름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신 생명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그 이름의 능력이 우리가운데 살아있다는 것이고,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임재를 날마다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를 통해 체험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