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처럼, 불처럼, 진동으로, 기쁨으로 임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고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을 영어로 ‘Acts’라고 표기합니다. 직역하면 행동들, 행위들입니다. 흔히 사도들의 행적이라 해서 사도행전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행적들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해보자고 모인 모임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이 행한 일의 결과로 생겨난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행동, 하나님의 행적으로 생겨난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기원은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데오빌로라는 로마의 귀족에게 누가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록한 책입니다. 데오빌로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읽고 어떤 충격을 받았을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누가라는 의사가 장문의 기록을 보내왔는데 그 기록은 역사가운데 존재하지 않았던 유일한 기록이요, 사람들이 만들어낸 기록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성경을 볼 때마다 데오빌로처럼 충격을 받아야합니다. 성경은 매일 처음 듣는 것처럼 읽어야합니다. 데오빌로는 틀림없이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기록된 모든 행적들은 사람들의 행적이 아니라 살아계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적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죽은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예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자들은 대개 신을 궁극적 존재나 절대적 존재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신비한 힘이 아닙니다. 설명할 수 없는 궁극적 존재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약속을 이루시고,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살아계시며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알고 섬길 수 있는 분입니다. 그분을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기다리며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행적들이 나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님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행적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나 하나님의 행전이라고 바꾸어 읽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면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한지 열흘 후는 유대사회의 중요한 명절인 오순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날이 하루가 될지 이틀이 될지 십일이 될지 이십일이 될지 몰랐습니다. 오순절과 성령이 오심이 서로 연결이 된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기다렸습니다.
여러분, 언제 이뤄질지 모르고 기다리는 것이 훈련입니다. 고난의 끝이 보이지 않아도 고난의 끝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이루시는 분입니다. 인생의 때를 우리가 정하지 못하게 하심으로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며, 기다리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때로는 고난 속에서 기다리고, 때로는 약속을 기다리는 인생을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참된 인생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도하고, 교제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순절의 두 가지 의미
오순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로부터 오십 일째 되는 날입니다. 칠칠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순절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계절적인 의미입니다.
오순절이 되면 보리추수를 시작합니다. 보리를 추수하는 기간이라고 해서 맥추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오순절, 칠칠절, 맥추절은 모두 같은 뜻입니다. 당시에는 밀과 보리가 가장 주요한 농산물이었습니다.
두 번째 의미는 역사적인 의미입니다. 출애굽한지 오십 일째 되는 시기에 일어난 사건은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았던 시기와 비슷합니다. 유대인들은 오순절이 되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일을 기념합니다. 율법을 낭독하고, 율법이 전해졌다는 것을 기억하는 의식들을 행했습니다. 이처럼 오순절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오순절의 영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지고, 십자가 복음이 완성되고, 복음이 전해짐으로 추수의 시대가 시작이 되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보리가 익어서 추수할 시기가 되었다는 것은 영적 추수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았던 그날을 기념하는 것처럼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신비의 율법이 새겨지는 역사가 일어난 날이기도 합니다.
오시기로 약속된 성령님
에스겔과 예례미야에 이 예언이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이 에언을 새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언약은 에스겔과 예레미야를 통해 이미 예언되었습니다. 새 언약의 핵심은 율법을 ‘알아야한다’가 아니라 ‘너희가 알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이 새 마음과 새 영을 부어주셔서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에 새겨 주는 일을 성령님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을 읽고 스스로 판단하고, 깨달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면 마치 율법이 내 안에 내장된 것 같은 효과가 일어납니다. 새 마음이 이식되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내가 판단하고 행하는 것만 가지고는 인생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오심으로 율법을 우리 마음속에 넣어주셔야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실천하지 못했던 일을 실천하게 됩니다.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마음이 새겨지는 역사입니다.
구약의 절기는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양이 죽는 희생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장차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이후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성령님이 오신다는 것을 미리 예언하는 절기입니다.
“마침내 오순절이 이르렀을 때 그들이 모두 함께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1절).
성령님이 오신 사건이 오순절에 있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순절이 의미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님이 오신 사건은 제자들이 소리 높여 기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기도를 안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은 제자들의 간절한 기도 때문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기다렸기 때문에 오신 것도 아닙니다. 성령님은 이미 오순절에 오시기로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약속된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약속 된 성령님을 기다리지 않으면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령님을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간의 어떤 노력, 능력, 자질 때문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
기다렸던 모든 이들에게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아마 새벽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갑자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고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마치 불같은 혀들이 갈라지는 것이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그러자 모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하게 하심을 따라 그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2~4절).
성령님이 오심과 함께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첫째,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하늘로부터 임했습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바람은 히브리어로 영과 같은 단어입니다. 바람으로 쓰기도하고 영으로도 씁니다. 이 단어는 영적인 생명력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성령님은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임재하셨습니다. 태풍이 집을 날려버리고, 나무뿌리까지 뽑아버린 것처럼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를 내면서 임했습니다. 성령님은 종종 소리를 사용하십니다. 소리로 임하시는 성령님입니다. 때로는 침묵 가운데 임하기고합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은 “6일간은 너희가 침묵하며 돌기만 하여라”고 명령했습니다. 불신의 소리를 잠재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7일에는 “너희가 함성을 지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소리 지른다고 벽이 무너집니까. 아닙니다. 소리가 커서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믿음의 소리였기 때문에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임재 하실 때에는 강한 믿음의 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홀로 소리 내서 기도해보십시오. 그 소리 속에 임재하시는 성령님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리를 사용하십니다. 성령님의 임재가운데 주어지는 소리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여러분, 믿음은 들음에서 나옵니다. 들리는 소리가 있어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는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강기류처럼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죄를 태우고, 정결케하는 성령의 불
두 번째 현상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사람 위에 임했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오시는 것은 불의 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데 쓰이는 단어입니다. 아브라함은 타는 횃불을 보았고,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았고, 광야에서 백성들은 불기둥을 보았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했을 때 하나님의 불이 제단에 내려왔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할 때 불이 위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을 때는 비둘기 같은 성령이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각 사람에게 불이 임했지만 태우지는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불은 물질을 태우지만 성령의 불은 사람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죄를 태우고, 정결케 합니다. 불같은 성령이 임하면 우리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성령의 불같은 역사가 있습니다. 단지 몸만 뜨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가운데 있던 죄가 뜨거운 성령의 역사로 태워집니다. 정결케 됩니다.
왜 불이 혀로 나타났을까요. 불같은 뜨거움이 말씀의 전파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은 한 사람의 마음속에 조용하고 은밀하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함께 체험하는 사건으로 임합니다. 성령의 임재는 교회에 내려온 능력이요, 체험입니다. 알 수 있고,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누가복음 24장 49절에서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입는 것입니다. 나의 결심이나 결단 이전에 위로부터 내려온 능력입니다. 오순절에 성령님이 오신 사건은 교회가 시작된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존재하던 교회에 성령의 능력이 임한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리켜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지금 수준에 머무르는 믿음이 아니라 더욱 큰 믿음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사건은 이미 믿는 사람들이 경험한 체험입니다. 2차적 체험입니다. 오순절에 임했던 성령의 역사는 현상으로 볼 때는 단회적입니다. 이 현상이 동일하게 나타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언제나 바람소리처럼, 불이 보이는 것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4장에서는 땅이 진동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땅이 진동하는 사건으로 성령이 임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큰 기쁨으로 임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순교의 믿음으로 나타났습니다. 각기 다른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모두 성령님의 능력을 입는 사건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성령의 능력을 입는 사건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 사건이 없으면 절대 부활의 증인 될 수 없습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은 바람과 불이 한꺼번에 나타났습니다. 둘 다 능력의 상징입니다. 바람도 변화를 일으키고, 불도 태우는 변화를 일으킵니다. 바람과 불이 하나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대화제가 일어납니다. 불과 바람이 하나가 되면 엄청난 영향력이 있습니다. 영적 대각성이 이와 비슷합니다. 영적 대화제입니다. 보스턴에 노스햄튼교회에서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가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의 제목은 ‘진노한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입니다. 눈이 어두워서 원고를 손에 들고 읽었습니다. 화려하고 강력한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촛불을 들고 원고를 읽는데 사람들에게 불이 임했습니다. 보이는 현상은 아니었지만 불이 임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한쪽에서는 조지 휘필드라는 사람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조지 휘필드는 미국 동부에 대화제를 일으켰습니다. 동에서는 불이 임하고, 한 사람을 통해서는 바람이 임했습니다. 그 둘이 하나가 되었을 때 18세기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이 벌어졌습니다. 1907년에 평양에서 있었던 대부흥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귀한 믿음의 선배들이 말씀과 기도를 통해 불이 일어나고, 바람이 일어나서 평양 전체에 영적 대화제가 일어났습니다.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신학교가 세워지고, 1주일 동안 모여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조지 휘필드는 1740년도에 뉴브른스윅에서 일어난 자신의 체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의 집회에서 빌보트테네시가 설교하였고 내가 그 다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약 6분 가량이 지난 후에 어떤 사람이 성령이 오셨다 성령이 말하신다고 소리쳤다. 그는 자기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확증을 제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기뻐서 어찌나 소리를 지르던지 내 기도를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자신의 영혼이 어찌나 충만했던지 나는 자신의 비열함과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주권과 위대함을 의식하며 주님 엎드려 울어버렸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기도와 찬양으로 그 밤을 보냈다. 그 밤은 결코 잊지 못할 엄청난 밤이었다. 하나님의 임재가 내 영혼을 어찌 충만케 했는지 나는 그 앞에 서있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여러분, 우리 모두 이러한 체험을 사모하고 기다려합니다. 이런 체험 가운데 신기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세 번째 현상입니다.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언은 외국어였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영적 언어는 다른 지역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입니다. 수많은 지역에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왔습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로 방언으로 말할 때 하나님이 행하신 일, 복음의 위대한 역사, 예수님의 십자가의 부활의 진리를 자신들의 언어로 듣게 되었습니다. 왜 성령님은 이런 역사를 이루셨을까요.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려는 것입니다. 언어를 배워서 복음을 설명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까. 급속하게 복음이 증거하려고 방언으로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필요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성령님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성령님의 덧입음을 체험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바람처럼, 불처럼, 때로는 진동으로, 기쁨으로 임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고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능력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기쁨으로 충만하십시오. 부활의 증인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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