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기도하며 사도를 세우다 (사도행전1:12~26)

새벽지기1 2017. 12. 4. 07:05

 

“질서가 있지만, 그것을 절대시 하지 않고,
성령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해야합니다.”

 

사도행전의 위대한 역사는 사도들이 함께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선물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약속을 기다리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직후 성령님이 강림하셨다면 더 멋있을 것 같은데 왜 열흘간 기다리게 했을까요. 기다림의 기간이 기도의 기간으로 변화될 것을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언제나 기다림의 시간이 요구됩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없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고, 의지하는 겸손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없으면 우리의 성취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의 기간을 통해 하나님 앞에 겸비하고,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셨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기다림은 우리에게 큰 축복이요,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120명의 기도하는 사람들

장차 도래하실 성령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기도 가운데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기도해야만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보다 더 중요한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를 통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해야하는 시대가 도래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함께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순종하는 교회입니다. 어떤 회의와 나눔보다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이 120명 정도라고 합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인구가 4백만 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120명은 극소수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운명을 소수의 사람들에게 맡기셨습니다. 120명이 한마음으로 전심을 다해 기도할 때 사도행전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곳에 모인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14절).
구성원들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여자들도 있었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도 있었습니다. 여자들이 있었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오늘 이 시대에는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당시에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남녀차별이 있었습니다. 여자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채택되지도 않았던 시대입니다. 족보에 여인의 이름은 한 사람도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이름으로 재산을 소유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120명의 기도하는 무리들 중에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 초기시절에도 남녀유별이 심했습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원칙으로 예배를 드릴 때 남자와 여자가 따로 앉고 커튼까지 쳤습니다. 설교하는 사람은 양쪽을 볼 수 있었지만 남녀는 서로를 볼 수 없었습니다. 시옷자 예배당, 기역자 예배당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메시야의 어머니가 이제는 기도하는 한 명의 여자 성도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마리아의 위대함은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숭배 받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것을 가지고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기도하는 한 사람의 여성 성도였습니다. 초대교회 분쟁의 자리에 서지도 않고,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않는 한명의 성도로 존재했습니다. 그녀는 교회의 머리가 되려고 하지 않고, 교회의 일원으로써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위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초대교회의 일원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이 시대 모든 교회 리더십들이 주목해야합니다. 이것은 누구도 교회의 주인 역할을 할 수 없고, 누구도 교회의 머리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교회의 일원일 뿐입니다. 모두 겸손하게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야합니다.
예수의 동생들도 이 무리들 가운데 있었다는 기록은 매우 의도적인 기록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정신병에 걸렸다고 비판하면서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의 일원으로 함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직 믿지 않는 성도들에게 기도제목과 위로와 도전을 줄 것입니다.

 

기도하면 생각이 바뀐다

베드로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예전에 베드로는 매우 충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버려도 자기는 예수님을 버리지 않는다고 자신만만했던 사람입니다. 자기 과신이 그를 실패하게 했습니다. 그런 그가 기도하는 무리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가 이 무리들 가운데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셔서 회복시켜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기 시작한 내용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살한 유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제자가 스승을 배반할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기들과 3년 동안 함께 지냈던 동료가 자살을 한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면 생각이 바뀝니다. 기도하고 내린 결정과 생각하고 내린 결정은 차원이 다릅니다. 기도하면 우선순위가 바뀝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일이 중요하지 않게 되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일을 하지 않게 되고, 생각하지 않았던 일을 하게 됩니다. 갑자기 새로운 사람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만약 그들이 함께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베드로가 유다 사건을 떠올릴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는 기도하는 가운데 유다의 배신이 예언된 사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예수를 체포한 사람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해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해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이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우리 가운데 속했던 사람이었고 이 직무의 한 몫을 담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16~17절).
베드로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형제들과 나눴습니다. 모두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다의 배신을 성경의 예언대로 이뤄진 사건이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는 이제 과거의 어부가 아닙니다. 예언이 성취된 시각으로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도가 성경과 상황 해석의 열쇠입니다. 기도할 때 말씀이 열리고, 상황이 보이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유다의 배신이 구약에 예언되었다고 해서 그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존 칼빈은 유다에게 닥친 일이 예언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그의 죄를 면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유다의 마음이 변절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유다의 선택을 미리 아셨기에 예언하셨을 뿐입니다. 가룟 유다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탐욕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한 것입니다.

 

나머지 한 사람의 사도를 뽑는 과정

또한 베드로는 유다의 죽음으로 부족하게 된 자리에 다른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시편에 ‘그의 거처를 폐허가 되게 하시고 그곳에 아무도 살지 못하게 하십시오’라고 기록됐고 또 ‘다른 사람이 그의 직무를 차지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록됐습니다“(20절).
베드로는 이 말씀을 하나님이 유다를 대신할 사람을 세우라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120명이 모였는데 굳이 유다를 대신할 또 한 사람의 사도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했을까요.
“새 세상에서 인자가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게 되면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 19:18).
베드로는 열둘이라는 완전수가 채워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통해 상황을 해석하고, 그 상황 속에서 해야 할 일들을 깨닫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패턴입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과 상황이 연결되고, 그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 교회의 역사입니다. 나머지 한 사람의 사도를 뽑는 과정이 그 모범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항상 우리와 같이 다니던 동안에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해 예수께서 우리들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워 가시기까지 함께 다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뽑아 우리와 함께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게 해야 합니다”(21~22절).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만든 자격조건입니다. 첫 번째 조건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입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을 때부터 승천 때까지 줄곧 함께 있었던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이 되어야합니다. 이것이 사도로 세움을 받을 수 있는 자격입니다. 120명 중에도 분류가 있었습니다. 질서가 있었습니다. 120명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리더십 그룹을 사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처음부터 승천 때까지 함께한 사람 중에서 리더십을 세웠습니다. 예수님의 공동체에 조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열한 사도의 이름을 열거한 순서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장 먼저 나옵니다. 베드로는 엄청난 사고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리더의 위치에 있습니다. 대단한 인물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을 갈 때도 이 세 사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도 구분이 있었습니다. 구분과 차별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120명이 남았는데 그 중에 열두 사도가 있었고, 그 사도 중에 핵심이 되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세 사람 중에서 베드로가 리더였습니다. 교회의 질서와 체계는 중요합니다. 질서와 체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평등이 아니라 무질서입니다. 평등이라는 것은 합당한 위치와 합당한 능력에 따라 권한을 부여받은 질서입니다. 예수님의 공동체에는 질서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사도의 조건

 

사도들이 요한의 세례부터 부활승천까지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 새로운 사도가 되어야한다는 기준을 정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 기준으로 바울의 사도권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이슈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가 다메섹으로 가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셔서 나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나를 부르셨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를 사도로 부르셨다. 그래서 나는 사도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사도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도들이 바울을 사도로 선출한 적이 없다고 공격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고린도후서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하는 본문들이 많이 나옵니다. 어떤 기준이 옳을까요. 양쪽 다 옳습니다. 먼저 사도들의 기준를 보십시오. 사도들의 기준은 합리적입니다. 예수님의 처음부터 승천까지 함께 있었던 사람 중에 사도를 뽑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같은 사람이 등장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문제입니다. 모두가 사도바울처럼 특별한 계시를 받아야 사도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교회든 사람을 세우는 틀이 있어야 합니다. 자격조건이라는 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승천하시기까지 함께한 사람인데 사도바울은 그 자격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3년 동안 제자들과 사는 동안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나타난 인물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사도가 될 수 없디고 공격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잘못입니다. 교회에는 기도 가운데 세운 틀이 있습니다. 그 것은 어떤 조건이라도 절대화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 스스로 만들어 놓은 틀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틀을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서로 틀을 만들고, 틀과 틀이 부딪히는 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율법이라는 틀도 사도행전 15장에 없애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율법도 폐지시키는데 우리는 스스로 만든 법을 붙잡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유동적입니다. 유기체보다 융통성이 있는 유동체입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유동체와 같아야하는데 사도들이 세운 조건에 바울이 합당하지 않다고 비방하는 것은 인간적인 조직체 틀에 갇힌 것입니다.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흥미로운 일이 많습니다. 성 어거스틴을 회심시킨 암브로시우스라는 밀라노의 감독이 있습니다. 그는 영향력이 있는 교회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북 이탈리아 총독으로 임명받아 갔습니다. 감독을 세우는 선거에서 교인들이 싸울까봐 감독하러 갔다 감독이 되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를 감독으로 세웠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세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사제로 안수를 받지도 않았습니다. 감독은 그 지역 교회 최고 지도자입니다. 그는 속성과정으로 하루는 세례를 받고, 다음날 안수를 받고, 그 다음날에 감독으로 취임했습니다. 암부르시우스는 밀라노 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줬습니다.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어거스틴이 회심을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초대교회의 위대한 신학자요, 교회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암브르시우스는 감독이 될 자격이 없었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역사로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는 우리가 만들어놓은 틀을 없애야합니까. 아닙니다. 틀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틀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왜 바울을 사도로 부르셨습니까. 교회가 틀에 갇히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교회의 리더들이 조직의 리더가 되고, 조직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질서가 있지만, 절대시하지 않는 것

“그래서 사도들이 두 사람, 곧 바사바 또는 유스도라고도 불리는 요셉과 맛디아를 추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가운데 주께서 택하신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 주셔서 이 봉사와 사도의 직무를 대신 맡게 해 주십시오. 유다는 이것을 떠나 자기 자리로 갔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제비를 뽑았는데 맛디아가 뽑혀서 그가 열한 사도들과 함께 사도의 수에 들게 됐습니다”(23~26절).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기도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택하신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기도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가장 큰 시험과 갈등의 원인은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이 한국교회를 얼마나 상하게 했고, 얼마나 능력을 잃어버리게 했습니까. 부활의 증인이 되는 사람을 세우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누가 세워지는가에만 집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틀과 자격이 중요합니다만 그 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우는 사람들의 마음도 중요합니다. 자기들이 세운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세우는 것입니다. 그들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할 때 제비를 뽑았습니다. 구약의 관습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사람을 세우는 일에 함께 기도하고, 주님이 택하신 사람을 받아들이고, 세우는 과정이 없으면 사도행전적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 이유는 기도 가운데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기도 가운데 한마음이 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이 뚜렷이 들려오고, 세상적인 분열과 다툼으로 얼룩지지 않고,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을 세워가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질서가 있지만 틀을 절대시 하지 않고 성령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