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때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선택권을 넘겨 드리고, 최선의 응답을 받기를 바랍니다.
이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일어나는 일들이 불확실해 보여도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통해 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이뤄주실 거라고 믿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오늘 본문은 기도응답의 확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갖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곧 무엇이든지 우리가 그분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을 알면 우리는 우리가 구한 것들을 그분으로부터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4~15절).
우리가 갖고 있는 확신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그분이 우리가 구한 것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대로 역사를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은 담대함이라는 단어로 바꿔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담대한 확신과 담대한 지식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므로 자비하심을 얻고 필요할 때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갑시다”(히 4:16).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로 인해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한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히 10:19).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함이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가지고 있는 담대함과 같습니다. 어린 자녀는 부모가 전능한 줄 압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서슴없이 구합니다.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구합니다. 그것이 바로 담대함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자라면서 부모가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보다 해줄 수 없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더 자라면 부모가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바라기보다 자신이 무엇을 해드릴지를 고민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이 없는 분이라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인간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의 차이점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몰라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정말 있어야 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구하고 또 구하면 기도를 바꿔주시기도 하고, 구해야 할 것을 구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정말 있어야 될 것을 깨닫는 과정이 바로 기도입니다. 내가 구하고 받는 과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채워주셨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 나서 얻었다고 생각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구하고, 찾고 부르짖으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한 소녀가 선교사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소녀가 편지 쓰는 모습을 보고 부모가 권면했습니다.
“애야 선교사님이 너무 바쁘시니까 답장을 요구하지는 마라.”
그 소녀가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선교사님의 어떤 대답도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답장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 편지의 내용과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답장은 필요 없다는 태도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유형의 기도응답
세 가지 유형의 기도응답이 있습니다. 첫째는 거절, 둘째는 그대로 이뤄주는 것, 셋째는 기다리라는 응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들어주신 것만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절하는 것도 응답입니다. 우리가 구한대로 받지 못한 것은 잘못된 동기로 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욕심에서 나온 기도는 절대로 응답되지 않습니다. 기도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CS루이스의 영적멘토였던 조지 맥도날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주 미미하고 세세한 것에 귀를 기울여주시는 신이 아니라면 믿을 수 없는 신이다. 그러나 반면에 인간의 요구를 하나도 물리치지 않고 듣는 족족 다 받아주는 신이라면 그것은 악신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어떤 사람은 심장마비에 걸렸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사이비 교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대로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다 결국 인생을 망가뜨리는 결과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심에 절대 응답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영광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나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리라”(빌 4:18~19).
우리는 이 고백을 ‘나의 하나님이 영광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나의 욕심을 채우시리라’고 바꿔서 읽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욕심과 필요를 구별할 줄 아는 마음이 없다면 기도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잘못된 태도 때문에 응답받지 못한 ‘모세’
잘못된 태도 때문에 하나님이 기도응답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모세가 가나안 땅을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기도능력을 잘 압니다. 그의 기도를 통해 수많은 민족이 생존했고,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진노했을 때도 그의 중보기도를 통해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중보기도를 듣고 진노를 거두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도응답입니까. 모세가 오랜 세월 동안 백성들을 인도하느라 얼마나 수고를 많이 했습니까. 하나님이 모세의 수고를 기억하신다면 그 땅을 보게 해달라는 간청을 들어주셔야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것으로 충분하니 이 문제에 대해서 더는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민수기 10장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다가 목이 말라 불평할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흥분해서 바위를 두 번이나 쳤습니다. 하나님이 물을 주셨는데 모세는 자신의 능력으로 백성들에게 물을 공급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인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백성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영적 지도자의 책임인데 모세는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처럼 백성들을 향하여 분노를 퍼붓고, 바위를 두 번씩이나 쳤습니다. 감정적인 실수를 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그냥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모습이 자녀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영향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는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모세의 행동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행동으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왜곡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의 역할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로 정하셨습니다.
만약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세가 우상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모세가 영웅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준 모세가 백성들에게서 영광을 받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이미 아시고 모세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달랐기 때문에 모세의 기도를 거절하셨습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 이뤄주시는 하나님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세 번씩이나 간구했지만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의 질병을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내게서 떠나도록 주께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왜냐하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약한 것들에 대해 크게 기뻐하며 자랑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기 위함입니다”(고후 12:8~9).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은 것을 또 다른 응답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이 얼마나 다른지를 체험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로 가기를 원했을 때 하나님은 바울이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가게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금의환향하는 모습이 아니라 죄수의 모습으로 로마에 가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섭섭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갔기 때문에 아그립바 왕 앞에 설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지혜로운 철학자의 모습으로 로마에 갔다면 아그립바 왕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수의 몸으로 갔기 때문에 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시지만 또 다른 방법으로 이뤄주십니다.
미국에서 사역하셨던 크리스웰이라는 목사가 이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나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약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승리할 때 교만해지지 않도록 눈물도 함께 보내셨습니다. 나는 빛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나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나 비록 멀리 볼 수는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동행하심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나는 성취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하였는데 하나님은 내가 순종하도록 약하게 만드셨습니다. 나는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건강을 달라고 간구했는데 하나님은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나는 행복해질 수 있도록 부유함을 간구하였는데 하나님은 내가 지혜로워질 수 있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칭찬 받을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하였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약함을 주셨습니다. 나는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달라고 간구하였는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생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내가 간구한 것은 아무것도 응답 받지 못했지만 내가 소망했던 모든 것들에 대하여 나의 기도는 응답 받았습니다.”
분명히 들어주시는 기도
두 번째 기도응답은 분명히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신을 섬기는 자들과 대결을 했을 때 하나님이 불을 내려 주셨습니다. 엘리야가 강력하게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엘리야가 기도한 내용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왕을 통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느헤미야가 지위가 높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기도 내용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그 뜻대로 이뤄집니다. 기도의 올바른 방향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올려서 받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우리를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십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이뤄주신다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확신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도 있고, 응답하시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소원에 대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일 15:7).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룬다고 하셨는데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조건이 있습니다. 또 성도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의미합니다. 나의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이 될 때 기도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과 거리가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마디 기도로 역사가 일어났는데 우리는 한마디 기도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주님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먼저 듣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내 뜻을 말하기 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성령 안에서 먼저 듣고, 그 뜻을 나의 소원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그 뜻을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최선의 응답을 받는 기도
세 번째 기도응답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다리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냥 기다라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350년 전 청교도였던 토마스 왓슨은 하나님이 왜 기도응답을 지체하시는지를 네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하는 소리를 더 듣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를 더 겸손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넷째, 기도응답이 이뤄질 때 기쁨이 더 충만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가랴라는 제사장은 자녀가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사가랴에게 “너의 기도를 듣고 너에게 자녀를 준다”고 했을 때 사가랴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제가 그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를 기대하지 않았고, 응답될 것이라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전에 기도응답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보십니다. 하나님이 기다리라고 하는 것은 거부가 아닙니다.
사보나롤라는 “하나님의 지체를 하나님의 거부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작은 것을 너무 급하게 구합니다. 여러분, 세례요한의 출생이 늦어진 이유는 예수님의 출생의 때와 맞추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도응답이 지연되면 이 말씀을 떠올리십시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넘치도록 하실 수 있는 분에게”(엡 3:20).
하나님이 우리가 구한 것보다 훨씬 더 넘치도록 역사하기 위해서 기다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옳지 않은 것을 구할 때 하나님은 거절하십니다. 우리가 더 성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옳지 않은 타이밍에 구할 때에는 하나님은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때 응답하기 위해서입니다.
레너드 레버힐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께 선택권을 넘겨 드리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최선을 주신다.”
하나님께 모든 선택권을 넘겨 드리고, 그분의 최선의 응답을 받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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