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구원의 확신 (요한일서 5:6~13)

새벽지기1 2017. 11. 28. 07:14

 


하나님의 증거를 확인하고, 기도하고, 나아가면 
확신을 심어주실 것입니다. 구원을 누리십시오.


요한일서가 기록된 목적은 확신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13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불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인데도 불구하고 자신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다는 믿음을 가지고도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가르침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죄 사함과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많은 성도들을 의심하게 만들고, 불안에 빠뜨립니다. 구원파가 구원의 확신 문제를 잘못 다루면서 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린 것과 같습니다. 구원의 확신 없어도 구원받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믿음과 확신의 차이


존 라일이라는 청교도 목회자는 믿음과 확신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믿음이 뿌리라고 한다면 확신은 꽃과 같다. 뿌리 없는 꽃은 있을 수 없지만 꽃이 없는 뿌리는 있을 수 있다. 믿음이 군중을 비집고 들어가 살그머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과 같다고 한다면, 확신은 자신을 돌로 치려는 사람들 앞에서 ‘보라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고 고백했던 스데반과 같다. 믿음이 십자가상에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생각해 달라’고 간청했던 강도와 같다면, 확신은 온몸이 다 헐어서 먼지더미에 앉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에서도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신다’고 고백했던 욥과 같다. 믿음이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할 때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었던 베드로와 같다면 확신은 훗날 그 베드로가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이름을 주신 일이 없었다’고 외쳤던 것과 같다.


믿음이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간청했던 떨리는 음성과 같다면 확신은 ‘누가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송사하리요. 의롭다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담대하게 외치는 음성과 같다. 믿음이 다메섹의 유다 집에서 눈이 먼 채 홀로 외롭고 충격과 슬픔에 잠겨 기도하던 사울과 같다면 확신은 연로한 죄수의 몸으로 자신의 무덤을 생각하며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 믿음을 지켰으니 나를 위하여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고백했던 바울과 같다.”
구원을 얻는 것과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별개입니다. 구원의 약속은 확신의 믿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연약한 믿음에도 주어집니다. 가장 작은 믿음도 가장 큰 믿음과 마찬가지로 구원을 얻게 합니다. 그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가지에는 열매가 없어도 뿌리에는 생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확신이 없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가르침은 잘못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성경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이 처음 나오는 구절은 창세기 15장 6절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별을 세어 보아라. 과연 셀 수 있겠느냐.’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손도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그런 믿음 때문에 그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창 15:5~6).


하나님이 노아를 의롭게 보셨다는 구절이 있지만 믿음 때문에 의롭게 되었다는 구절은 이 구절이 처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브라함의 믿음은 확신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밖으로 나가 별을 보여준 이유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건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식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아직 사라에게 아무런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양자를 들이는 방법으로 대를 이어 가겠다고 건의했습니다. 불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아이디어가 나온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하늘의 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별을 셀 수 있느냐?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생겼습니다. 당시 그의 믿음은 시청각이 필요했습니다. 연약한 믿음이었습니다. 무엇인가를 봐야만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불신앙의 모습을 계속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직 확신도 없는 믿음의 상태에 있는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셨습니다.


창세기 22장에 하나님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확신에서 나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약속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여주는 것도 없고, 징조도 없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확신의 믿음입니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믿음의 단계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다면 우리 모두는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상태에서 의롭게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가장 연약한 믿음을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영생을 믿는 것과 확신은 다르다

 

여러분, 구원은 믿음의 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진실성에 달려 있습니다. 확신이 결핍되었다고 해서 불신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하고,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움 속에 있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영생을 믿는 것과 확신은 차이가 있습니다.
스테판 차녹 (Stephen Charnock)이라는 청교도가 이런 문장을 썼습니다.
“믿음은 마음에 새겨졌으나 먼지로 잔뜩 뒤덮여 읽을 수 없는 편지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먼지 때문에 그 편지 내용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읽지 못한다고 해서 증서의 효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확신 없이 구원받을 수 있지만, 확신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불필요하게 여기거나 구원의 확신을 부인하는 것은 더 큰 잘못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확신의 근거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확신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입니다.

나의 의와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입니다.
확신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마치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이 안 됩니다. 생명이 있으면 느끼고, 체험하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웨스트 민스터의 신앙고백 문답 81번째 내용입니다.
“모든 진실한 신자는 현재 은혜의 상태에 있고, 장차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항상 확신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입니다.
“은혜와 구원의 확신은 신앙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기에 진실한 신자도 확신을 얻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을 뿐 아니라(요일5:13), 확신을 얻은 후에도 혼란과 죄와 유혹과 실족으로 인해 그 강도가 약해지거나 아예 중단되기도 한다.(시77:7~9, 8:31~32) 그러나 성령이 항상 함께 하시며 도우시기 때문에 결코 완전한 절망에는 이르지 않는다”(시 73:13~15. 23, 요일 3:9, 사 54:7-11).


중요한 몇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구원을 얻는 것, 믿음과 구원을 확신하는 믿음은 다를 수 있고,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고,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확신을 얻은 성도라 할지라도 유혹과 죄와 실족함으로 혼란함으로 강도가 약해질 수도 있고, 때로는 상실할 수도 있지만 구원을 얻은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를 절대로 버리지 않기 때문에 완전한 절망에 이르지는 않는다. 이 차이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카이프라는 신학자는 완전히 확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확신이 결여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 사상의 5대 핵심교리가 있습니다. 5대 교리를 TULIP이라는 약자로 부르기도 합니다.

첫째 인간의 전적 타락과 무능력(Total depravity and inability), 둘째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셋째 제한적이며 특별한 속죄 (Limited and particular atonement), 넷째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다섯째 성도들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입니다.
성도들의 견인은 구원의 확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의 견인이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끝까지 믿음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흔들리고, 넘어지고, 때로는 진짜 믿는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넘어지지만 거듭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아서 죽는 날까지 믿음을 지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신자의 영원한 보장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강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 때문에 유지가 가능한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 하나님의 증거를 믿는 것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은 모두 다 내게 올 것이요, 또 내게로 나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내쫓지 않을 것이다”(요 6:37).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다”(요 10: 28).
때로 확신이 흔들리고, 확신이 상실된 것 같은 상황이 있을지라도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아무도 내 손에서 그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우리가 끝까지 견딜 수 있는 근거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기에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부터 확신이 나옵니다. 우리는 단순히 구원을 얻는 믿음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으로 나아가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자기 안에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대해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습니다”(10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자기 안에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증거를 믿는 것입니다. 확신은 자기 느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확신은 내가 믿는 믿음의 증거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믿음을 순진하게 잘 속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무슨 말이든 쉽게 넘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증거를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증거를 살피고 그것이 진실된 것인지를 확인하고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대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내가 얼마나 강하게 믿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믿음의 증거가 얼마나 확실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원의 확신이 하나님의 증거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치심과 믿음의 날개


“우리가 사람의 증언도 받아들이는데 더 큰 하나님의 증거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관해 이미 증언하신 것입니다”(9절).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증언하셨습니다. 그 증언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을 다른 말로 하면 ‘증거책’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행하신 일을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과 피로 오셨다고 합니다. 물은 정결함을 의미합니다.

의인이신 분이 죄인과 동일한 취급을 받기 위해서 세례 요한의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분의 공생애의 시작은 물세례였습니다.

의로우신 그분이, 죄가 없으신 그분이 죄인과 같이 되신 것으로부터 출발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시는 것으로

그분의 공생애가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분의 이 땅에서 살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부터 신약까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행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가 나타내는 바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하고, 믿게 하고, 확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순서가 중요합니다. 내 안에 증거가 있을 때 하나님의 증거를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내가 믿을 때 우리 안에 증거가 임하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증거를 찾기 시작하면 그것은 보험과 같습니다.

내가 많은 것을 행했고, 내가 하나님 앞에 드렸고, 내가 의로운 삶을 살았고,

내가 확신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보험입니다.

보험은 내가 얼마나 많이 들었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돌아옵니다. 구원의 확신은 보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우리가 받아들일 때 성령님이 우리 안에 인치심으로 도장을 찍어주십니다.

그것으로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믿어 약속하신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엡 1:13).
성령님의 도장을 마음에 찍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장은 하나님의 증거가 기록된 것을 받아들이고, 믿을 때 찍어주십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은 성령의 인치심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확신은 새의 날개와 같습니다. 하늘을 날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장에 오래 갇힌 새는 문을 열어줘도 날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날개가 있다는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날개는 확신입니다. 확신이 있어야 믿음의 날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걷게 하는 것이라면 확신은 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확신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구하고, 찾는 자에게 성령의 인치심을 주십니다.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확신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더욱 힘써 여러분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건히 하십시오. 여러분이 이것들을 행하면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벧후 1:10).
“그래도 우리는 여러분 각자가 소망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열심을 나타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러분은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상속받은 사람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히 6:11~12).
이러한 노력이 확신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아닙니다. 확신이 임하는 통로와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확신이 임하는 통로와 수단을 게을리 한 채 나에게 확신이 없다고 불평하면 안 됩니다.

열심을 품고, 게으르지 않고, 하나님의 증거를 확인하고, 기도하고, 나아가면 반드시 하나님이 확신을 심어주실 것입니다. 간신히 구원받는 성도가 아니라 확신이 있는 구원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