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예수바보행전 (사도행전 2:42~47)

새벽지기1 2017. 12. 8. 07:26


예수님을 바로 보고, 세상의 필요를 바로 보살피고, 
세상에 예수님을 바로 보여 주는 것이 예수바보행전입니다.

 

지금까지 온누리교회는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꾸며 ‘Acts29 비전’을 붙잡았습니다. Acts29 비전은 사도행전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 써지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온누리교회가 사도행전 29장을 쓴다고 하니까 이단이라고 정죄합니다. 사도행전은 28장까지 밖에 없는데 온누리교회 마음대로 29장을 쓴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Acts29 비전은 성경을 바꾼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8장은 끝나는 것 같지 않게 끝납니다. 대개 맺음말이 나오고, 작별인사가 나오는데 사도행전은 성경공부를 하다가 끝이 납니다. 사도행전은 현재진행형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여기서 착안해 사도행전의 역사는 오늘 이 시대에도 계속 써지고 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 바로 Acts29 비전입니다.
온누리교회가 창립 30주년을 맞이하면서 계속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꾸는 동시에 새롭게 결단해야 하는 비전을 찾았습니다. 사도행전 강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제게 주신 슬로건입니다. 새롭게 찾은 비전은 ‘예수바보행전’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바보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전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그대로 이어간다면 세상 사람들 눈에는 우리가 바보로 보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보였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에 나오는 성도들은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에 더 직접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리스도께 미친 사람’, ‘그리스도께 완전히 몰입된 사람’, ‘그리스도를 위해 바보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이 의미들을 모두 함축하고 있는 단어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혹시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가 된다는 것이 마음에 부담이 됩니까.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가 된다는 것이 불편하다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 믿는 것처럼 살고 있는지 아니면 진짜 예수님을 믿으며 살고 있는지를 되돌아 봐야 합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바보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보라고 표현한 것이 불경스러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바보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추구하던 경쟁, 이기심, 탐욕, 위선적인 삶을 결코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바보로 보였습니다.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예수님은 이루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재산을 모으지도 않았습니다. 교육을 많이 받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자녀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거의 모든 시간을 당시 사람들이 만나기 꺼려하는 사람들과 보냈습니다. 외면당하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로 표현되는 세리와 죄인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33세의 나이에 사형수가 되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실패자입니다. 바보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두 가지 종류의 바보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적인 바보고 또 다른 하나는 의도적인 바보입니다. 자연적인 바보는 지혜와 분별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자기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줍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사회에 유익을 끼치지 못합니다.
의도적인 바보는 자신에게 분명 손해가 되지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손해를 아까워하지 않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외롭게 걸어가는 사람을 가리켜 의도적 바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바보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하늘의 영광을 왜 버리셨습니까. 바보 같은 선택 아닙니까. 예수님은 의도적 바보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입니까.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 흙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바보 같은 선택입니다. 불의한 인간을 내버려 두시는 것이 마땅한데 예수님은 인간이 담당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담당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지셨습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결코 하지 않는 일입니다. 불의한 사람을 위해서 의로운 사람이 대신 죽는 바보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조롱하고, 외면하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고, 친구가 되셨습니다. 성공지향적인 사람들이 볼 때는 바보 같은 선택이었습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거부하고, 배신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경쟁 중심적이고, 자신을 조금이라도 거부하면 가차 없이 버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바보 같은 선택입니다.

 

십자가의 길, 낮아지는 길,
자신을 내려놓는 성육신의 길

 

사도바울은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예수님의 바보 같은 선택을 깨달을 때에만 복음의 위대함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세상이 자신의 지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보이는 말씀 선포를 통해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유대 사람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이것이 유대 사람에게는 마음에 걸리는 일이며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이든, 그리스 사람이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연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고전 1:21~25).‘하나님의 어리석음’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감히 하나님께 어리석다는 단어를 어떻게 대입할 수 있을까요. 전지전능하시고,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지혜의 근원이시며, 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을 가리켜 어리석음이라는 단어를 붙인 것이 타당합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왜 이런 단어가 나왔을까요. 십자가는 세상이 볼 때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이 세상의 그 어떤 지혜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만일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십시오. 그렇게 해야 진정 지혜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기록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을 자기 꾀에 넘어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라고 하고 또 기록되기를 ‘주님은 지혜로운 사람들의 생각이 허망한 것을 아신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고전 3:18~20).


여러분,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스스로를 지혜 있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지혜와 이 세상 사람들의 자랑은 모두 자기 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꾀에 넘어지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지혜 있다고 여기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닙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자연적인 바보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 바보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요, 낮아지는 길이요, 자신을 내려놓는 길입니다. 성육신의 길입니다.

 

‘예수바보’는 예수님을 바로 보는 것

 

‘애플’이라는 회사를 만들어서 전 세계를 뒤집어 놓은 스티브 잡스는 2005년에 스탠포드 대학졸업식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5분밖에 안 되는 짧은 연설에서 자신의 인생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세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첫째. 그는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서 다른 가정에 입양 될 뻔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갔지만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그만 두었다고 했습니다. 둘째, 대학을 중퇴하고 자신이 만든 회사에 들어갔지만 쫓겨났다고 고백했습니다. 셋째, 암에 걸려서 사투를 벌였던 과정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삶을 움직인 문구를 설명했습니다. 그 문구가 바로 ‘Stay hungry, Stay foolish’입니다.
‘Stay hungry’는 굶주린 상태로 머무르라는 뜻입니다. 갈망 속에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Stay foolish’는 어리석은 상태로 머무르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미국 최고의 대학 졸업식에서 최고의 지성인들에게 어리석은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움직였고, 오늘의 자신을 만든 비결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을 이해하는 학생이 몇이나 될까요. 저는 그가 말한 문구는 성경적인 가치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지식이 있고, 조금만 재산이 있고, 조금만 사회적 지위가 있으면 금방 배고픔이 잊어버립니다. 조금만 지혜롭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어리석어 보이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바보로 여길까봐 똑똑한 척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진짜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어 보이는 길을 갑니다. 이것이 스티브 잡스를 움직였던 인생철학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보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바보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바보가 누구입니까.
첫째, 예수님을 바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며 떡을 떼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42절).
예수님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가르침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가르침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보기 위해서 배운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는 것은 단 한 가지 목적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보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이 있어도 예수님을 바로 보는 시각이 없으면 헛것입니다. 성경을 깊이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는 것입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요술방망이가 아닙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기도는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역사속의 인물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기도입니다. 사도들이 떡을 뗐다고 했는데 그것은 배고픔을 위한 식사가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식사와 성찬을 거의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빵을 떼고 떡을 떼었다는 것은 그들이 성찬을 통해 예수님을 기억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이것은 내 살이요, 내 피니 이것을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성찬이야 말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제도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바보처럼 사셨던 그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게 되셨습니다”(히 12:2).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예수바보입니다.

 

‘예수바보’는 이웃을 보살피는 사람들

 

둘째, 예수바보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보살피는 사람들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여 모든 물건을 함께 쓰며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 각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눠 주었습니다”(44~45절).
그들은 모든 물건을 함께 쓰며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었습니다. 이 구절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유재산을 금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강제적 재산공유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필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나누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이 금하는 것은 사유재산이 아니라 이기심입니다. 그들은 공동소유나 공평이나 평등 같은 이념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필요가 생길 경우 자발적으로 자신의 것을 조금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바보 아닙니까. 왜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저런 사람들을 가리켜 바보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바보처럼 필요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재산을 나눠줬습니다. 여러분, 필요는 욕심과 다릅니다. 자신은 필요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욕심일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간절히 필요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엄청난 사치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필요를 바로 보살피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기근이나 재난 등으로 극심한 궁핍가운데 있는 필요를 보고 바로 보살필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바로’는 ‘올바로’라는 의미도 되지만 즉시라는 의미로도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저는 30년 후 온누리교회가 지금까지 해외선교에 헌신한 만큼 이웃의 필요를 보살피는 헌신도 같이 상승했으면 합니다. 해외선교를 줄여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선교도 하지만 이웃의 필요를 돌보는 일에도 그만큼 헌신했으면 좋겠습니다. NGO 더멋진세상을 통해 세계의 필요를 채울 뿐만 아니라, 사회선교를 통해서 우리 이웃을 돌보고 바로 보살피는 공동체가 예수바보공동체입니다.


예수바보는 세상에 예수를 바로 보여주는 사람들


셋째, 예수바보는 예수를 세상에 바로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임했는데 사도들을 통해 기사들과 표적들이 나타났습니다”(43절).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아 주께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을 더하게 하셨습니다”(47절).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도들을 보고 당시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기적들이 그들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갑자기 신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복음이 증거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사와 표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놀랍게도 세상의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렇다고 기적과 표적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면 안 됩니다. 복음증거를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병든 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복음을 증거를 했을 때 기적과 표적이 나타납니다. 또 다른 반응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과연 온누리교회가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요. 지역주민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 온누리교회가 주차장이 없는 교회가 되어도 출석하시겠습니까. 주차장이 이렇게 넓은데 주차장이 없는 교회가 된다면 “바보 아니야?”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런 결단을 내린다면 지역 주민들로부터 칭찬을 받지 않을까요.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는 일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벤트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꾸준하게 세상을 섬길 때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칭찬할 것입니다. 그때 구원받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교회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예수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보고, 세상의 필요를 바로 보살피고, 세상에 예수님을 바로 보여주면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해질 것입니다. 온누리교회가 창립 60주년을 맞이할 때는 예수바보교회, 예수바보행전을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평가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불러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