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우리는 증인입니다 (사도행전 3:11~26)

새벽지기1 2017. 12. 13. 06:57

 

역사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지만,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복에 참여할 수 있다고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교회는 증인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는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증인이란 자신이 보고, 듣고, 체험하고, 목격한 것을 그대로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에 이르렀는지를 점검해 볼 수 있는 기준은 내가 보고, 듣고, 체험한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보면됩니다. 전도와 선교를 통해 내가 체험한 하나님을 증거하려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믿음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증거의 책입니다. 예수님도 성경을 ‘예수님에 관한 증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너희가 내 증인들이다. 내가 뽑은 내 종이다. 내가 너희를 뽑은 것은 너희가 나를 알고 믿고 내가 하나님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나보다 앞서 만들어진 신이 없으며 나 이후로도 없을 것이다”(사 43:10).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목적은 그들을 증인으로 세우려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그들이 먼저 알게 하고, 열방에 증거하게 하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연약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을 불러 증인으로 삼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약점과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증인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
교회의 정체성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도 증인이요, 사도들의 정체성도 증인입니다. 이 시대 교회의 정체성도 증인입니다. 사도행전의 중심 단어는 증인입니다. 사도행전은 증인들의 고백이요, 증인들의 행적입니다. 이 시대 교회의 역사는 우리가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회복할 때 쓰이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3장부터 증인으로 변화된 사도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을 주목하고 그 사람을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 일으켰습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왜 이 일을 이상하게 생각합니까? 또 우리 자신의 능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합니까?’”(12절).
베드로의 이 말이 참된 증인의 고백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참된 증인은 우리가 기적의 주인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기적의 주인공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예수님이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고백합니다. 교회도 역사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실패한 이유는 주인공이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인공이 되려고 할 때 실패합니다. 우리는 증인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나타내고,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증인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그분의 이름이 여러분이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온전케 했으니, 예수로 인해 난 믿음이 여러분 앞에서 이같이 그를 완전히 낫게 했습니다”(16절).


여러분, 우리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우리를 주목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뤄진 일입니다. 교회가 주목의 대상이 되면 증인으로 실패한 것입니다. 성령의 기적과 역사가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그 도구가 된 사람이 주인공이 되거나 주목을 받으면 그것은 증인으로써 철저히 실패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철저하게 증인으로서의 모습을 지키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서 그분의 통로와 도구가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증인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악한 죄인들이라고 고백해야합니다. 베드로가 모여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합니다. 베드로는 이때가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일찍이 그를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판결했음에도 당신들은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부인했습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운 분을 거절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달라고 요청해 생명의 근원 되시는 분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해 증인들입니다”(13~15절).


베드로가 무엇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당신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죄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나님이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단어가 바로 여러분, 당신들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었고, 여러분이 빌라도를 압박하여 풀어주지 못하게 하였고, 여러분이 오히려 살인자를 놓아 달라고 요청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없었던 사람일지라도,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증언해야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받아들이기 싫어합니다. 교도소에 있는 사람이 죄인이지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입니다.


예수님이 당시에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습니까. 네 종류의 사람들이 가담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자신의 탐욕 때문에 유대지도자에게 예수님을 넘겼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시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지키려는 비겁함 때문에 예수님을 로마 군병들에게 넘겼습니다. 로마 군병들의 포악함과 잔인함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가담한 사람들만 책임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고함치던 군중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모인 사람들만 예수님의 죽음에 책임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이 한국 땅에 오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문화는 다르고, 시대는 다르지만 한국 땅에 오셨더라도 예수님을 죽였을 것입니다. 내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에 의해서 억울하게 어쩔 수 없이 죽임 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7~18).
인간 차원에서 보면 가룟 유다에 의해 제사장들에게, 제사장들에 의해 빌라도에게, 빌라도에게서 군병들에게, 군병들에 의해서 십자가로 보내졌지만 하나님의 차원에서 보면 성부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예수 그리스도 스스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로 보냈다. 내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 찬송의 질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으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기에 우리 옛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의 모습으로 그곳에 있었다고 대답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참된 증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로 향하게 했다고 고백해야합니다.

 

멸망에서 축복으로 변화되는 회개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참된 증인의 고백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회개할 때 멸망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변화될 수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아오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19절).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돌아오십시오”라고 호소하는 것이 참된 증인의 고백입니다. 열방을 향하여 “회개하고 돌아오십시오”라고 말해야합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습니다”라고 증거해야 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돌아오십시오”라고 증언하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의 자리로 옮겨질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왜 회개를 요청합니까. 복된 길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회개하라고 하면 자기를 무시했다고 여기고, 자기가 마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멸망 받아 마땅한 위치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의 위치로 옮겨지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베드로는 회개의 필요성을 구약의 역사에서 찾았습니다. 아주 기가 막힌 인용입니다. 보십시오. 그는 모세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키면서 그것을 통해 회개의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모세는 말하기를 ‘주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예언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그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으라. 누구든지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사람은 백성 가운데서 멸망당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22~23절).


멸망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가운데 나와 같은 예언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모세를 통해 “그분의 말씀은 다 들어라. 만일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백성가운데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로 오셨지만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곧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믿지 않는 사람은 그 순간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 세상이 심판 받을 상황에 처해 있지만 그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구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곧 멸망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괘씸죄로 죽인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멸망에 처해 있는 이 세상에 구원의 길을 주셨지만, 구원의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원래 결정된 대로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함으로 얻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입니다.
“여러분은 예언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조상들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으로 인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3:2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핵심 내용은 후손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으로 인해”라고 할 때 그 후손을 갈라디아서 보면 복수가 아니라 단수를 썼습니다. 왜 복수가 아니라 단수를 썼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여러분, 회개를 통해 멸망의 자리에서 복의 자리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

 

성경의 순서에서 아브라함이 먼저 나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복을 약속하셨고, 모세를 통해서는 ‘듣지 않으면 멸망 당할 것이다’라는 엄격한 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본심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멸망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멸망시키시겠다는 경고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복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순서가 기가 막힙니다. 모세의 율법을 먼저 인용하고 다음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인용하면서 멸망에서 복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멸망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는 이 기간은 땅의 모든 족속이 멸망의 자리에서 복의 자리로 옮겨오도록 우리가 증언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을 끝내버려도 되는데 왜 오셨다가 올라가셨다가 다시 오실까요. 은혜의 때와 구원의 때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증인들인 우리들을 통해서 이 땅의 모든 족속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까지 증언의 기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기간을 맡기셨습니다. 교회에 역사가 맡겨졌습니다. 역사적 책임이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면 하나님이 역사를 회복시킬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증인들에게 기대하고 계십니다. 성령 받은 사도들이 증인의 사명을 다할 때 역사의 주인공이 우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무서운 죄가 있다는 것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복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할 것입니다. 그 증인으로써의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예수바보행전은 증인들의 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은 증인들의 고백입니다. 예수님만을 온전히 드러내기로 결정하고 순종하는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