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다 (사도행전 4:36~5:11)

새벽지기1 2017. 12. 20. 07:22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나아가면 사탄은 공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리에 순종한다면 사탄을 이길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많은 제목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빼놓을 수 없는 제목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따라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따라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신 것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범할 때마다 그 죄에 따라 처리하신다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따라 처리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화를 더디 내시고 사랑이 넘쳐나는 분이시다. 항상 꾸짖지는 않으시고 끝까지 진노를 품지도 않으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인으로 대하지 않으셨고 우리 죄악에 따라 갚지 않으셨다. 하늘이 땅 위에 높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도 크다. 동쪽이 서쪽에서 먼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악을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듯 여호와께서도 주를 경외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다.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가 흙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다”(시 103:8~14).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심판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래 참으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이 여기십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과 같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를 회복하고, 일어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배드릴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이 감사가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그 어떤 풍요로움보다 중요한 감사의 근원이 되어야합니다.

 

사람을 공격해 하나님께 대적하려는 사탄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하고, 무시하는 것으로 주님을 경외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큰 두려움과 큰 경외함을 부어주십니다. 우리가 긍휼과 사랑을 누리게 하려고 놀랄 만큼 큰일을 이루시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면 사도들을 통해 큰 능력과 기적과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기적과 표적에 놀라 예수님을 믿고, 사도들의 인도에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적과 표적만을 바라고, 기적이 놀라워서 예수님을 믿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탄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공격했습니다. 성령의 크신 역사가 있는 곳에는 사탄도 일하려고 달려듭니다.


여러분, 사탄이 감히 하나님을 어떻게 대항할 수 있습니까. 사탄이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을 통해서 어떻게 일할 수 있겠습니까. 사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을 통해서 일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함으로써 대적합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직접 대항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인간을 공격합니다. 자연만물은 하나님을 대적할 수도, 하나님의 역사를 해방할 수도 없습니다. 사탄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을 공격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까지 공격했습니다. 그런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를 공격하지 않겠습니까.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사탄이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일합니다. 사탄이 일할 때에는 보이지 않게 합니다. 성도들이 모이는 곳에 먼저 가서 준비합니다. 먼저 시험 당할 일을 준비합니다. 믿었던 관계를 통해서 방심하게 만들고, 은밀하게 공격합니다. 방심한 사이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서로 오해하게 하고, 서로 미워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지 않게 방해합니다. 사탄은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는 것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할 뿐만 아니라 교회를 공격하면 교회는 더욱 곤고해집니다. 그래서 사탄은 교회 안에 있는 리더십들을 통해서 교회를 허무는 일을 행합니다. 우리 모두가 사탄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리고 바나바

 

오늘 본문은 사탄이 사도행전적 교회의 일꾼을 무너뜨려서 교회를 공격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에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진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좋은 이야기로만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서 교훈을 줍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땅을 팔아서 헌금을 했는데 이 부부가 땅을 판 돈을 모두 내지 않고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전부를 내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를 책망했습니다. 아나니아가 베드로의 말을 듣고 쓰러져서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아나니아가 죽은 지 3시간 후에 그 아내 삽비라가 왔습니다. 아나니아가 죽은 지 모르고 베드로가 땅을 판값이 이것이 전부냐고 질문 했을 때 삽바라도 “네 이것뿐입니다”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즉시 삽바라도 남편처럼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죽었습니다. 아나니아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이고, 삽비라는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이름에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이 이야기가 충격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불신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째든 헌금을 한 사람 아닙니까. 안 한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위에 대한 형벌로 죽음을 내리셨다는 것이 지나쳐 보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충격적인 사건을 행하셨는지를 세밀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우선 이 사건이 발생한 배경을 먼저 알아야합니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한마음 한 뜻이 됐습니다.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고 가진 것을 모두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에 대해 증거 했고 풍성한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임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부족한 것이 있는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따금씩 땅이나 집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바쳤습니다. 그러면 누구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 주었기 때문입니다”(32~35절).
당시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한마음 한 뜻이 되어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따금씩’이라는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가끔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땅이나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이따금씩 그것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갖다 주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는 공산주의식 분배가 아니라 지극히 자발적입니다. 지극히 자원하는 마음으로 이따금씩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36절과 37절에 나오는 한 사람의 행동을 주목했습니다.
“키프로스 출신인 요셉이라는 레위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라고도 불렀는데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의 밭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36~37절).
바나바라는 사람은 키프로스 출신의 요셉이라는 레위사람 입니다. 바나바라는 뜻은 ‘위로의 사람’입니다. 바나바가 땅을 팔아 전부를 바친 사건이 그들 모두에게 큰 은혜와 도전이 되었습니다. 바나바의 행동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이 대조됩니다.
“아나니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재산을 팔았습니다. 그는 그 돈의 일부를 떼어 자기 것으로 숨겨 두고는 나머지를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와 바쳤습니다. 그의 아내도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행 5:1~2).
그 부부는 땅을 판 돈의 일부를 숨겨두고 사도들에게 갖다 주고서 전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떻게 네가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 값으로 받은 돈의 일부를 네 것으로 몰래 숨겨 놓았느냐? 그 땅은 팔기 전에도 네 소유였고 또 팔고 난 뒤에도 네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이런 일을 마음에 품었느냐? 너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다’”(행 5:3~4).
베드로가 책망한 이유는 전부를 내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부를 내지 않으면 미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내지 않아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일부를 내놓고 전부를 냈다고 거짓말 한 것입니다.

 

거룩하고 순결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아나니아가 책망을 듣는 순간 쓰러져 죽었습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이들을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대하지 않는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삽비라도 3시간 후에 동일한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간 길을 따라 간 것입니다. 그들은 왜 일부를 냈으면서 전부를 냈다고 거짓말을 했을까요. 왜 거짓말하기로 입을 맞췄을까요. 사탄에게 마음을 뺏꼈고, 사탄에게 마음을 내어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나바와 자신을 비교했습니다. 바나바가 전부를 드렸다고 성도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는 것을 보고 잘못된 비교의식과 경쟁의식이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분량대로 할 수 있는 만큼 한 것이 더 존경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헌신보다 돋보이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어떤 헌신이든지 거짓이 더해지면 성령을 속인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영적으로 탁월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선이요, 거짓이요, 성령을 속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너무 심하게 다룬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엄하게 다루셨을까요.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이제 막 시작된 성령공동체를 더욱 거룩하고 순결하게 보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큰 두려움이 임하게 하심으로 거짓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탄이 거룩한 공동체를 해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온 교회와 이 일에 대해 소문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행 5:11).
“더욱이 남녀 할 것 없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게 돼 그 수가 늘어났습니다”(행 5:14).
큰 두려움이 임함으로 교회가 거룩하고, 순결하고, 주께 나아오는 사람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도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전도방법은 우리가 말을 잘해서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크게 경외하는 두려움이 가득하고, 거룩하고, 순결한 공동체가 되면 하나님이 믿는 사람을 더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엄격하게 다룬 것입니다.


레위기 10장에 보면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가지고 분향했을 때 하나님이 징벌하셔서 그들을 죽이셨습니다. 또 ‘웃사’라는 사람이 ‘다윗’의 명을 받아 법궤를 옮길 때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옮겨야 되는 법궤를 힘들다고 수레에다 끌다가 수레가 흔들려서 법궤를 손으로 잡았을 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아간’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전리품을 숨겼을 때도 징벌하셨습니다. 거룩하고 순결함이 손상될 때 하나님은 엄하게 다루셨습니다. 사탄이 그 공동체를 넘어서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입니다. 옷이 깨끗하고 희면 흠이 더 크게 보이듯이 깨끗한 옷을 입고 있는 공동체를 하나님이 보호하시기 위해서 강하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 안에서 성장하기를 원해서

 

둘째,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교회가 진리 안에서 성장해가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곧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 후반부에 보면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진리 안에서 세워져 가는 공동체입니다.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깨끗하게 해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청결한 마음으로 서로 깊이 사랑하십시오”(벧전 1:22).
여러분 왜 서로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성도들이 서로 싸우고, 찢어지고, 갈등이 생깁니까. 진리 안에서 사랑하지 않아서입니다. 진리로 그들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짓을 미워하고, 진리 안에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거짓이 포함된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도들을 사랑하면 거짓이 점점 커져서 공동체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아주 작은 거짓이라도 버려야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또 다른 형태의 사랑과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오래 사는 것을 가장 큰 복이라고 여기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닙니다. 이 사건은 거짓에 사로잡혀서 이 세상에 오래 사는 것보다 더 이상 물들지 않도록 먼저 데려가신 은혜일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사탄의 종노릇 하지 않도록 먼저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또 다른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천벌을 받고 지옥에 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죽음은 곧 지옥이라는 등식을 버려야 합니다. 비록 그들의 육체적인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였지만 영원한 죽음은 피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것일지 모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지옥에 갔다고 단정하는 것보다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쩌면 그들을 데려가심으로 그들이 영원한 죽음에 처하지 않도록 하신 하나님의 방법일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 했던 초대교회조차 사탄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큰 두려움이 임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보호하셨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계속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교회를 무엇으로 공격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거짓을 통해서 공격합니다. 사탄이 공격할 명분을 주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크게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잘못된 비교의식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바라가 바나바와 자신을 비교할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신의 믿음의 분량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했으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부를 낸 바나바처럼 인정받고 존경 받고 싶어서 거짓으로 자신들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중하게 다루셨습니다. 그래서 큰 두려움이 임하게 하셨고, 초대교회를 더욱 성령 안에, 진리 안에 바로 서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잘못된 비교의식이 있을 때 사탄이 틈타고 공격합니다. 우리는 다른 어느 누구처럼 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을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나아가면 사탄은 우리를 공격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점점 자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더욱 정직하고, 진리에 더욱 순종한다면 교회는 사탄을 이길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