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이 사로잡은, 새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넉넉히 이깁니다.”
요즘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테러집단들을 보면 독 있는 믿음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으면서 자신들이 옳은 일을 행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인간의 죄악이 종교와 신앙의 탈을 쓰고 절대화 되는 모순과 위험입니다. 우리가 그 무서움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악한 신념을 종교와 신앙의 탈을 쓰고 절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도 수준은 아닐지라도 예수님 당시 유대 지도자들에게도 그러한 모습들이 발견됩니다. 그들도 무고한 사도들을 잡아가두고, 핍박하고, 채찍질하고, 위협했습니다. 그들과 이 시대를 위협하는 테러집단의 원리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도 기쁜 소식, 새 생명을 전하는 사도들을 핍박하면서 자신들의 이념과 죄악을 신앙과 종교의 이름으로 절대화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죄를 포장하고, 역사 왜곡하는 유대지도자들
“그러자 대제사장과 그와 한패인 사두개파의 당원들은 모두 시기하는 마음이 가득해서 들고 일어나 사도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행 5:17~18).
사도들이 사람들 가운데 기적과 표적을 행했습니다.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곳에 모여서 병자들을 고쳐주고, 그들을 치유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도들을 존경하고,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의 영향력이 예루살렘에 가득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을 관할하고 있던 지도자들의 마음속에 시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빌라도가 간파했습니다. 그들이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 빌라도의 눈에도 보였습니다. 여러분, 지도자의 시기심이 얼마나 무서운 일을 만들어내는지 교회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교회 분열과 다툼을 보면 겉으로는 교리의 싸움이고, 명분이 있어 보이는 것 같지만 그 깊숙한 곳에 들어가보면 주도적인 지도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시기심과 질투가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아니더라도 탐욕이 다툼과 분열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의 시기심이 사도들을 핍박하는 일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얼마나 악합니까. 자신 안에 있는 죄악도 신앙의 이름으로 합리화할 수 있습니다. 죄가 신앙의 탈을 쓰면 무서운 괴물이 탄생합니다. 요즘 테러집단들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잘못된 교리와 잘못된 이념을 믿고 자신들의 죄악을 발산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온 예루살렘을 너희 가르침으로 가득 채우고 이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는구나’”(28절).
여기서 이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치는 핵심내용은 “너희들이 십자가에 달아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이고, 그분은 부활하셔서 지금 역사가운데 살아계시다. 우리가 바로 그 일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메시지를 들은 유대 지도자들이 뜨끔 했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의한 재판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겼습니다. 아무 죄가 없는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해 신성모독죄라는 이름으로 빌라도를 압박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불법재판의 책임이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진실입니다. 사도들은 역사의 진실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진실 앞에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역사를 왜곡했습니다. 마음에 시기심이 가득하고, 거짓을 진실로, 진실을 거짓으로 덮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을 넉넉히 이기는 사도들
누가가 지적하는 또 다른 그들의 문제는 잘못된 이념을 절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을 잡아 가둔 사람들은 주로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성전을 관리하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다윗시대 사독의 후예입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언제부터 부활을 믿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부활은 없다고 믿었습니다. 여러분, 무신론자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보다 믿음이 더 강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사상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누구도 믿음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무신론자들은 강한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어떤 이념이나 철학을 믿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전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들의 믿음 속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부활은 역사적으로 일어난 실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역사적 사실이라도 듣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믿는 바대로 주장했습니다. 우기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념 속에 갇힌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힘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죄악을 신앙으로 포장하고,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고, 자신들의 잘못된 이념을 절대화하는 사람들이 힘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사도들을 핍박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들은 그 힘든 상황 속에서 도리어 힘 있게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모습에는 활기가 있었고, 그들의 메시지에는 능력이 있었고,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샘솟았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마치 로마서 8장 35~37절을 읽는 것 같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배고픔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겠습니까? 기록되기를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해 죽임을 당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인해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롬 8:35~37).
사도바울의 고백이 사도들의 모습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을 넉넉히 이기고 있습니다. 죄를 신앙으로 포장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자신들의 이념을 절대화하고, 세상의 권력으로 억누르는 그들을 사도들은 넉넉히 이기고 있습니다. 그들과 똑같이 세속적인 권력으로 맞서 싸워 이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힘없고, 연약하고, 감옥에 갇히고, 채찍으로 때리면 맞아야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엄청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왜 그들은 넉넉히 이길 수 있었습니까. 그들 안에는 새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이 그들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이 감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구해냈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사도들에게 성전으로 가서 새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천사의 말대로 감옥에서 기적적인 풀려남을 경험하고 성전으로 갔습니다. 집으로 도망간 것이 아닙니다. 성전으로 가서 담대하게 새 생명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성전은 당시 종교의 상징입니다. 유대교는 성전중심의 종교였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지어졌지만 성전자체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건물자체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전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 가장 쓸모없는 종교의 상징물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건물자체를 우상화하고, 건물자체를 신성시하는 것이 성전으로 비유되었습니다. 성전은 옛 종교의 울타리일 뿐입니다. 그 성전에서 사도들이 새 생명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그들을 붙잡아다가 심판대 앞에 세웠습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입법, 사법, 행정 삼권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내려지는 선고는 그냥 집행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의 클라이맥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대답했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당신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그 예수를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 용서를 주시려고 예수를 그분 오른편에 높이셔서 왕과 구세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의 증인이고 하나님께서 그분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 또한 그 일들의 증인이십니다’”(행 5:29~~32).
사도들은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러자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분노해서 그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가말리엘이라는 공회원이 타일러서 채찍으로 때리고 풀어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채찍에 맞고 풀려난 후에도 날마다 성전과 집집마다 다니며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증거하고 전파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이름을 위해 모욕당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고는 기뻐하며 공의회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집집마다 다니면서 예수께서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선포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41~42절).
어떤 상황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고, 어떤 핍박도 그들을 중지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욕과 핍박을 즐거워하며 넉넉히 이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던 팔복의 마지막 복을 누리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복되도다! 나 때문에 사람들의 모욕과 핍박과 터무니없는 온갖 비난을 받는 너희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들의 상이 크다. 너희들보다 먼저 살았던 예언자들도 그런 핍박을 당했다”(마 5:11~12).
이 복을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이 땅에서는 모욕과 핍박을 받지만 하늘에서 상이 큰 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어떻게 사도들은 이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까. 그들 안에 새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핍박과 모욕을 받는 자체가 그들에게 새 생명이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새 생명의 능력이 그들을 넉넉히 이기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속한 육신의 생명으로는 이러한 상황과 환경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만이 이 상황과 핍박을 이기는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공회원들이 사도들을 죽이려고 할 때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만류했습니다. 그는 공회원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들을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 둡시다. 만일 그들의 행동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곧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것이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면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되니 그냥 내버려 둡시다.” 그리고 예를 들었습니다.
“과거에도 드다라는 사람이 나와서 자신을 위대한 사람인 것처럼 400여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가다가 결국 사람들은 흩어져 버리고 다 소멸되지 않았느냐? 또 유다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처음에는 추종하는 것 같다가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다 소멸되어 버리지 않았느냐?”
그는 두 가지 예를 들면서 사도들을 내버려 두자고 했습니다. 무고하게 피를 흘리지 말자고 중재를 한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가말리엘은 매우 멋진 사람입니다.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사람입니다. 다른 공회원들과 달랐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영적인 분별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난 일들은 두고 볼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새로운 생명의 역사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나타나고, 솔로몬의 행각에서 여러 기적과 표적들이 나타나고, 천사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돕는 일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을 두고 볼 일입니까. 영적인 검증방법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지혜에 기초한 검증방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진정한 새 생명의 역사인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새 생명의 역사, 성령님의 역사
첫째,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는지를 질문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으면 그것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일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인간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과학과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성육신 사건이 어떻게 과학으로 설명이 되겠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유일하게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새 생명의 역사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도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준비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기다린 것뿐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성령님이 임하신 것입니다.
둘째, 새 생명의 역사는 그 역사에서 사용되는 수단이 무엇인지를 관찰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나온 일들은 언제나 조직과 기술과 돈을 의지합니다. 사람들이 만드는 운동은 조직부터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다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2).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부흥은 인간이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은 하나님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조직을 만들고, 돈이 있으면 부흥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설교하면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회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의 움직임은 그들이 결심하고, 결의하고, 무엇인가 해보자고 한 운동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 안에 있는 운동력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의 운동력입니다.
셋째, 그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사도들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는지, 심지어 고난도 즐거워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새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넉넉히 이깁니다. 간신히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깁니다. 성령님이 사로잡은 영혼들은 열매를 맺고, 복음이 나를 지배합니다. 내가 성령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나를 사로잡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쁨으로 십자가를 감당하신 것처럼 고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새 생명의 역사로 모이는 모임이라면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일들을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어야 합니다. 내 안에 일어나는 일들이 설명되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조직과 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계신 성령님의 역사를 의지하며, 사도행전적인 새 생명의 역사를 기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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