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 예수님을 바로 보여주었습니다.
믿음이 충만하고, 지혜 충만하고, 은혜와 능력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 역사에서 최초로 순교한 스데반 집사님의 기록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전한다는 이유로 그 어떤 시련이나 고난, 핍박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에는 허영과 거품이 많이 끼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당에 들어올 때 생명을 내걸고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그토록 간절하고, 진실하게 믿지 않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최초의 순교기록을 통해서 목숨 걸고, 예수님을 전하는 일이 우리의 생명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스데반이라는 이름이 처음 성경에 나온 것은 사도행전 6장입니다. 교회에서 구제하는 일로 갈등이 일어났을 때 사도들을 대신해 그 일을 전담할 일곱 명의 사람을 뽑았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이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스테파누스’로 ‘왕관’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부모님이 그가 이 세상에서 왕관을 쓰는 인생을 살라는 소망에서 지은 것 같습니다. 헬라문화에서 자란 그가 사도들을 통해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왕관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쓰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 사도들보다 나중에 예수님을 믿었지만 사도들보다 먼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믿음, 지혜, 은혜가 충만한 스데반
스데반의 이름에 항상 붙어 다니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충만’입니다. 사도행전 6장 3절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6장 5절에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6장 8절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사람, 7장 55절에는 그가 성령으로 충만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충만하고, 지혜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충만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오해합니다. 성령 충만한 것을 비이성적이 되고, 미친 사람이 되고, 비현실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스데반의 성령 충만에 대해 ‘지혜와 성령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지혜는 지성적인 영역에서의 분별력입니다. 성령 충만함은 우리의 지적인 영역에서 상상할 수 없는 통찰력과 분별력을 가리킵니다. 비이성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하늘의 분별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은 의지적 충만입니다. 믿음은 나의 능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 것입니다. 때로는 신비한 것입니다.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영역에서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능력이 이뤄지는 신비한 사건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충만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이 온전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자신을 불법으로 심문하고, 거짓누명을 씌워서 돌로 치려는 사람들 앞에서도 얼굴이 천사 같았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자신의 모습이 성경에 기록될 것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멋있는 표정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흥분하고, 분노하고, 이를 갈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이 그의 감정을 주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품 안에 하나님의 역사가 충만한 것입니다. 지적을 받고, 공격을 받고, 불의하게 거짓고소를 당한 스데반 집사님의 얼굴은 천사 같았습니다. 그것은 안으로부터 밖으로 흘러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성령의 아홉 가지를 열거한 이후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충만하게 나타나면 그것을 처벌하는 법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환경이나 상황, 감정을 뛰어넘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지혜가 충만했고, 믿음이 충만했고,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진실을 증거
여러분, 성령 충만하게 되면 어떤 모습이 나타나게 될까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이기에 성령 충만은 곧 예수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성품과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산헤드린 공회에 붙잡혀 가서 거짓증인으로 고소당하고, 거짓죄목으로 판단 받고,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스데반 집사님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첫째, 산헤드린 공회에서 거짓증거로 고소 받아 심문 받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게 역사적 진실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담대하게 고백했습니다. 이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 받고, 헤롯과 대제사장들에게 심문 받을 때 얼마나 당당하셨습니까. 당시 입법, 사법, 행정권을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도 예수님은 당당하게 진실을 말씀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네가 과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바로 그다”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변호하거나 고통을 받지 않으려고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보호하는 일에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과 진리를 증거하는 일에는 사자같이 담대하셨습니다. 스데반이 고소당한 죄목은 예수님이 고소당한 죄목과 동일합니다. ‘신성모독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성전을 바라보면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신성모독죄라고 한 것입니다. 스데반도 예수님과 동일한 제목으로 고소당했습니다. 스데반은 백성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이 인간의 손으로 만든 집에 거하시는 것이 아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를 읽어보면 하나님이 친히 다윗에게 “내가 언제 나의 집을 지으라고 했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윗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시켜주신 시편 66편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보이는 건물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성전건축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것입니다. 성전이라는 단어를 붙이면 개념이 바뀌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의 성전관에 머무르는 잘못을 할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성전을 얼마나 신성시 했습니까. 스데반은 성전을 우상시하는 사두개인들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율법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고, 인간이 만든 규례를 지키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스데반은 성전을 폄하하고, 율법을 무시했다는 죄목으로 고소당했습니다. 돈으로 거짓증인을 사서 스데반을 고소했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에게 주어진 변호의 시간에 구약의 역사를 관통해 흐르면서 지식적인 정보가 아니라 핵심을 찌르는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구약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려면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를 읽으면 됩니다. 구약의 역사를 관통하는 흐름이 무엇입니까. 구약의 성전이든, 율법이든 그것은 장차오실 메시아,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전과 율법의 실체가 오셨으니 더 이상 그것 자체를 우상시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스데반은 그 메시지를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은 진실 충만입니다. 진실 앞에 담대한 것입니다. 어떠한 위험이 있다할지라도 사실과 진실을 있는 그대로 증거하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담력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진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 사실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령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가 꽉 막힌 사람들이여, 당신들도 여러분의 조상처럼 계속해서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조상이 핍박하지 않은 예언자가 있었습니까? 그들은 심지어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는 당신들도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해 준 율법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51~53절).
목이 곧고, 마음과 귀가 꽉 막힌 사람들을 가리켜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영적 상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듣고, 진실을 들었을 때 분노합니다. 진실을 들었을 때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은 기뻐하고, 진리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해집니다. 그러나 성령을 거역한 사람들은 진리를 거부하고, 진실을 외면하고, 듣지 않으려하고, 도리어 분노합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라 스데반을 보며 이를 갈았습니다”(54절).
그들은 성령을 거역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둘째, 이를 갈고 분노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고, 그들과 싸우지 않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 보좌우편에 서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스데반은 이를 갈며 분노하는 이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감정으로 싸우면 휘말립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들과 다른 방법으로 대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할수록 분노하지 않습니다.
스데반은 분노하는 이들과 똑같이 인간적으로 분노하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고, 하나님 보좌우편에 서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 끌려가시며 자신을 조롱하고, 분노하는 이들에게 인간적인 분노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동일한 인간이신데 어떻게 그것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까. 십자가 너머에 있는 기쁨과 영광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때가 이르렀다는 것은 십자가의 때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때는 영광의 때입니다. 죽음이 수치스러워 보였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바라보지 않으셨습니다. 그 수치 너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셨습니다. 부활을 통해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바라보셨습니다. 성령 충만하게 되면 분노하고, 거짓과 불의에 사로잡혀 이를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 모든 상황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 보좌우편에 서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땅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늘도 보입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하늘이 열리고, 하늘보좌 우편에 심판자로, 때로는 중보자로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
셋째, 이를 갈고, 분노하며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들이 돌로 칠 때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스데반은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여,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을 끝낸 후 그는 잠들었습니다”(59~60절).
두 가지 기도 내용이 예수님과 동일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기도한 것처럼 스데반도 “예수님 나의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향하여 “주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저들을 용서 하소서”라고 기도했는데 스데반도 자신을 돌로 치며 죽이는 자들을 향하여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한 것이기에 예수님과 동일한 성품과 기도가 흘러나옵니다.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듣고, 십자가에 못 박힌 한 강도가 변화되었습니다. 강도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용서하는 기도가 열매 맺은 것입니다. 스데반의 중보기도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암시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낸 후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목격자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58절).
사울이라는 청년이 나옵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에서 신성모독과 성전모독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었는데 그 법적인 절차로 증인들이 옷을 벗어서 놓아야 증거가 되었습니다. 옷을 벗어 놓은 사람은 무엇인가 주도적인 세력이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 앞에서 행동대원 같은 역할을 했다고 추적할 수가 있습니다. 사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 받은 바울입니다. 사울은 히브리식 발음이고, 바울은 헬라식 발음입니다. 같은 사람입니다. 왜 사울의 이름이 여기에 등장했을까요. 사도바울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자신을 용서하는 스데반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가 회심한 이후 그의 삶속에 늘 기억되는 사건이 바로 스데반의 순교였을 것입니다. 누가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 사건을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이 사건을 바울을 통해서 정확하게 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의 이름이 여기에 등장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거기 있었다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데반의 순교와 원수를 용서하는 중보기도의 열매가 사도바울의 회심사건으로 연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용서해달라고 기도한 사람 중에 바울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역사가 스데반을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 역사를 시작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순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모두 순교했습니다. 초대교회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라는 사람은 AD 107년 로마제국에서 순교 당했습니다. 그는 순교의 자리로 나아가면서 일곱 개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한결 같았습니다. 자신이 살아나도록 기도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죽을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단지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해주시오. 나는 고난당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할 것이며 언젠가 자유스럽게 그와 함께 다시 부활할 것이요. 나는 그리스도의 순수한 떡으로 바쳐질 수 있도록 짐승들의 이빨에 찢겨져야 할 하나님의 밀알이라오”
이그나티우스의 고백입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바로 보여주었습니다.
초대교회에 스데반 집사님과 이그나티우가 있었다면 한국교회에는 주기철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 순교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본받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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