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대적자를 대리자로 (사도행전 9: 1~16)

새벽지기1 2018. 1. 11. 07:22

 

주님이 우리를 대리자로, 증거자로, 전도자로 부르셨습니다.
선교라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복음 전파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게 쓰임 받는 인물이 있다면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그는 아시아와 유럽대륙을 관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행전과 서신들이 신약성경에 3분의 2 분량으로 기록되어 이 시대에도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 안티교회, 안티예수의 원조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대적자였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박해자요, 대적자였습니다. 그의 이름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스데반이 순교하는 사도행전 6장입니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지상에서 완전히 멸절되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스데반의 죽음 이후 성도들이 예루살렘에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엔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가 있다는 자체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을 찾아가 그리스도인들이 다메섹에 가장 많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잡아 올 테니 그곳의 회당장들에게 공문을 써달라고 했습니다. 권한을 위임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그가 대제사장이나 산헤드린 공회원의 명령에 따라 수행하는 수행원 정도가 아니라 이 모든 일을 기획하고, 주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을 택한 그릇으로 부르시다

 

“한편 사울은 여전히 주의 제자들을 위협하며 그들을 죽일 기세로 대제사장에게 나아가 다메섹의 여러 회당들에 써 보낼 공문을 요청했습니다. 거기서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잡아다가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였습니다”(1~2절).
굳이 다메섹까지 쫓아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성경을 깊이 연구한 어느 청교도학자는 이것은 틀림없이 불안감을 감추기 위한 과잉행동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자를 용서하고, 기도하고 죽어가는 스데반의 모습이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처벌받는 자가 처벌하는 자를 용서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죽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스데반의 모습이 사울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을 것이고, 자존심을 상하게 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옳은 일을 하고 있는데 스데반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고 그 마음을 덮으려고 더 열정으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옳다고 증명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저도 한때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반대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해야 한다고 확신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예루살렘에서 했던 일이 바로 그런 일입니다. 대제사장들의 권한을 받아 많은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었고 그들이 죽임을 당할 때 찬성했습니다. 여러 회당들을 다니며 그들을 여러 번 처벌했으며 강제로 그들에게 모독하는 말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에게 격분한 나머지 다른 나라 도시까지도 찾아가 핍박했습니다”(행 26:9~11절).
그는 대제사장의 권한을 이임 받아 많은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고, 죽임 당할 때 찬성하고, 여러 회당을 다니며 처벌하고, 모독하고, 다른 나라 도시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고, 처벌하고, 처형했습니다.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주는 충격은 사울을 주님이 초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전도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를 변화시키고,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죽는 현장에서 웃음을 보이고, 그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성도들이 가장 먼저 하는 기도가 무엇이었을까요. “사울을 빨리 처벌하여 주십시오”아니었을까요. 그 정도로 사울은 매우 위협적인 인물이요, 교회의 가장 강력한 방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를 만나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택한 그릇으로 부르셨습니다. 

 

가장 큰 대적자였기 때문에 

 

주님이 사울의 헬라어 실력이 필요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를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셨다면 베드로에게 헬라어 방언을 주셔서라도 사역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를 복음전도자로 부르신 유일한 이유는 그가 복음에 가장 큰 대적자였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이유는 부수적입니다. 그의 언어, 문화, 율법지식 때문에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능력을 갖춰야  주님이 사용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분명해야 나에게 있는 조건을 쓰시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으로부터 분명한 부르심을 받고, 주님의 나라에 대한 온전한 확신이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없는 능력은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만하게 되는 근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 자신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고, 소리 지르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자원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주님의 능력과 부르심을 따라 쓰임 받아야합니다. 우리가 선교에 헌신하고, 주의 부르심을 따라 온전히 순종하기 때문에 더해주시는 것입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이것을 뒤집어서 생각합니다. 우리교회는 아직 연약하기 때문에 선교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규모가 되고, 헌금이 모이면 선교해야지라고 생각한다면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선교는 우리가 어떤 조건을 갖추고, 능력이 생기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몇 명의 성도가 모이건, 헌금이 얼마가 걷히건, 우리의 능력이 어떠하건, 주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순종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더해주시고, 채워주십니다. 큰 교회들이 빠지는 교만과 착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들이 많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교만입니다. 주님보다 앞서가고,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을 하고,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가지일 뿐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그냥 붙어있는 것입니다. 승리의 비결은 오직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완고하고, 편협하고, 자신의 이념에 사로잡힌 무서운 사울을 주님께서 만나주셨습니다.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행하지 않는 것을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적자요, 원수였던 사울을 위해 기도하셨고,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를 품고 대적자에서 대리자로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 사울를 갑작스럽게 찾아오셨습니다.
“사울이 길을 떠나 다메섹 가까이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비춰 그를 둘러쌌습니다. 사울이 땅에 쓰러졌습니다. 그때 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이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지금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3~6절).
부활하신 주님이 그를 갑작스럽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계획입니다. 주님은 그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사울이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그를 피하고, 외면했지만 주님은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가고 있을 때 강렬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햇빛과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빛이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의 빛입니다. 빛이신 그 자체의 빛입니다. 그 빛이 비췄을 때 사울은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편협과 고집과 이념에 포로가 되어서 도무지 깨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엎드려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에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의 비전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그의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그의 확신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그의 자존심이 완전히 부서지는 순간입니다.
사울이 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그러자 음성이 들렸습니다.“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또 하나의 충격은 예수님이 사울을 너무나 따뜻하고 인격적으로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울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셨습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두 번 부른다는 것은 친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문하셨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또 한가지 사실은 예수님이 교회와 자신을 동일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했다고 하셨습니다. 후에 사도 바울이 예수님이 머리고, 우리가 그분의 지체라는 사상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은 곧 예수님에 대한 핍박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지체들과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주님도 함께 고난을 받습니다. 단순히 안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과 고난 속에 함께 계십니다.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말씀은 사울을 강제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게 하는 질문입니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 있는지 위치를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영적인 현주소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인격적입니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붙잡으러 갔다 그리스도께 붙잡히다 


주님은 핍박자요, 대적자요. 복음이 전파되는 데 가장 강력한 장애물인 사울을 사랑으로 부르시고, 인격적으로 찾아오셔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렇게 부활하신 주님이 사울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주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똑바로 서거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너를 내 일꾼으로 삼아 네가 본 것과 앞으로 내가 네게 보여 줄 것을 사람들에게 증거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내가 이 백성과 이방사람들에게서 너를 구원해 이방사람들에게로 보낼 것이다’”(행 26:15~17절).
자신을 복음 증거의 도구로 부르시겠다는 이 말씀이 얼마나 당황스럽고, 놀랍고, 감당하기 어려웠을까요. 주님이 왜 그의 눈을 잠시 동안 보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아마 눈을 뜨고 있었으면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핍박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보면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눈을 멀게 하게 한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울이 잠시 앞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그가 생각에 집중하고, 주님과 대화를 통해 인생을 해석하고, 자신의 모순을 해석하고,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육신의 질병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다리가 아프면 다리가 아픈 이유가 있고, 머리가 아프면 아픈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유 없는 고통을 주시지 않습니다. 사울의 눈을 멀게 하심으로 그가 깊이 묵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를 불러 사울에게 보냈습니다.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서 곧은길이라고 부르는 거리로 가거라. 그리고 그곳에 있는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라. 지금 그가 기도하고 있다. 그는 환상 가운데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자기에게 손을 얹어 다시 보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11~12절).
아나니아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당장 가겠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나니아는 신실한 사람이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아니니아가 주님께 안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선교를 한다고 하면서도 아나니아와 같은 시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우리가 아니라고 선을 긋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한이 없습니다. 사울을 불러서 복음의 그릇으로 쓰셨습니다. 그 위대하신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품어야합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으러 갔다가 그리스도께 붙잡힌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자였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육신의 시력을 잃었지만 영적인 시력을 얻었습니다. 그가 변화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주님이 그를 대적자에서 대리자로 부르셨습니다.


사울을 보면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한 적 없고, 교회를 방해한 적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우리는 무관심과 불순종으로 대적자였습니다. 아나니아와 같은 모습으로 대적자였습니다. 사울과 같은 대적자인 우리를 주님이 대리자로, 증거자로, 전도자로 부르셨습니다. 온누리교회를 부르셨습니다. 이 시대 선교를 위하여 주님이 택하여 세우신 온누리교회가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순종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