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4:8~18)

새벽지기1 2018. 1. 20. 12:55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분만이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가장 중요한 기본원칙을 지키고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성도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마치 축구선수들에게 “골키퍼 외에는 공을 손으로 잡을 수 없습니다”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이든지 가장 중요한 원칙을 분명하게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기본원칙이 무너지기 때문에 생깁니다. 십계명의 첫 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때로 나 자신이 신처럼 군림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첫 계명을 “나 스스로도 신이 되려 하지마라”는 말씀으로도 해석해야 합니다.
여러분, 타락이 언제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이 금지하신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먹게 되면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라는 사탄의 꾐에 넘어가면서 생겼습니다. 타락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타락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시도들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 마음속에도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타락의 잔재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지만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필요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외로워서도 아닙니다. 노동력이 부족해서 창조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자유로운 결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그렇게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조금도 부족한 부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어떠한 결핍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 섬김, 찬양도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완전하신 분이기에 우리가 그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가장 중요한 기본원칙을 날마다 지키며 살아가야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가장 첫 번째 단추입니다.
어떤 성취나 성공을 통해서 만족감을 경험하게 되면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착각할 위험이 있습니다. 정반대로 깊은 실패와 절망을 경험하면 왜 낙심합니까. 스스로 하나님처럼 성취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낙심과 절망, 교만과 잘못된 성취감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마음 때문에 생깁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진리를 기억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일어나 걸어라!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는 곳에서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장애인을 고치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바울이 말씀을 귀 기울여 듣던 한 장애인을 주목했습니다. 바울이 그를 주목한 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들으면서 생기는 영적인 교감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의 역사는 언제나 말씀을 깊이 사모하고, 귀 기울이고, 새기려는 마음과 함께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귀 기울여 듣고자 하는지가 성령님을 얼마나 사로잡고 있는지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일어나 걸어라! 벌떡 일어나 걸어라!”
만약 사도 바울이 그의 마음속에 치유 받을만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으면 담대하게 선언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치유 받는 기적에는 두 종류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침을 받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없지만 고침의 통로가 되는 사람의 믿음으로 치유를 받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침을 받는 사람의 믿음을 통해서 기적이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어느 쪽이든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말씀 없는 기적의 위험성

 

오늘 본문은 기적 이후 사건을 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고침을 받은 사람은 불가능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사람입니다.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장애를 갖고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겠습니까. 그 사람이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놀라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기적의 통로가 된 바울과 바나바를 그 지역의 수호신이라고 믿고 있던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왔다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말로 소리 질렀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그들이 바나바는 ‘제우스’라 부르고 바울은 주로 말을 하기 때문에 ‘헤르메스’라고 불렀습니다. 도시 밖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은 황소들과 화환들을 성문 앞으로 가져왔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그들에게 제물을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11~13절).
이 지역 사람들은 아래와 같은 전설을 믿고 있었습니다.


‘제우스신과 헤르메스신이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내려왔는데 영접해 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때 한 늙은 농부 부부가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제우스신과 헤르메스신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 대가로 그들이 살던 초라한 오두막을 금지붕과 대리석 신전으로 바꿔주고, 그들을 신전의 사제들로 임명했습니다. 그들이 죽은 후에는 참나무와 보리수나무로 변했습니다. 신들을 냉대하고 홀대했던 사람들을 모두 징벌을 받아 죽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사람들은 날 때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장애인이 고침을 받는 기적을 보면서 믿고 있던 전설을 떠올렸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내려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제우스신의 제사장을 부르고 황소, 화환, 제물을 가져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처음에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몰랐습니다. 그 지역 방언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들 앞에서 경배하고, 황소와 예물들을 가져오는 것을 보고 큰 잘못이 생겼다는 것을 깨닫고 조치를 취했습니다.


여러분, 말씀이 없는 기적의 위험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적은 분명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주어지지 않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기적을 자신들의 세계관이나 전설, 신화로 해석하는 행동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기적을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내려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켰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 기적을 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떡과 생선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경배했던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배부름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고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변화보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어떤 이익을 취할지를 더 깊이 생각했습니다. 말씀이 없는 기적은 이러한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믿음의 가장 중요한 기본원칙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주를 의지해 담대히 말씀을 전했고, 주께서는 그들에게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능력을 베풀어 주셔서 주의 은혜의 말씀을 확증해 주셨습니다”(행 14:3).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목적은 은혜의 말씀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표적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바울과 바나바가 취한 태도가 너무나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우리에게 모범이 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은 이 말을 듣고 옷을 찢으며 사람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외쳤습니다”(14절).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여기고 숭배하려는 순간 옷을 찢었습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져야 할 영광이 자신들에게 돌아온 것을 회개하고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이 타이밍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만약 사람들이 잘못된 신화를 믿고, 자신들을 신처럼 숭배하려는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순간이 됩니다. 매우 짧은 순간에 내려져야 할 결정과 태도입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영광이 자신들에게 돌려질 때 옷을 찢으며 사람들에게 뛰어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고, 멸시하고, 대적하고, 핍박할 때 옷을 찢습니다. 우리를 높여주고, 칭찬하고, 때로는 숭배하려고 할 때 옷매무새를 가다듬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모습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자기가 이룬 것도 아닌데도 자기가 이룬 것처럼 교만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마치 내가 한 것처럼 만들어버리면 안 됩니다. 한 영혼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내가 믿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어떻게 우리가 믿게 합니까.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누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합니까.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이 믿게 된 것도, 선교의 열매를 얻게 된 것도, 아름다운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도 모두 하나님께 돌려져야 할 영광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태도는 베드로와 요한에게서도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에 있던 이들을 고쳤습니다. 그 사람도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할 때 그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성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왜 이 일을 이상하게 생각합니까? 또 우리 자신의 능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합니까?’”(행 3:12).


우리의 능력과 경건으로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주목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다’는 기본원칙을 잘 아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주목 받는 것을 즐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이뤄지지 않은 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이룬 것처럼 포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일말이라도 가로채지 않습니다.
여러분, 바울과 베드로의 태도가 우리 믿음의 가장 중요한 기본원칙입니다. 바울은 말로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행동을 말렸을 뿐만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도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우리를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십시오”

 

“사람들이여, 왜 이런 행동을 합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제멋대로 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존재를 증언하시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하늘에서 비를 내려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하시고 넉넉한 양식을 공급해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15~17절).
바울과 바나바를 숭배하려는 사람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루스드라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와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의 내용이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바울의 창조적 융통성을 보여줍니다. 대상에 맞춰서 복음을 전하는 변화입니다. 율법을 아는 자에게는 율법을, 율법을 모르는 자에게는 율법 없이, 구약을 아는 사람에게는 구약의 내용으로, 구약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계시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는 출애굽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약속을 이루셨는지를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루스드라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창조와 자연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했습니다.


여러분, 자연을 주목해 보십시오. 자연이 어떻게 생성되었겠습니까.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줍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보여줍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줍니다. 착한 사람에게만 햇빛과 단비를 주시지 않고, 악인에게도 햇빛과 단비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자연 속에 있습니다. 절망과 미신, 우상과 신화에 빠져 있는 이방인들에게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를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복음제시의 방법이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발전하는 세 단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연으로부터 시작하고, 둘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이르고, 셋째, 하나님의 본체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을 이룬다.
바울과 바나바가 계속 메시지를 전했다면 이렇게 전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보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동안 여러분들은 자연을 보았지만 이제는 자연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그분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병든 자가 고침을 받는 것은 우리가 전하는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증해줍니다. 이 땅에서 고침을 받더라도 영원한 생명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대사일 뿐입니다.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자의 태도와 마음이 중요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이 복음을 가로막아서는 안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언제 옷을 찢어야 할지를 가르쳐줬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냉대 받고, 인정받지 못할 때가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고, 칭찬 받고,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라고 외치며 옷을 찢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야합니다. 영광을 온전히 하나님께 올려드리십시오. 그러한 태도를 통해 복음이 땅 끝까지 이르러 증거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분만이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가장 중요한 기본원칙을 우리의 삶속에서 지키고 순종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지도 말고, 교만하지도 말고, 하나님이 주신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