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이 됩니다.
인간의 통념, 계획, 경험, 비전을 뛰어넘어 새 길을 여십니다.
인생의 모든 문이 닫혔다고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내딛는 발걸음마다 막히는 상황이 오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러나 신비한 것은 눈물이 펑펑 쏟아져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 우리의 눈이 밝아집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앞이 막힌 것 같지만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3장 7절에 우리 주님을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문을 닫으시면 우리는 절대로 그 문을 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신 문을 우리가 닫을 수도 없습니다. 믿음의 삶은 하나님이 여신 문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문을 닫으시고, 여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그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문을 여는 것으로만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 삶의 문을 닫아서 하나님이 열어 놓은 문으로 걸어가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문을 닫는 것은 또 다른 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닫힌 문 뒤에 있는 열린 문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의견대립
사도바울 일행이 첫 전도여행에서 복음을 전했던 지역을 다시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여행과 다른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었던 성도들이 새로 전도된 영혼들을 격려하고, 믿음 위에 잘 세우기를 바랐습니다. 그 일에 바나바도 흔쾌히 동의했고,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선교여행에 동행했던 마가 요한이 ‘버가’라는 곳에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마가 요한을 함께 데려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바울과 바나바의 의견이 대립했습니다. 바나바는 기회를 주자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바나바가 마가의 친척이다 보니 요한 편에 선 것 같습니다. 바울은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마가가 전도여행에 참여하기에는 아직 영성과 훈련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토록 견고하게 하나가 되었던 바울과 바나바가 이별하면서 두 번째 전도여행이 높은 장벽에 부딪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분열되어 서로 다른 여행을 가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장벽처럼 느껴 질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요한과 함께 ‘키프로스 섬’으로 내려가고, 바울은 새로운 동역자 실라와 함께 예전에 사역했던 ‘루스드라’ 지역으로 가서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새로운 팀을 형성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만 보면 분열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바울과 바나바의 의견이 달라서 새로운 팀이 형성되었습니다. 바울, 실라, 디모데라는 새로운 전도팀이 구성된 것은 하나님이 막힌 문 속에서 새로운 문을 여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막으셨다”
1차 전도여행과 차이점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 전도여행에서는 그들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문을 여셨습니다. 놀라운 표적과 기사와 역사가 나타납니다. 성령님의 함께하심이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 전도여행도 처음에는 순조로운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이 루스드라 지역을 방문했습니다. 그들이 그 지역을 다시 방문한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지역을 다시 방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가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지역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두 번째 전도여행도 첫 번째 전도여행처럼 순조로운 것처럼 보였는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그들이 새롭게 들어가려 하는 지역의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아시아 지방에 말씀 전하는 것을 막으셨기 때문에 바울과 그 일행은 부르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거쳐 무시아 지방 가까이 이르러 비두니아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가게 됐습니다”(6~8절).
‘비두니아’ 지역은 바울이 가고자 했던 지역입니다. 바울의 목적지는 북쪽 흑해연안에 있는 비두니아였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막으셨습니다. 무엇으로 막으셨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환경적인 어려움보다는 성령님과 바울이 나누는 내적인 교통가운데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명확합니다. 여러분, “성령님이 막으셨다”,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으셨다”는 것이 어떤 메시지입니까. 사도 바울은 여정마다 성령님과 교통하면서, 대화하면서, 허락을 받으면서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그냥 움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계획을 예수님과 상의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늘 보좌에 계신 예수님과 우리가 교통할 수 있습니까.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교통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도 되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판단을 받았습니다. 마치 부모님과 상의하는 어린 아이처럼 “제가 여기 가도 될까요?”라고 질문하면 성령님이 “거기는 가면 안 된다. 거기는 가도 된다”고 대답해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살아계신 성령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여행할 지역을 결정했습니다. 비두니아 지역이 북쪽 흑해연안에 있기 때문에 갈 수 있는 길이 여러 개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길이 폐쇄되었다든지, 로마 군인들이 못 가게 했다든지 등의 환경적인 어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사도 바울이 성령님과 나누는 내적인 교통가운데 허락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어떻게 하면 사도 바울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세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나지 않습니다. 십계명에 어긋나는 인도하심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의 감정이나 내적인 음성보다 먼저 분명히 나타난 말씀에 의지적으로, 인격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정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심과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지 못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이 들어오면 주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앞선 것이 순종입니다. 순종이 앞서면 감정, 생각, 태도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내 감정이 안 좋으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야”, “내가 좋으니까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위험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여정은 복음을 땅 끝까지 증거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그 걸음걸음이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는 성령님 안에 있었고, 동행했고, 순종하고,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성령님이 된다, 안 된다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원칙은 언제나 도시중심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대상 지역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막으셨습니다.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길을 갈 때 사탄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사탄의 방해와 사탄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이 성령님과 동행할 때 생깁니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8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에게 가고자 했고 특히 나 바울은 여러 번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습니다.”
사탄이 막은 것과 성령님이 막은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탄이 막는 것은 뚫고 나가야 하고, 성령님이 막는 것은 순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매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내적인 마음의 상태를 분별하고, 사탄의 활동인지를 분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두니아 지역으로 가고자 했지만 성령님이 막으시고, 드로아라는 항구도시로 인도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계획에는 전혀 없었던 지역이었습니다. 드루아는 항구도시이기 때문에 바다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길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새로운 길을 내시는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바다와 마주하고 있을 때 새로운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출애굽 시킬 때 “바닷가에 진을 치라”하신 것이 연상됩니다. 그들이 빨리 애굽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은 광야 쪽으로 해서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바닷가에 진을 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면 앞은 바다, 뒤는 애굽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면초가,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바닷가에 진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완전히 막다른 길, 막힌 문 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바닷가에 진을 치라고 하셨을 때 이스라엑 백성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불평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바다에 길을 내셨습니다. 막힌 문이 열린 문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앞에 놓인 막힌 문이 열린 문이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새로운 길을 열 뿐만 아니라 우리 앞에 놓인 막힌 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길이 없을 때 길을 내시는 분입니다.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만드시는 분입니다.
확신하고, 즉시
사도 바울은 바다 건너 마케도니아 대륙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드로아라는 항구에 있을 때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한밤중에 바울은 마케도니아 사람이 서서 ‘마케도니아로 와서 우리를 도와주시오’라고 간청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확신하고 즉시 마케도니아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15절).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확신하고’와 ‘즉시’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확신하고, 즉시 움직였습니다. 여러분, 지체된 순종은 불순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확신하고 지체 없이 움직여야합니다.
마케도니아는 오늘날 유럽대륙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럽선교의 문이 열리는 사건입니다. 바울은 소아시아를 집중적으로 전도하려고 계획했지만 하나님은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11절에 보면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대륙을 건너가는데 이틀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드로아에서 바다로 나와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곧장 갔다가 이튿날 네압볼리로 갔습니다”(11절).
“그러나 우리는 무교절 후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떠나 5일이 지나서야 드로아에서 다른 일행과 합류하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7일을 지냈습니다”(행 20:6).
빌립보에서 드로아까지 가는데 배를 타고 5일이 걸렸습니다. 갈 때는 이틀이 걸렸는데 올 때는 5일이 걸렸습니다. 같은 거리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즉시 순종했을 때 순풍이 불었습니다. 순풍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강한 바람으로 도와주셔서 빨리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 자체가 순종하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함께하심의 증거입니다. 역풍이 불지 않고 순풍이 불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바다를 건너 빌립보로 갔습니다. 빌립보는 로마제국에서 주목하고 있는 작은 식민지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빌립보가 로마제국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알렉산더가 자신의 아버지 빌립왕이 세운 이 빌립보에서부터 세계정복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빌립보를 유럽 복음화의 시작점으로 삼으셨습니다.
말도 안 되는 길에서 새로운 길을
그곳에는 마중 나올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가보지 않은 지역, 환영받지도 못하는 지역으로 갔습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사람들이 초청해서, 환영해서 가는 지역도 있지만 아무도 부르지 않고, 환영받지 못해도 가는 것이 선교입니다. 놀라운 것은 성령님의 강권하심으로 선교현장에 가보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 가자마자 당황했습니다. 그곳에 회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1차 선교여행에서 어디를 가나 회당을 가장 먼저 찾았습니다. 회당이 존재한다는 것은 유대인 남자가 10명 이상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당의 설립조건입니다. 그러나 빌립보에는 유대인 남성이 10명 이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당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율법과 구약역사를 통하여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회중이 없습니다. 새로운 전략으로 전도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은 그곳에 회당이 없자 기도할 곳을 찾았습니다.
“안식일에 우리는 혹 기도할 곳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성문 밖 강가로 나갔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앉아서 거기 모여 있던 여인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말씀을 듣던 사람들 가운데 루디아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두아디라 도시에서 온 자주색 옷감 장수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에 귀 기울이게 하셨습니다. 루디아는 그 집안 식구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저를 참된 신자로 여기신다면 제 집에 오셔서 머물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면서 우리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13~15절).
기도할 곳을 찾기 위해서 성문 밖 강가로 갔다가 그곳에 모여 있는 여인들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들 중에 ‘루디아’라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옷을 팔고 무역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이 루디아의 집에서 머물면서 빌립보 교회가 탄생하게 됐습니다.
여러분, 이 사건에 사도 바울의 계획이 있습니까. 원래 가려던 지역도 아니었습니다. 회당도 없습니다. 전도하려고 찾아다닌 것도 아니고, 기도하려고 간 곳에서 말씀을 듣는 영혼을 만났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별하면서 문이 막힌 것처럼 보였습니다. 원하던 지역으로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자신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회당도 없었습니다. 회당에서 남성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기도할 곳을 찾아간 성문 밖 강가에서 만난 여인들을 통해서 빌립보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문을 막으실 때는 더 좋은 문을 여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빌립보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사랑이 구구절절 느껴집니다. “가장 모범적인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기쁨입니다. 감사입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빌립보 교회가 이런 과정을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루디아라는 여성 리더십을 통해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인간의 통념과 계획과 경험과 비전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이 됩니다. 말도 안 되는 길 (No way)에서 새로운 길(New way) 을 여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닫힌 문 뒤에 열린 문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길이 막히고, 원하는 계획이 이뤄지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 오면 성령님께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 가운데 들려오는 음성을 확인하십시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새로운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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