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교양있는 신앙 (사도행전 17:10~13)

새벽지기1 2018. 1. 27. 08:09

 

진리이고, 사실이기 때문에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뢰아 사람들이 보여준 교양있는 모습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을 ‘교양있는 신앙’이라고 표현했는데 사도행전 17장 11절 말씀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교양있는 사람들이어서”라는 표현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성경에서 어느 도시 사람들을 다른 도시 사람들과 비교해서 평가한 것이 드문 일인데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두 도시 사람들이 뚜렷한 대조를 보였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절에서 9절을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힘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큰 구원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그들이 감옥에 갇힌 것이 복음의 걸림돌이 아니라 복음의 디딤돌이었습니다. 그들은 갇혔지만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고, 빌립보 간수와 그 주변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이 빌립보로부터 아테네를 향하는 방향으로 160km 떨어진 ‘데살로니가’라는  도시에 이르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당시 마케도니아 대륙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중요한 전도전략은 도시전도를 통한 영향력 파급입니다. 한 도시에 복음이 전해지면 강력한 영향력이 있기 때문에 그는 도시에서 도시로 옮겨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늘 하던 대로 유대인의 회당을 가장 먼저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적지 않은 이방인들 중에 믿는 이들이 나타났고, 그 가운데에는 귀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유대인들 사이에서 시기심이 일어났습니다. 그 시기심이 어떤 시기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그 도시에서 영향력이 있던 유대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감소된 것을 시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귀부인들이 믿는 것을 믿지 않는 남편들이 시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불편한 감정과 시기심으로 인해서 비상식적인 행동을 시작합니다. 그 도시의 불량배들을 통해 소동을 일으키고, 그 소동의 주범이 바울과 실라라고 뒤집어 씌웠습니다. 네로황제가 로마에 큰 화제가 일어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으킨 것이라고 누명을 씌워서 엄청난 박해를 한 것과 아주 동일합니다. 바울과 실라 일행과 전혀 상관없는 소동을 일으키고, 그 소동의 주범이 그들이라고 거짓 고소를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데살로니가를 떠나다

 

당시 로마제국이 다스리고 있던 여러 지역에서 정치적인 메시야 사상에 빠져 있었던 사람들이 소요를 일으키곤 했습니다. 이에 글라우디오 황제는 시민들에게 그들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절대 협조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들은 전 세계를 혼란케 만드는 전염병 같은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황제의 명령을 잘 알았던 유대인들이 그것을 이용해서 바울과 실라 일행이 황제가 명령한 바로 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거짓 고소를 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여정에서 일어나는 모함과 동일한 패턴입니다. 복음을 증거할 때 나타나는 현상들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갈 때 받으셨던 거짓누명, 고소, 고난의 여정과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사람들의 의도도 시기심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지도자들이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죽게 하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겁하게 묵인했고, 그들의 거짓에 동참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줬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빌립보에서는 감옥에 갇혔지만 이번에는 잡히지 않았습니다. ‘야손’이라는 먼저 믿기 시작한 사람의 집에 숨었습니다. 관원들이 그들을 잡으러 왔지만 야손이라는 사람이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야손과 형제들이 잡혀갔지만 나중에 보석금을 받고 풀려났습니다. 바울과 실라 일행은 몰래 데살로니가를 황급히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까지가 17장 1절에서 9절까지 일어난 상황입니다.

 

교양있는 베뢰아 사람들

 

데살로니가를 떠나서 만난 도시가 ‘베뢰아’입니다. 올림푸스 산맥 중간에 있는 도시입니다. 베뢰아에 도착했을 때에도 사도 바울은 유대인 회당을 찾아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의 태도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어서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바울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11절).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기에 그들의 모습을 교양 있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첫째, 그들은 열린 마음으로 편견 없이 들려오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했는데 이것은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더 큰 은혜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간절하게 말씀을 받아들인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처음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생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소식이었습니다. 이미 말씀을 잘 아는 사람들이 간절하게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마음을 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실을 듣게 되면 마음을 닫습니다. 그것이 어떤 사실인지, 어떤 주장인지 들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편견과 아집과 자기 생각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성도들은 달랐습니다.
‘교양 있다’는 헬라어의 표현은 ‘자신의 편견을 내려놓고 스스로 생각의 문을 열어서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품격이 여기서 나타납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주장이 들려올 때 그것을 편견 없이, 열린 마음으로 귀 기울일 줄 알았습니다. 자기 생각 없이 휩쓸리는 차원이 아닙니다. 어떤 주장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열고, 들어볼 줄 아는 자세입니다. 이것이 교양입니다. ㅤ믿지 않는 사람들, 다른 세계관속에 있었던 사람들이 이런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시기심으로 바울과 실라가 전하는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들어보지도 않고, 왜곡된 감정으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얼마나 교양 없는 사람들입니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을 줄 모르는 사람들, 자기 생각에 갇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편견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대로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간절한 마음이라는 것은 열린 마음을 의미합니다. 자발적으로 생각을 열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역사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해주시고, 진실을 알려주실 때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역사 속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과 역사밖에 초월해 계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역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눈으로

 

역사의 진짜 의미를 알고, 역사의식을 가지려면 역사 밖에서 보아야 합니다. 시간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시간의 의미를 알 수 있겠습니까. 영원하신 분으로부터 우리의 인생을 보고, 역사를 보고, 인생을 봐야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간 밖에서 인간을 봐야 인간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역사 밖에서 역사를 보아야 역사가 보입니다. 성경의 신비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역사 밖에 계신 하나님이 역사를 뚫고 들어오셔서 행하신 일들을 통해서 역사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역사의 흐름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게 됩니다.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역사 안에 갇힌 인생이 아닙니다. 인생과 역사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의 생각을 열고, 말씀을 받아들여야만 인생이 무엇이고, 역사가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 지를 깨닫게 됩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교양 있는 사람들이어서’라고 표현한 것은 그들이 들어보지 못한 말씀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교양 있는 신앙입니다.

 

말씀이 진리인지 검증

 

둘째, 그들은 자신들이 듣게 된 말씀이 과연 진리인지를 검증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어서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바울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11절).
여러분, 말씀이 사실인지 알아보려는 것이 교양 있는 신앙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무턱대고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무턱대고 배격하지도 않았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 일행이 전한 말씀이 과연 진리의 말씀인지를 스스로 살펴보며 검증했습니다. 그래서 교양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수없는 시간 동안 세밀한 검증대위에 섰습니다. 성경이 믿을 수 없는 인간이 만든 책이라고 주장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볼테르’라는 사람은 자기가 사는 세기가 지나가기 전에 성경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살던 집이 성경을 인쇄하는 인쇄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드라마입니다. 성경이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견고하게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질문하는 것을 차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믿어지지 않아서 던지는 질문은 하나님이 모두 받아주십니다. 무턱대고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교양 있는 믿음은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바울은 늘 하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3주 동안 안식일마다 성경에 대해 사람들과 토론했습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은 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했던 것을 설명하고 증명하며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십니다’라고 전했습니다”(2~3절).
말씀이 진리인지를 토론하고, 설명하고,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선포했습니다. 믿을 수 있는 말씀인지를 생각했습니다. 말씀이 사실인지를 검증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성경에 관한 토론과 증명을 금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도 설교를 들으면서 베뢰아 성도들처럼 과연 이 설교가 사실인지, 진리를 전하고 있는지를 검증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사실인지를 검증하는 것은 의심이 아닙니다. 잘못된 태도도 아닙니다. 믿음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내용 없는 열심히는 굉장히 위험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교양있는 신앙입니다. 그것이 사실인지를 알기 위해서 살펴보는 것이 교양 있는 신앙입니다. 어떻게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말씀, 예언의 말씀이 신약시대를 통해, 우리 시대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말씀은 사실입니다. 진리인지는 어떻게 압니까. 말씀을 우리 삶속에서 실천해 봤을 때 어떤 열매가 나타나는지를 보면 압니다. 말씀대로 실천했을 때 어떤 열매가 맺어진다면 그것은 사실입니다. 세상에도 많은 주장과 의견과 사상이 있습니다. 그 사상대로 행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약속된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진리가 아닙니다.

 

말씀이 사실이라면, 진리라면


셋째, 말씀이 진리라면 교회 안에서만 진리가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진리여야 합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위기는 진리를 이분화 시킨 것입니다. 이분법적 사고를 진리에 적용시킨 것입니다. 이 현상을 수십 년 전 ‘프란시스 쉐퍼’라는 기독교 철학자가 예언했습니다.

 

가치(Value): 개인적인 선택 기독교/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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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Fact):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는 진리

 

가운데 선을 그었습니다. 상층부에 있는 것은 개인적인 가치, 개인적인 선택의 영역이고,  하층부에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부인할 수 없고 받아들여야하는 사실로 구분했습니다. 과학과 이성을 통해 검증한 것입니다. 모두가 받아들여야 할 구속력이 있는 진리를 가운데 선을 그으므로 상층부와 하층부가 구분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진리일 수 있습니까. 이것이 진리라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하는데 두 부분으로 나눴습니다. 성경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할 진리로 여긴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개인의 가치로 여깁니다. 예를 들어서 창조라는 것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만 자신이 창조되었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냐에  관심이 없습니다. 부활을 하나의 가치로 받아들인다면 그렇게 믿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전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존중하는 것 같지만 무시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하나의 비유, 은유,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사실이고, 창조가 사실이라면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교회울타리 안에서만 적용되어야 할 사실이고, 다른 영역에서는 적용되지 않아도 되는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이라면, 진리라면 모든 사람들에게 구속력이 있어야합니다. 이 시대는 그것을 구별해 버렸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창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만 가치 있게 여기는 개인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할 구속력 있는 진리입니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분리해버려서 이러한 현상이 생긴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는 이런 상태를 가리켜 ‘복음을 우리에 갇힌 사자로 만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복음을 문화적 포로상태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말씀이 사실이라면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에서도 사실이어야 합니다. 모든 영역에서 사실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갇힌 종교적 가치가 아닙니다. 모든 역사와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진리입니다. 총체적 진리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믿는 진리를 들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고, 가치이지 들어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와중에서도  BBC 방송에서 기독교의 기본진리에 대해서 CS루이스가 방송할 때 아무도 그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진리가 무엇인지 들어보려는 교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이 과연 진리인지를 역사를 통해, 말씀을 통해 증명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리라면 모든 시대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할 구속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양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가치 있는 책이라고 여기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치가 있습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교회가 많고, 성경이 좋은 책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말씀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진리이고, 사실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순서가 바뀌지 않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진리요, 사실이라면 모든 삶과 역사에 적용되어야 할 총체적 진리라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베뢰아 사람들이 보여줬던 교양 있는 모습입니다. 말씀이 진리라면, 사실이라면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모든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모두가 교양있는 신앙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