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분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변론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믿지 않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헬라 문명의 본산지 아테네에 이르러서 복음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아테네는 그리스 헬라의 중심지입니다. 철학, 문화, 예술의 중심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고향이고, 주 활동 무대이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아테네를 고향으로 여기며 활동하였습니다. 로마제국 시대에도 아테네는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영광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아테네 항구에 도착했을 때 높이 솟아있는 많은 신전들을 보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당시 아테네에는 약 2만5천~3만 개의 공동 신상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시 전체가 신전이요, 신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전들의 건축학적인 가치와 예술미는 상당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문화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헬라 문명의 화려한 신전들을 보면서 감동한 것이 아니라 격분했습니다.
“아테네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바울은 그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 매우 격분했습니다”(행 17:16).
당시 세계 최고의 문화, 철학, 예술의 극치를 보면서 사도 바울은 격분했습니다. 여러분, 문명이 발달할수록 우상도 발달합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이 더 합리적이 되어서 미신이 사라져야 하는데 미신이 더 많아졌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은 사도행전 설교를 하면서 “최고의 지성과 최고의 미신은 통하는 데가 있다. 지성이 많을수록 우상을 더 유식하게 포장하고 표현할 뿐이다. 무식한 사람은 무식한 대로 표현하고 유식한 사람은 유식한대로 표현할 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입니다. 이 시대에도 그 시대와 동일하게 우상과 미신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 도시의 웅장함과 화려함이 탄식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실제적 의결기구 ‘아레오바고’
바울은 아테네에서 거룩한 분노가 생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인간적인 분노로 표출하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지혜로 바꿔서 아테네에 있는 사람들을 전도했습니다. 회당에 들어가 전도하고, 오늘날 ‘ 아고라’ 라고 불리는 광장과 시장에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당시 아테네 사람들은 일은 별로 하지 않고, 모여서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도 모두 철학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헬라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와 문화와 예술과 철학을 꿰 뚫어 볼 수 있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철학의 맹점과 약점, 문제점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아테네를 지배하고 있었던 두 철학파를 상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두 철학파는 에피쿠로스철학파와 스토아 철학파입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주전 341년부터 270년까지 살았던 에피쿠로스라는 사람의 제자들입니다. 오늘날 유물론자들과 비슷한 주장을 했습니다. ‘ 모든 것은 원자 혹은 물질의 분자에서 왔다. 그래서 물질로 이루어진 이생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으로 끝이다. 다시 원자로 돌아가는 것이고, 사후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도 우연한 원자의 조합이다. 우연히 원자가 조합돼서 이뤄진 것 이다. 신도 이런 원자의 조합일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라든지 인간을 통치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물질의 조합 일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목적은 스트레스 없이 사는 게 최고다’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죽음 너머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영적인 삶을 인정하지 않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물질로 보고 해석했습니다.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18절).
말쟁이라는 단어는 경멸하는 의미입니다. 새가 다니면서 씨를 쪼아 먹듯이 그런 일을 하는 저급하고, 어리석은 사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는 사상이고, 철학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비하했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요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무식해 보이고, 유치해보이고, 이해하기 힘든 사상일지라도 새로운 사상일 경우에는 들어보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외부로부터 어떤 사상이 들어오면 반드시 검증하는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 광장으로 데려가 말했습니다. ‘ 당신이 소개하고 있는 이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우리가 알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우리 귀에 생소한 것들을 전하니 우리가 그 뜻을 좀 알고 싶습니다’ ”(19~20절).
아레오바고는 로마통치하에서 자치정부를 운영하는 실제적인 의결기구였습니다. 철학과 교육, 도덕, 특히 외래에서 오는 사상 종교에 관한 권한을 가졌습니다. 오늘날 그리스 대법원의 명칭이 아레오바고입니다. 아레오바고는 새로운 사상을 들어보는 멋진 모습이지만 한편으로는 사형을 언도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아레오바고를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억울한 사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국가의 신을 믿지 않고 다른 신을 믿는다는 이름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처형한 도시가 바로 아테네입니다. 일단 들어보기는 합니다. 바울은 그 기회를 적극 활용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기가 막힌 두 가지 접촉점
사도 바울이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한 설교는 선교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교철학, 우상, 미신, 세상 철학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가 나타나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실패한 설교라고 주장합니다. 결신율이 저조하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결신율이 저조하면 실패한 설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너무나 멋진 설교였습니다. 대상과 상황에 적합한 맞춤설교였습니다. 구약을 모르는 사람들, 세상 철학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철학과 사상을 이용해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철학과 대립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익숙한 철학을 이용해서 복음을 전한 지혜로운 설교였습니다. 접촉점을 너무나 잘 찾았습니다. 그들이 귀를 기울여 듣도록 만드는 접촉점이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아레오바고 광장 가운데 서서 말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이여! 내가 보니 여러분은 여러모로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내가 두루 다니면서 여러분이 무엇을 섬기는지 자세히 살펴보다가 ‘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제단도 보게 됐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예배해 온 그 신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합니다”(22~23절).
두 가지 접촉점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보니 여러분은 참 종교적인 사람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당신들은 우상에 찌든 사람들입니다”라고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표현하면 그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듣겠습니까. 그래서 참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신사적인 표현을 한 것입니다. 예의를 갖춘 것입니다.
두 번째 접촉점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붙여진 제단이 있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이 수 만개의 신상과 제단을 세웠지만 바울의 눈에 띈 것이 있었습니다. ‘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써 붙여 놓은 제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있는 대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신이 많다는 것은 아무 신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안해서 그냥 세운 것입니다. 불안하니까 알지도 못하는 신을 만든 것입니다. ‘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붙어있는 제단이 접촉점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써놓은 신에 대해서 설명해 주겠다고 하니 귀가 열리지 않겠습니까. 기가 막힌 접촉점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할 때 접촉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생활이 접촉점이 되어야 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갑자기 복음을 전해서 믿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접촉점을 찾아서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 설명하겠다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첫째,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는 신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 신은 온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며 사람이 손으로 지은 신전들 안에 살지 않으십니다”(24절).
신은 인간과 상관없는 존재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혁명적인 말이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전에 거하지 않는다고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신은 인간이 만든 공간에 거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신전을 만들고, 수많은 제단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건물에 갇혀 있지 않다고 선포했습니다.
둘째,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은 인간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는 신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는 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뭔가 부족해서 인간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다른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25절).
세상의 헛된 종교와 철학과 우리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지, 우리로부터 무엇인가를 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헌신조차도 하나님을 도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도와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절대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받는 자로 만들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셋째,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은 인간이 찾아 만날 수 있고, 인간 안에 거하시며, 인간과 함께 임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으로부터 모든 민족을 만들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셨고 각 나라의 연대를 미리 정하시고 그들의 국경도 정해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과 그리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어떤 사람이 말했듯이 ‘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26~28절).
당시 사람들은 신은 만날 수 없고, 인간에게 관심도 없고,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과 신은 별개라고 생각했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인간과 신은 완전히 별개이고, 스토아학파는 인간과 신이 붙어있다고 했습니다. 인간과 만물이 모두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혼동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면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인간과 만나시고, 대화하시고, 인간 가운데 임재하시고, 인간을 지탱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당신들이 모르는 신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고, 모든 것을 주시고, 인간과 교제하고, 만나고,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라고 선포했는데 이것은 당시 유명한 시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 에피 데미데스’ 라는 시인과 ‘ 아라투스’ 라는 시인의 작품을 인용한 것입니다. 에피 데미데스가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살며 존재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당신은 제우스신을 의미합니다. 또 아라투스가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라고 했는데 그분도 제우스신을 뜻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인용해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제우스신의 힘으로 살고, 제우스신의 자녀라고 한 말은 틀렸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살게 하시고, 존재하게 하시고, 만나주신다는 것을 전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익숙한 표현들이었기 때문에 귀가 열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고, 세상의 철학과 문화에 사로잡혀 있는 이 시대 사람들과 접촉할 때도 이런 기술이 필요합니다. 굉장히 지혜로운 변증방법입니다.
“알지 못했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대로 내버려 두셨지만 이제는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30절).
이제 하나님에 대해 들었으니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물질 속에 살아가는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준 것입니다. 죽음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고,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웃었고, 어떤 사람은 더 듣고 싶어 했고, 어떤 사람은 믿었습니다. 믿는 자는 소수였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우상과 세상의 철학과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설교를 통해 소수지만 믿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 시대에도 아테네와 같은 많은 신전과 우상들이 존재합니다. 보이는 신전은 없지만 더 교묘한 신전, 더 교묘한 우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테네를 보며 거룩한 분노를 품었던 사도 바울처럼 이 시대 우상들을 보면서 거룩한 분노가 생겨야 합니다. 거룩한 분노와 동시에 하나님의 살 아계심을 변론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믿지 않는 수많은 영혼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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