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세속도시에 머무르다 (사도행전 18:1~11)

새벽지기1 2018. 2. 2. 07:20


“두렵고, 떨리고, 연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약할 때 강함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누구나 한 번쯤 탈진을 경험합니다. 영어로‘ Burn out’ 이라고 합니다. 주어진 책임과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치 말라버린 우물처럼 내적인 힘이 모두 사라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탈진하면 자신이 즐겨하던 일조차 싫어질 뿐만 아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미래를 희망적으로 기대하지 못합니다. 관계의 어려움도 겪고, 분노가 자주 일어나고, 공격적이 되는등 모든 삶에 어려움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현상이 탈진에서 오는 것인지 모르고 다른 데서 원인을 찾으려다 더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주부뿐만 아니라 샐러리맨, CEO, 선교사 등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마케도니아 대륙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사도 바울에게도 탈진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이 탈진했다는 단어가 나오지 않지만 고린도전서에 바울이 자신의 상태를 고백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갔을 때 나는 연약하고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있었습니다”(고전2:3).


사도 바울이 예전과 다르게 침체되고, 탈진하고, 연약함 가운데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을 뻔했을 때에도 오뚝이처럼 일어날 정도로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돌에 맞는 것을 마땅한 고난으로 여기고, 도리어 다른 제자들과 형제들을 위로하던 사역자였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본인은 고난과 극심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고린도에 들어가면서 연약하고, 두렵고, 떨림 가운데 있습니다. 무엇이 사도 바울을 연약하고, 두려움 가운데에 처하게 했을까요. 어쩌면 사도 바울 스스로도 왜 그렇게 힘든지를 알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탈진한 사도 바울

 

세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영적인 원인입니다. 고린도는 상업도시였습니다. 아테네가 철학의 도시라면 고린도는 돈이 중심이 된 상업도시입니다. 주전 40년 율리우스 시저에 의해서 도시가 재건이 되면서 유럽과 아시아를 넘나드는 전형적인 상업무역도시로 자리 잡았습니다. 통행세만으로도 엄청난 수입이 가능한 도시였습니다. 고린도는 돈을 사랑하는 도시였고, 성적인 타락이 극심했던 퇴폐적이고, 세속적인 도시였습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아프로디테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아프로디테는 성의 신입니다. 그 신전에 천명이 넘는 성 노예들이 매춘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 음행을 하다’ 는 말과 ‘ 고린도스럽다’ 는 말을 같은 의미로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퇴폐적이고,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아테네에서 변론하고, 지성적인 대화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던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는 엄청난 돈과 성과 우상과 영적대결을 해야했습니다. 영적 전쟁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아마 보이지 않은 영적 세력들에게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둘째, 정신적인 원인입니다. 아테네에서 변론과 철학적인 대화를 통해서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에게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율법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헬라적 지식도 있었습니다. 그가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복음을 전할 때 헬라철학자들의 시를 인용한 것을 보면 미리 설교를 준비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즉흥적인 설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헬라철학의 문학을 인용할 정도로 해박한 지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테네는 사도 바울의 장점을 잘 드러날 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대보다 결신률이 낮았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했던 지역 중에서 결신자가 가장 적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새로운 사상 중 하나라고만 여겼지 믿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의 장점을 살려서 복음을 잘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곳에서 큰 좌절감을 맛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도 바울은 아테네로 들어온 이후 실라와 디모데를 다른 곳으로 보냈습니다. 실라는 빌립보로 보냈고, 디모데는 데살로니가로 보냈습니다. 지금까지 복음을 전한 지역으로 가서 그곳 사람들의 믿음을 확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데살로니가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여러 번 막았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대신 보냈습니다. 실라는 빌립보로 보내서 예수님의 사람들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필요보다 성도들의 필요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처사였습니다. 사도 바울 혼자 오랫동안 여행하면서 몸과 마음이 지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셋째, 경제적 이유입니다. 고린도에서 장막 만드는 일을 다시 시작한 것을 보면 바울의 경제력이 고갈된 것 같습니다. 바울의 선교원칙은 자비량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으면서 믿게 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자비량 선교를 했습니다. 또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돈 벌러 다니는 떠돌이 철학자라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자비량으로 선교를 했습니다. 그는 장막을 만들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경제력이 고갈되자 장막 만드는 일과 사역을 병행해야 했습니다. 힘든 상황이 한꺼번에 겹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역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탈진 상태에 있는 바울을 하나님이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공급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첫 번째 선물은 로마에서 온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아굴라라는 유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본도에서 출생한 사람인데 유대 사람들은 모두 로마를 떠나라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 때문에 얼마 전 자기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일하며 지냈습니다. 바울도 그들과 마찬가지로천막 만드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행18:2~3).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고린도에 오기 전부터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바울을 통해 믿게 된 사람이 아닙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로마에서부터 안정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 업체에 들어가서 일하다 만났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로마에서 장막 만드는 일을 하던 사람들인데 당시 글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들의 소요가 끊이지 않자 그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고린도에 왔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이 만난 바울은 너무나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도 믿음이 있었지만 지성적으로, 영적으로,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바울이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이름 순서가 바뀝니다. 갈수록 브리스길라가 먼저 나옵니다. 브리스길라는 여성인데, 그녀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은 아굴라보다 더 많은 헌신과 기여를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나중에 이름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영향력 순서에 따라 이름의 순서가 바뀌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16년 동안 긴밀한 동역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와의 재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생명을 구해 주었습니다. 나뿐 아니라 이방 사람의 모든 교회들도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롬 16:3~4).

사도 바울이 귀한 동역자를 만난 곳이 고린도입니다. 지치고, 힘든 상태에 있던 바울에게 그들과의 만남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을까요. 이국땅에서 한국 사람만 만나도 반갑습니다. 이 만남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닙니다. 지치고, 힘들어 탈진한 상태에서 동역자를 만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만남으로 인해서 바울이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잘 감당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모든 여정에서 하나님의 크신 도움과 위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새롭게 하시는 두 번째 선물은 동역자 실라와 디모데와의 재회입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에서 오자 바울은 말씀 전하는 데만 전념해 예수가 그리스도심을 유대 사람들에게 증언했습니다”(5절).

바울이 아테네로 들어갈 때 실라는 빌립보로, 디모데는 데살로니가로 보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들이 고린도로 돌아왔습니다. 너무나 기쁜 소식도 함께 왔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믿는 자의 본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로부터 들은 기쁜 소식을 기록한 것이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고린도에서 디모데를 통해 들은 기쁜 소식의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에서도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곳 사람들도 믿음 가운데 잘 있을 뿐만 아니라 은혜가 배가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헌금을 보내왔습니다. 디모데가 온 이후부터 바울이 장막 만드는 일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 여러분의 믿음으로 인해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주 안에서 굳게 서 있다니 우리가 이제 살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으로 인해 기뻐하는 모든 기쁨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께 여러분에 대해 어떤 감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살전3:7~9).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이제 살 것 같았습니다. 위로를 얻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보내준 헌금을 ‘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구약 레위기에 근거하면 향기는 자발적 헌신에 붙여지는 단어입니다. 레위기에 다섯 가지 제사(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가 있는데 자발적으로 드려지는 제사를 향기로운 냄새다, 향기로운 제사라고 표현했습니다. 의무적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향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법 때문에, 제도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사람들 눈치 때문에, 원하지 않는데 부득이하게 행하는 것은 향기가 없습니다.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어도,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헌신으로 하는 일에는 향기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비량선교를 원칙으로 하는데 왜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헌금을 받았을까요. 향기로운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를 자신이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이 로마에게 갈 때까지 향기로운 헌금으로 후원을 했습니다. 그 모습에 바울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로부터 큰 격려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빌립보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는 동역자와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향기로운 헌신을 통해서 격려를 받았습니다. 온누리교회 성도들의 선교사님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도 향기롭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탈진해있던 바울을 격려하고 위로했듯이 온누리교회 성도들도 선교사님을 격려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우리가 약할 때 강함이 되시는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세 번째 선물은 환상 가운데 직접 나타나신 것입니다.

“어느 날 밤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두려워 마라. 잠잠하지 말고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행 18:9~10).

바울에게 어려움과 위기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이 환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로마로 호송되는 도중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에도 나타나셨습니다. 그가 아시아 복음화에 집중하려고 할 때에는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아시아에 머무르지 말고 유럽대륙으로 건너오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라는 계시였습니다. 고린도에서 나타난 환상은 움직이라는 것이 계시가 아니라 머무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고린도에 더 머무르고 싶었을까요. 빨리 지나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돈과 타락이 가득한 도시에 더 이상 머무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데살로니가에 머무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고린도에 머무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역자,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가 있고 싶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가고 싶었는데 못 갔고, 고린도교회를 떠나고 싶었는데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두려워 마라. 두려움은 사탄이 주는 것이다. 네가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내가 너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잠잠하지마라”(행 18:9~10).

바울이 낙심하고, 탈진해 있었기 때문에 잠잠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무도 너를 해치 못할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믿는 백성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브리스길라, 아굴라, 실라, 디모데를 통해서 믿게 되는 영혼이 많을 것이라는 예언적 말씀입니다. 그 말씀대로 이뤄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곳에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11절).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 온 집안이 주를 믿게 됐고, 바울의 말을 들은 다른 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8절).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풍성한 전도의 열매가 맺어졌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기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 기대도 없고, 소망도 없고,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라는 믿음도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가 임하고, 바울이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풍성한 열매가 맺혔습니다. 고린도교회 대다수의 믿는 사람들이 노예계층이었습니다. 회당장과 그의 가족들이 믿게 되었다고 했는데 당시 고린도에 70만 명이 있었다면 60만 명이 노예였습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의 부르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육신적으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능력 있는 사람도 많지 않고 가문 좋은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고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 1: 26~27).

사도 바울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성령의 강력한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연약하고,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있었지만 1년 6개월 동안의 사역을 통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두렵고, 떨리고, 연약함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나타납니다. 우리가 약할 때 우리의 강함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약함 가운데 두는 것은 더 큰 능력이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타락한 세속도시 고린도 한복판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을 우리도 동일하게 경험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