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사명자의 고백 (사도행전20:17~38)

새벽지기1 2018. 2. 6. 13:19

 

“눈물, 성령의 강권하심, 사명, 양떼를 잘 돌보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신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의 이별하는 장면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교훈을 주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 일행이 선교여행을 모두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중에 ‘ 밀레도’ 라는 항구도시에 이르러서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청하는 장면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예수 믿고 변화된 리더십들이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불러서 에베소에서의 삶과 사역을 회고하면서 장로들에게 권면하고, 당부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했습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진정한 영적 지도자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적 교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존경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영적성장의 모델이기도 하고,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설교하기가 어렵습니다. 해석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과 장로들의 아름답고, 성숙한 모습이 저와 너무나 차이가 있어서 설교하기가 죄송하다는 의미입니다.

 

비전 때문에 흘리는 눈물

 

사도 바울의 고백과 권면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다섯 가지 중심단어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눈물입니다.

“내가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겼고 유대 사람들의 음모로 시련도 많이 당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여러분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전했고 공중 앞에서 또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여러분을 가르쳐 왔습니다”(19~20절).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기적의 통로였습니다. 다른 지역보다 에베소에서 가장 많은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마술과 주술, 우상숭배가 가득했던 에베소에 있던 거짓된 영들이 사도 바울의 사역을 통해서 떠나갔습니다. 바울이 입었던 옷이나 물건에 손만 대도 병이 나을 정도로 신비한 기적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이 기적들은 사도 바울을 높이려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와 미신이 가득한 사람들이 기적이 있어야만 믿음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이 많이 나타났지만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회고하면서 “내가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너희에게 행했는지 잘 알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통해 나타난 능력과 기적에 대한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겸손하고, 눈물로 주님을 섬겼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놀랍게 쓰임 받은 것보다 겸손과 눈물로 주님을 섬겼다는 것을 기억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눈물은 영적인 성실, 진실, 살아있는 양심의 증거입니다. 그는 눈물의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했습니다. 겸손과 눈물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기억나는 분이계십니다. 바로 방지일 목사님입니다. 그분은 백세가 넘으셔도 설교를 하실 정도로 강건하셨습니다. 그분이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는 책을 쓰셨는데 눈물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분이 97~98세에 남미에서 열린 선교대회에 참석하셨습니다. 당시 젊은 목회자들도 컨퍼런스에 매번 참석하기가 힘들어서 때로는 졸고, 숙소에서 쉬고 나오기도 했는데 그분은 제일 앞에서 지팡이를 짚고서 한번도 빠지지 않고 컨퍼런스에 참석하셨습니다. 지금도 지팡이를 들고 제일 앞에 계셨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방지일 목사님이 100세가 넘으셨을 때 어느 출판사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기자가 목사님께 건강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특별한 비결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뭔가 있을 것 같은데요”라고 기자가 다시 묻자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건강을 지킨 운동이 있다면 심장운동이라고 할까요” 심장운동이 무엇일까요. 방지일 목사님은 새벽 두 세 시면 잠에서 깨서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시는데 말씀의 오묘함을 볼 때마다 감격의 눈물이 솟구쳐 오른다고 합니다. 말씀 앞에서 통회의 눈물이 흘러나온다고 합니다. 눈물이 솟구칠 때마다 심장이 고동을 친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것을 심장운동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건강 비결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눈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이 있고, 성령 안에서 비전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여기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다는 것은 농부가 일을 억지로 해야 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고된 일이지만 씨가 뿌려졌을 때 열매를 거둘 미래의 비전을 바라보며 눈물로 씨앗을 뿌린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지금은 우상으로 가득하지만 하나님이 눈물로 뿌린 말씀의 씨앗이 열매 맺을 줄로 믿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우상과 미신으로 가득한 이 땅에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눈물로 씨앗을 뿌렸을 때 이 나라와 민족에 놀라운 은혜가 임할 줄로 믿었습니다. 고 방지일 목사님의 글 가운데 하나를 인용했습니다.

“눈물은 거꾸로 흐릅니다. 눈에서 흘러 하늘에 가 닿습니다. 눈물의 사람이 되십시오. 눈물을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당신이 흘린 눈물을 위로와 감사의 병에 담아주십니다.”

성경에도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말씀과 기도로, 영혼을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복음 증거를 위하여, 누군가의 구원을 위하여, 회복을 위하여, 북한 땅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이 반드시 받아주실 것입니다.

 

성령의 강권하심

 

둘째, 성령의 강권하심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성령의 강권하심 가운데 예루살렘에 가려고 합니다.

그곳에서 내가 무슨 일을 당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22절).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유를 성령의 강권하심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분명한 사역 계획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한 계획의 사람이었습니다. 도시중심의 선교 계획을 세우고, 먼저 회당에 가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할 생각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방문했던 지역을 재차 방문해서 복음을 전한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전도 개척지역도 늘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계획적인 선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여정에는 그가 세운 계획을 뛰어넘거나 갑자기 바꾸시는 성령의 강권하심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를 중심으로 사역하기를 원했지만 마케도니아 사람이 나타나는 환상을 통해서 성령님이 그를 유럽으로 인도했습니다. 지중해 동부를 중심으로 사역하던 그를 지중해 서부로 가게 하신 것도 성령님입니다. 여러분, 계획 없이 일하는 것은 성령의 강권하심이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일하면서 성령의 강권하심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자기계획이 분명히 있어야 성령의 강권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을 계획 없는 인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려면 자신의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계획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열려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왜 예루살렘을 간다고 했습니까. 성령의 강권하심 때문이었습니다. 가지 않을 수 없는, 가야만 하는 성령의 강권하심을 경험한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계획을 내려놓게 만드는 성령의 강권하심을 경험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강권하심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강권하심은 우리의 판단력을 마비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력이 흐려지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강권하심을 경험하면 오히려 분별력이 올라갑니다. 판단력이 더 좋아집니다. 성령님이 나를 강권하시되, 선택은 내 의지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면 많은 결박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성령님이 강권하셨습니다. 그러나 결정은 사도 바울이 했습니다. 자신은 원하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간 것이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여기 와 있다가 아니라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행동하지만, 결정과 선택은 스스로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면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가지 말라는 신호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 된다고 결정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위대한 점입니다. 세 번째 단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증거하는 사명

 

셋째, 사명입니다.

“오직 내가 아는 것은 어떤 도시에 가든지 감옥과 고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을 성령께서 내게 증거해 주실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서 내게 주신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다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23~24절).

여러분, 생명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귀하게 여긴 사람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무엇을 위해 죽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무엇을 위해서 죽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육신의 생명입니다. 언젠간 이 세상에서 끝날 생명입니다. 육신의 생명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헬라어에서는 육신의 생명과 영적 생명을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여러분, 영원한 생명을 수많은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길이라면 육신의 생명을 다해서 영원한 생명을 증거하는 일은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사도 바울은 생명보다 귀한 사명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교회

 

넷째, 교회입니다. 양 떼라고 표현되어 있는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자신과 양 떼를 잘 살피고 조심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감독자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고 나면 흉악한 이리 떼 같은 거짓 선생들이 여러분 가운데 들어와 양 떼를 해치려 할 것을 압니다. 또한 여러분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제자들을 빼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진리를 왜곡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3년 내내 여러분 모두에게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훈계한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 내가 여러분을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깁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을 든든하게 세워 거룩함을 입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 기업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28~32절).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양 떼들,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샀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가치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님의 고귀한 피 값으로 산 교회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늘 위험이 있습니다. 흉악한 이리 떼 같은 거짓 선생들이 진리를 왜곡해서 자신을 따르게 하는 위험입니다. 거짓된 지도자는 하나님을 따르게 하지 않고,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진리를 왜곡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처럼 가르칩니다. 또한 양 떼를 아끼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 숨어있는 이리 떼들이 얼마나 많은 양 떼들을 해치고, 혼란스럽게 했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진리를 왜곡하게 하는 자들로부터 성도를 지키라”고 당부했습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하나님을 따르게 하고, 진리를 따르게 하고, 비전을 따르게 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 은혜의 말씀 가운데 맡긴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올바르게 갈 수 있을까요. 은혜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말씀을 의지하고, 모든 성도들이 말씀에 기초해서 믿음이 자랄 때 올바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교회를 보면 사람이 만든 규칙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위에 있습니다. 절대 말씀을 바꾸면 안 됩니다. 사람이 만든 제도와 규칙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문화에 따라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바꿔서는 안 됩니다. 자녀들도 말씀에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규칙에 맡기면 안 됩니다.

 

주는 것이 복되다

 

다섯째, ‘주는 것이 복되다’ 입니다.

“나는 그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나와 내 일행이 필요한 것을 손수 벌어서 썼습니다. 이처럼 내가 모든 일에 모범을 보였으니 여러분도 약한 사람들을 도우며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33~35절).

사도 바울은 많은 필요가 있었지만 받기보다 주는 사역을 했습니다. 손수 벌어서 사역을 했습니다. 혹시 처음 믿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장애물이 될까봐 주는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한국교회에 자비량목회 패러다임이 다시 돌아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전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경우가 있지만, 교회에 너무 의지하다 보면 목회자와 사역자들의 영성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약한 사람을 도우면서 사역하려는 사도 바울의 정신을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잘살자는 것 자체는 비전이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서 잘살 것인지가 비전입니다. 말씀에 근거한 비전을 가지면 경제가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주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 잘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비전입니다. 한동대학교의 비전은 “배워서 남주자”입니다. 지식을 쌓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기 위해서 배울 때 올바른 교육의 비전이 됩니다.


여러분, 기업이 어렵습니까. 하나님 “주는 자가 되기 위해서 잘살아야겠습니다”라고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축복을 더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경제 원조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지도자들이 그런 비전을 제시할 때 나라의 경제가 살아날 것입니다. 단순히 잘살기를 원한다는 것은 비전이 될 수 없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힐 뿐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잘사는 나라가 되어야하는지, 무엇을 위해서 잘사는 가정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주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 잘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비전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이런 비전을 심어주었습니다. 겸손과 눈물을 기억하라는 비전입니다. 성령의 강권하심을 인정하라는 비전입니다. 생명보다 귀한 사명을 위해 헌신하라는 비전입니다. 하나님의 양떼를 잘 돌보라는 비전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비전입니다. 그들이 이러한 비전을 마음에 새기고, 이별할 때 감격의 눈물, 감동의 눈물, 진정한 사랑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 부둥켜안고 울 수 있는 아름다운 교회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