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사명자는 죽지 않는다 (사도행전 23:1~11)

새벽지기1 2018. 2. 13. 07:33

 

“바울처럼, 견고한 영혼, 담대한 영혼, 흔들리지 않는 사명에 붙잡혀서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19세기 중반 30년 동안 아프리카 대륙을 세 번이나 횡단하면서 60만 명 이상을 주님께로 인도했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데이빗 리빙스턴이라는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1813~1873년까지 사셨습니다. 선교 역사의 기념비적인 인물입니다. 가난하지만 경건한 가정에서 자란 그분은 매일 14시간씩 방적공장에서 일하면서 의료선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헌신하면서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주님, 어느 곳이든 보내주십시오. 오직 주님이 저와 그곳에 함께 가주십시오. 어떤 짐이든 주십시오. 견뎌낼 힘을 주십시오. 오직 주님의 심장과 주님을 섬기는 관계로만 저를 묶어 주십시오.”

헌신의 기도를 드렸을 때 주님의 음성이 뚜렷이 들렸다고 합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그가 가장 어려운 지역에서 30여 년 동안 목숨을 다하여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마태복음 28장에 나오는 이 말씀이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원래 중국으로 의료선교를 가려고 했지만 아편전쟁이 일어나서 들어가지 못했고, 서인도제국으로 가려고 했지만 길이 막혀서 가장 어려운 지역인 아프리카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아프리카는 누구도 알지 못했던 땅이었습니다. 유럽에도 알려지지 않았고, 중동의 일부 사람들이 노예를 팔기 위해 들어갔던 그 땅에 그분이 첫 번째 선교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데이빗 리빙스턴 선교사 이야기

 

그분은 30년 동안 세 번이나 아프리카 남부, 중부, 동부지역을 관통하면서 지도를 만들고, 탐험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분이 만든 지도로 수많은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유럽이 아프리카 대륙의 지리학적인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선교사로도 유명하지만 영국이나 유럽의 지리학회에서 더 유명한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아프리카 대륙을 다니면서 당시 성행하던 노예무역을 근절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공정무역을 주창하면서

노예무역을 금지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던 분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분이 아프리카 대륙을 다니면서 선교를 위해 만든 지도가 노예무역상에게 더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 일로 오해를 받고 누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아프리카 선교여행을 하면서 맹수와 백인은 무조건 죽이는 원주민들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렸습니다. 사자에게 어깨를 물려서 한쪽 어깨를 완전히 못쓰게 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이러한 고백을 하셨습니다.

“나는 사명을 다 완수하기 전까지는 죽지 않는다.”

이것은 죽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전까지 어떤 위협도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는 한 호수 근처 오두막집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중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많은 원주민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를 미라로 만들어 8개월 동안 1,600km를 걸어서 시신을 운구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 23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모습이 데이빗 리빙스턴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리빙스턴은 질병과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위협에 시달렸고, 사도 바울은 질병과 유대인들의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두 사람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누구도 자신을 해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명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여러분, 사명자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담대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 끌려와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담대했습니다. 공회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가 담대함을 보여줍니다. 비굴하게 살고자 변명하지도 않았고, 타협하지도 않았고, 선한 양심을 굽히지도 않았습니다.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오늘날 입법, 사법, 행정을 모두 통합한 기구입니다. 사도 바울이 걸려들어 있는 이슈는 산헤드린 공회가 사형을 내릴 수 있는 문제입니다. 성전 안에는 유대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데 이방인들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누명을 쓰고 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는 이방인은 죽임을 당하고, 그 법을 어기는 사람도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경고문이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문건을 보면 그 문제만큼은 산헤드린 공회에 사형권을 넘겨주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사도 바울에게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결정을 따라서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담대한 모습입니까. 그가 이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선한 양심을 따라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공회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이여, 나는 오늘까지 모든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1절).

그는 진실을 증거했을 뿐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험난한 과정을 겪으면서 수없이 많은 오해와 때로는 공격 속에서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선한 양심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에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입을 치라”고 했습니다. 입을 치라고 한 것은 사도 바울이 잘못된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떤 순서와 절차를 어겼기 때문도 아닙니다. 아나니아의 폭력적이고, 조급하고, 비겁하고, 과격하고, 불같은 성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에게 지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명령에 수그러들지도 않았습니다. 더욱 담대하게 말합니다.

 

신사적으로 그러나 담대하게

 

“그러자 바울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당신은 회칠한 무덤과 같소! 당신은 거기 앉아 율법에 따라 나를 심판하면서 도리어 당신 자신은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고 명령하고 있지 않소!’ ”(3절).

이 얼마나 담대합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습니다. 그의 삶을 속속들이 알고 한 말도 아닙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얼마나 부패하였고, 진실에서 떠나있는지, 왜곡된 사실을 만들어서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위선이요, 진실을 떠난 모습이라고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세례 요한이 당시 최고 지도자인 헤롯의 부패에 대해서 담대하게 직언하고, 비판했던 것처럼 아나니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담대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 사람이 대제사장인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곁에 있던 사람들이 “어디 감히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모욕하느냐”(4절)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니니아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습니다. 대제사장이 의복을 안 입고 있었다든지, 사도 바울이 대제사장을 접할 기회가 없다든지, 시력이 약했다든지, 어두워서 못 봤을 것이라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찌됐든 사도 바울은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모르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사도 바울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바울이 대답했습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습니다. 기록되기를 ‘네 백성의 지도자를 모욕하지 말라’ 고 했으니 말입니다’ ”(5절).

사도 바울이 출애굽기 22장 28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사과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율법을 어기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당한 비판과 저주와 모욕은 다릅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문제를 지적하는 것과 모욕하고, 저주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의 태도는 담대하면서도 신사적입니다. 여러분, 사명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신사적입니다. 예의를 갖춥니다. 담대함은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을 무조건 저주하고, 욕하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담대할수록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사적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에게 신사적으로 대했습니다. 두 번씩이나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권위로 세워진 사울을 내가 해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요즘 사회는 양극단으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나와 의견이 다르면 무조건 적이 되는 사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견과 인격을 잘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의 의견과 내 의견이 다르면 자신의 인격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는 것입니다. 의견과 인격은 별개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인격에서 의견이 나올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의견과 인격이 다릅니다.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저주하고, 인격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내 의견에 반대하면 자신을 모독했다고 생각합니다. 인격과 의견을 합쳐버리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해서 얼마든지 토론하고, 치열하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서로의 권위는 존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나타나는 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켰고, 율법대로 대제사장 앞에서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발뺌한 것이 아닙니다. 알고 말해 놓고선 몰랐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담대하게 상대방의 문제를 지적하고, 신사적으로 대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담대하다 보면 비신사적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신사적이 되다 보면 담대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의 균형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신사적으로, 인격을 존중하고, 권위를 인정하면서 선한 양심을 따라 담대하게,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명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바울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이 사명자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호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정상적인 재판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과격했습니다. 성경 표현대로 하자면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 죽지 않을까를 염려했습니다.

“논쟁이 점점 커지자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 죽지 않을까 염려해 군인더러 내려가 바울을 그들 가운데서 빼내 병영 안으로 데려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날 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여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나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 (10~11절).

바울은 이 상황에 이른 이유에 대해 “죽은 자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바울이 싸움을 붙인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의 일부가 “이 사람의 주장이 틀린 것만은 아니다”라고 하자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개인들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논쟁이 점점 커졌을 때 천부장이 사도 바울을 빼냈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의 권력을 사용하셔서 바울을 보호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지만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그 사건을 보는 로마인들은 바울을 보호했습니다. 그들이 바울의 주장을 지지하고,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을 믿어서가 아닙니다. 그냥 공명정대하게 이 사건을 봤을 때 바울이 죽을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 편에 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시 최고로 발달했던 로마의 법질서를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법질서는 하나님의 통치 도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잘 믿는다면 불완전해 보이는 법질서도 잘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법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법을 통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 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공의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준법의식이 있는 것이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불법주차 지역에 주차를 하면서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법을 통해서도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로마의 법을 통해서 보호하셨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를 듣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유대인들 중에 40여 명이 테러리스트로 자원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산헤드린 공회와 음모를 꾸몄습니다. 로마 천부장이 그 사실을 알고 470여 명의 로마 군대를 동원해서 밤 9시에 바울을 가이사랴로 비밀 호송을 했습니다. 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병력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 같은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로마 천부장이 바울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시민권자라도 불의하게, 불법적으로, 억울하게 죽어서는 안 된다는 로마의 법치주의가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시대 법질서를 사용하셔서 바울을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계획하신 것입니다. 왜 이 나라의 법질서가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법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주님께서 바울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위로하시고, 격려도 하셨습니다. 바울은 선교 여정 가운데 주님을 여러 번 만났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고린도에서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두려워 마라. 잠잠하지 말고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행 18:9~11)고 하셨고,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도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서둘러 즉시 예루살렘을 떠나거라. 이곳 사람들은 네가 나를 증언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행 22:18)이라고 하셨습니다. 23장에서는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바울 곁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바울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장차 바울이 당할 고난이 너무 심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다음 날 40여 명의 테러리스트들이 자원하고, 음모가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그날 밤 주님을 체험하지 못했더라면 패닉 상태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뭐라고 격려해 주셨습니까.

“담대하여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나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11절).

담대하게 복음을 증언하고 있는 바울에게 주시는 위로는 “네가 이토록 담대했으니 이제는 쉬어라”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증거했으니 이제 됐다”가 아닙니다. “로마에서도 나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는 더 큰 일을 맡기십니다. 데이빗 리빙스턴이 “주님, 어느 곳이든 보내주십시오. 오직 주님이 저와 그곳에 함께 가주십시오. 어떤 짐이든 주십시오. 오직 견뎌낼 힘을 주십시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바울에게 로마에 가서 증언하라고 하신 주님이 그와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고난과 위협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담대하여라. 내가 네게 준 사명을 다 이루기 전까지 너는 죽지 않는다. 바울을 보호한 것처럼 내가 너를 보호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분이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만드신 분이 말씀하신다. ‘ 내가 너를 건져 주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네 이름을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다. 네가 바다를 건널 때 내가 너와 함께 하겠고 네가 강을 건널 때 휩쓸려가지 않을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갈 때 타지 않을 것이고 불꽃이 네 몸을 태우지 못할 것이다’ ”(사 43:1~2).


여러분,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데이빗 리빙스턴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을 붙잡고 아프리카에서 모진 고난을 이겨냈던 것처럼, 기도하면서 평안하게 주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처럼, 사도 바울의 인생에 함께 하신 주님이 우리도 보호하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사명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면 주님께서 보호하시는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부패한 정치, 종교적 세력과 로마의 정치 세력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편견으로 가득한 비양심적인 유대 종교 세력과 편견 없이 법과 질서를 지키려는 로마의 정치 세력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을 따라 담대하게 걸어갔습니다. 신사적으로 걸어갔습니다. 아무런 힘이 없는 바울이었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신사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견고한 영혼, 담대한 영혼, 흔들리지 않는 사명에 붙잡힌 영혼을 우리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믿음의 삶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