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양심과 앙심 (사도행전 24:10~21)

새벽지기1 2018. 2. 14. 11:07



“앙심을 내려놓고, 양심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성령님이 주시는 선한 양심으로 순종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두 개의 힘이 있습니다. 하나는 ‘양심’ 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양심에서 점 하나를 뺀 ‘앙심’ 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마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넣어주시고,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인간이 타락해서 그 기능이 많이 망가졌지만 여전히 우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앙심은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악한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분노를 일으키고, 복수하게 하며, 때로는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어느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이 인간의 양심을 삼각형으로 형상화했다고 합니다. 인간이 나쁜 짓을 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이유는 삼각형의 뾰족한 모서리가 인간의 마음을 회전하면서 계속 찌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삼각형이 계속 마음을 찌르다 보면 마음의 벽에 굳은살이 생겨서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뾰족한 삼각형이 닳아서 제 기능을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인디언들은 어린아이들의 마음에 있는 양심을 삼각형으로, 어른들의 양심은 원형으로 그렸다고 합니다. 더 이상 마음에 찔림이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선한 양심

 

여러분, 믿음 없이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없고, 선한 양심 없이 믿음이 유지 될 수 없습니다. 선한 양심은 한 번도 죄를 지어본 적이 없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아 정결함을 이뤄가는 것이 양심입니다. 참된 믿음은 양심으로 앙심을 이겨가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선한 양심이 이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악한 앙심이 이기고 있습니까.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양심이 살아나도록 역사합니다. 선한 양심을 따라 살아가도록 역사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능력 가운데 살아갈 때 양심의 소리가 들립니다. 우리가 진정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선한 양심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립니다. 사도행전 후반부에는 사도 바울이 죄수로서 재판을 받으면서 나타난 양심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 전체에서 양심이라는 단어가 35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 21번을 사도 바울이 사용했습니다. 그의 서신들을 보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양심 앞에 거리낌이 없다’ 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24장부터 26장까지 사도 바울은 로마관료들 앞에서 재판을 세 번 받았습니다. 이 재판 과정이 오늘 설교제목처럼 ‘양심과 앙심’ 의 대결로 나타납니다. 양심을 따라 자신을 변호하는 사도 바울과 거짓과 모함으로 앙심을 품고, 죽이려는 유대지도자들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4장에서는 벨릭스 총독 앞에서, 25장에서는 벨릭스의 후임인 베스도 총독 앞에서, 26장에서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합니다. 공교롭게도 예수님도 로마 지도자들 앞에서 재판을 세 번 받았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헤롯 앞에서 또다시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과정에서 결코 앙심을 품지 않으셨습니다. 복수심을 품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선한 양심으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앙심을 품으셨다면 부활 이후의 일들은 모두 복수의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동일한 모습입니다. 재판 과정을 통해 나타난 것은 비록 거짓과 모함으로 죽이려는 앙심에서 비롯된 고소였지만 사도 바울은 선한 양심을 따라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로 호송되었습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한 직후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몇몇 장로들과 더둘로라는 변호사가 와서 사도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무고한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가이사랴까지 찾아와서 고소하는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고, 유치하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할 중보자가 무고한 이를 해치려고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선한 양심을 내버린 사람은 자신의 인격, 존엄, 책임을 버리고 앙심을 품고 악한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결코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선한 양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아! 너희들에게 재앙이 있을 것이다. 나쁜 것을 좋다고 하고 좋은 것을 나쁘다고 하는 사람들아! 어둠을 빛이라고 하고 빛을 어둠이라고 하는 사람들아!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하는 사람들아!”(사 5:20).

바울이 가이사랴로 호송된 직후 그들은 고소팀을 꾸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거짓증인들을 만들고, 고소를 담당할 변호사를 고용했을 것입니다. 더둘로라는 변호사는 아마 로마 법과 언어에 능통해서 가이사랴에 있는 벨릭스 총독 앞에서 유리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고용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불려 나오자 더둘로가 그 사건을 벨릭스 앞에 고소해 말했습니다. ‘우리는 각하의 다스림 아래서 오랫동안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습니다. 각하의 선견지명은 이 나라에 개혁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벨릭스 각하, 저희는 언제 어디서나 이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각하께 폐가되지 않도록 간단히 말씀 드리겠으니 각하께서는 관용을 베푸셔서 저희 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2~4절).

아부입니다. “각하의 다스림 앞에서 오랫동안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고, “개혁을 가져다주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역사가들에 의하면 정반대입니다. 태평성대가 아니라 혼란의 기간이었고,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었고, 가이사랴에서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그때 벨릭스는 유대인들을 살해하고, 투옥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로마로 소환되었습니다.

“저희가 알아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사람으로 온 세상이 퍼져 있는 유대 사람들 가운데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그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며 심지어 성전까지 더럽히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붙잡은 것입니다”(5~6절).


그들을 사도 바울에게 세 가지 죄목을 씌워 고소했습니다. 첫째는 사도 바울이 폭동을 일으킨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 죄목을 가장 먼저 앞세웠냐면 당시 로마가 가장 예민하게 생각하는 것이 소요와 폭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많은 지역을 통치하다보니 소요를 일으킨 사람들을 크게 징벌했습니다. 그들은 로마가 이런 죄는 엄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폭동을 일으켰다는 거짓 죄목을 씌운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했습니다. 이것 또한 로마가 금지하고, 중요시하는 문제를 위반했다는 고발입니다. 로마가 지배하기 이전에 있었던 종교들은 인정하고 존중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일어나는 신흥종교는 절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말한 것은 신흥종교를 만들고 있다고 고발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가 용납하지 못하도록 꾸민 것입니다. 당시 로마가 무엇을 중요시하는지를 너무나 잘 아는 법적인 변호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성전을 더럽히려고 했다는 죄목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아주 정교한 화술이 나옵니다. 성전을 더럽혔다고 하면 증거가 없으니까 더럽히려고 해서 자신들이 잡아왔다고 했습니다. 교묘한 언어입니다. 당시 로마가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는 죄에 대해서 얼마나 예민한지를 알고 계산된 고소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명쾌한 해명

 

사도 바울이 이 세 가지의 고소에 대해서 어떻게 해명했는지가 오늘 본문입니다. 첫 번째 폭동을 일으키는 전염병과 같은 사람이라는 고소에 대해서는 예루살렘에 온지 12일밖에 되지 않았으며, 그 중에서 7일은 정결의식을 행하는데 썼다고 했습니다. 언제 폭동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소요를 일으켰겠냐는 명확한 대답입니다. 두 번째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고소에 대해서는 자신은 유대인들과 동일한 소망을 가진 사람이라면서 다른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구약의 하나님을 바라며 유대인들이 소망하였던 그 소망이 이뤄졌다는 것을 증거하였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자신도 그것을 믿었을 뿐이고,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지만 그 부활이 이뤄진 것을 증거하였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믿고 바라는 것을 자신도 동일하게 믿는 것이지 이단이 아니라는 해명입니다. 세 번째 성전을 더럽혔다는 고소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성전에 있을 때 주변에서 어떠한 소요도 없었고, 아시아에서 온 몇몇 사람이 자신을 보았는데 만약 잘못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와서 고소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본적이 없다고 해명했습니다. 너무나 명쾌합니다. 사도 바울이 선한 양심 앞에서 거리낌이 없는 진실을 해명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양심은 수천, 수 만 명의 증인과도 같습니다. 양심은 아무것도 두렵게 하지 않는 친구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온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저는 제 민족에게 구제금을 전달하고 예물도 드리려고 여러 해 만에 예루살렘 왔습니다”(행 24:17).

도리어 도와주려고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벨릭스는 이미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들었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도 그리스도인들이 소요를 일으킨 적이 없고, 로마에 항거하여 데모를 일으킨 적도 없고,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하며, 구제하며, 나누는, 정말 사랑과 평화가 있는 공동체라는 것을 어느 정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서도 전혀 무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벨릭스에게서 어느 정도 양심적인 모습이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 22절부터 후반부 27절까지 벨릭스의 태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이 사건을 목격한 천부장이 오면 재판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줬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만날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에 선것입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사도 바울을 불렀습니다. 그의 아내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불러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관해서 설명을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아내가 들어 보자라고 한 것 같습니다. 아내의 말을 따라 사도 바울을 불러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정의와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 설명하자 두렵기까지 했습니다. 벨릭스가 두려워했다는 것은 양심이 살아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행동을 보면 양심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비양심적인 모습도 나타납니다.

“동시에 그는 혹시 바울이 자기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바울을 수시로 불러들여 함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26절).

바울이 이방에서 예루살렘을 위한 구제금을 모아왔다고 하니까 구제금에서 남은 것으로 뇌물을 주지 않을까 하고 바란 것입니다. 비양심적인 모습입니다. 유대사람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사도 바울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2년 동안 감옥에 방치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는 그의 행동이 마치 빌라도가 예수님의 재판을 놓고 정의와 양심에 비춰보면 무죄이고, 석방해야 하는데 유대인들이 자신을 정치적인 위치를 어렵게 할까봐 결국 사형을 언도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그 자리를 계속 유지했습니까. 아닙니다. 결국 로마의 소환을 받고, 추방되었습니다. 비양심적인 지도자의 결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양심이 살아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앙심에 굴복해 버렸습니다.

 

믿음과 선한 양심으로

 

여러분, 선한 양심이 있고, 연약한 양심이 있고, 부패한 양심이 있고, 화인 맞은 양심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양심이 민감하게 역할을 하다가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부패하고, 완전히 기능을 상실하는 화인 맞은 양심으로 악화될 수 있습니다. 벨릭스도 처음에는 양심이 있다가 조금씩 사라지더니 나중에는 뇌물을 원했습니다.

여러분, 참된 믿음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타락한 양심이 점점 깨끗해져서 선한 양심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아무런 감각이 없는 원형과 같은 양심에서 삼각형의 양심으로 찔리고 또 찔리는 양심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나는 곳에는 양심이 살아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역사가 나타나는 곳에는 양심이 깨끗해집니다. 히브리서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가 죄악 된 양심으로부터 마음을 깨끗이 씻고 맑은 물로 몸을 씻었으므로 확신에 찬 믿음과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히 10:22).


여러분, 죄악 된 양심으로부터 마음을 깨끗이 씻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권력과 비양심적인 종교의 세력 사이에 끼어 있었지만 두려움이 없습니다. 선한 양심을 따라 행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충돌해서 혁명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증거자로 서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종교개혁 내용을 발표했을 때 엄청난 핍박과 방해와 살해 위협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종교개혁을 계속 이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선한 양심을 따라 행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과 마틴 루터처럼 믿음과 선한 양심으로 살아갈 때 이러한 능력과 담대함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안에 솟아오르는 앙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양심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성령의 역사로부터 오는 선한 양심의 소리를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