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요나의 회개와 하나님의 구원 (욘 2:1~10)

새벽지기1 2018. 3. 1. 08:03


“옛사람이 수장되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요나서는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선지자 요나의 참회록입니다. 요나의 죄와 허물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아무리 악한 백성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서 도망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서 도망하기도 합니다. 내가 받는 축복은 환영하지만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축복 받는 것은 거절합니다. 내가 받은 특권은 좋아하지만 사명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요나의 모습 속에서 이런 모습이 나타납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이 받은 특권과 축복은 환영하지만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백성들을 구원하는 사명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특권과 사명은 언제나 함께 있습니다. 특권과 축복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고

 

요나가 사역하던 시대는 북왕국 여로보암 2세 시대입니다. 그 시대는 경제적으로 아주 번영했습니다. 영토가 확장되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안목은 좁아져있던 시대입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예언되었던 시대입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요나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더 넓게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문제였습니다. 먼저 선택 받아 구원받은 이 시대 백성들의 문제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증인으로 선택받았지만 사명을 잃어버리고, 내가 받은 축복과 특권만을 누리기 원하는 좁은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품지 못하는 성도들의 문제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하나님은 폭풍으로 요나를 추적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폭풍을 일으키시지는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행하는 모든 불순종을 이렇게 대하신다면 살아남는 사람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폭풍을 일으키십니다. 폭풍이 없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였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경우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부여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긴급하게 추적하셨습니다. 요나가 문제의 원인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졌을 때 큰 파도가 그를 삼켜 버렸습니다. 그는 깊은 바다 속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죽음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물이 내 영혼을 에워싸고 심연이 나를 삼키고 해초가 내 머리를 감쌌습니다. 산의 뿌리에까지 내가 내려갔습니다. 저 땅이 나를 오랫동안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목숨을 구덩이에서 건져 올리셨습니다”(5~6절).

요나는 마지막 몇 초 남지 않은 호흡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더 이상 숨 쉴 수 없는 순간에 도움을 구했습니다. 여러분, 위기의 순간에 도움을 요청할 대상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요나에게는 부르짖을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그가 비록 불순종의 대가를 치르고 있지만 죽음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에게 믿음의 불씨가 남아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큰 물고기를 준비해놓고 계셨습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져 죽음 직전에 처했을 때 그 큰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삼키게 하였습니다. 요나는 그곳을 지옥의 깊은 곳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요나는 죽으려고 자신의 몸을 던졌지만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살려고 해도 죽을 수 있고, 죽으려고 해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요나서 1장 17절에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밤낮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 3일 밤낮’ 이라는 것은 히브리어의 숙어적 표현입니다. 그들은 하루 조금 지난 시간도 이렇게 표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꼭 72시간이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요나가 일정한 기간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 특히 회의론자들과 불신자들이 성경을 믿지 않은 이유를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기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큰 물고기 속에 산채로 삼켜질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있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동화나 신화 속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브리태니커 출판사에서 인용해서 답한 논문이 있습니다. 1927년 프린스턴 신학지에서 발표된 논문입니다. 스펌고래의 구조와 습관을 조사해본 결과 사람이 산채로 삼켜졌다가 그 안에서 생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고래는 머리가 상당히 크고, 입의 길이가 20피트, 높이가 15피트, 넓이가 9피트입니다. 사람보다 더 큰 오징어도 산채로 삼킬 정도로 큰 고래입니다. 문제는 그 고래의 위속에서 사람이 정말 생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1891년 2월 사우스 애틀랜타 해를 항해하던 영국배가 포클랜드 아일랜드 근해에서 고래의 공격을 받고 뒤집어졌습니다. 그때 21살 된 제임스 바틀리라는 선원이 바다에 빠졌는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선원들이 그 근처에 있던 고래를 잡아서 고래의 위를 열었는데 그 선원이 그 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 고래 배속에서 18시간이나 있었습니다. 피부가 완전히 표백된 상태였다고 하지만 살았고 1909년까지 살았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 현대판 요나, 제임스 바틀리’ 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인터넷 백과사전에 1870년에서 1909년까지 살았던 현대판 요나 이야기가 실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를 삼켰던 고래가 스펌고래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째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도 고래에게 산채로 삼켜졌다가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요나가 겪은 상황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여덟 차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요나가 죽었어도 다시 살릴 수 있는 분입니다. 그 분에게 요나가 큰 물고기에게 삼켜졌다가 다시 살아나게 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물고기 뱃속에서 어떠한 변화를 겪었냐는 것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의 변화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 속에서 나타난 변화가 무엇입니까.

첫째, 그는 회개했습니다. 지옥 같은 상황에던져졌지만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깊은 바다에 던진 것은 선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깊은 곳 바다 한가운데에 던지셨습니다. 그러자 물결이 나를 에워싸고 주의 파도와 소용돌이가 나를 덮쳤습니다”(3절).

자신에게 임한 죽음의 고통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회개는 두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받아들여야합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선한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요나는 돌이키고 있습니다.

“쓸모없는 우상들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습니다”(8절).

요나 스스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 내가 주의 눈앞에서 쫓겨났지만 그럴지라도 나는 주의 거룩한 성전을 다시 바라보겠습니다’ ”(4절).

‘ 다시’ 라는 단어 속에 회개의 은혜가 있습니다. 요나는 지금 시체와 같은 상태입니다. 몇 초를 더 살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가 몇 초 남아있든 간에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 주의 목전에서 쫓겨난 자’ 라고 고백했습니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 다시’ 라는 단어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요나가 다시 하나님을 찾아도 받아주시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은 회개를 통해 다시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이 모습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와 유사합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갔던 아들이 지옥 같은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탕자는 돼지우리에서 정신을 차렸고,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정신을 차렸습니다.


둘째, 요나가 감사하고 있습니다. 요나의 감사는 자신이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주장할 의로움이 없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나름대로 항변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욥에게는 ‘ 의로운 삶을 살았는데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라고 항변할 의로움이 있었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덩이에 갇히고, 감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 앞에서 항변할 수 있는 의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 앞에 주장할 그 어떤 의로움도 없었습니다. 그는 지금 심판 받고 지옥 같은 상황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받을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신 것도 감사하고,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감사의 노래로 주께 제물을 드릴 것입니다. 내가 서원한 것을 내가 잘 지킬 것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부터 옵니다”(9절).

요나는 자신의 소원을 주께 갚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지옥 같은 물고기 뱃속이 다시 한 번 헌신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는 보장이 없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회개, 감사, 재헌신의 마음이 솟아올랐습니다.

 

요나의 사건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요나가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다시 육지에 내어 보내셨습니다. 요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명령하셨고 물고기는 요나를 땅으로 토해 냈습니다”(10절).

이 사건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을 잘 보여줍니다. 큰 물고기에게 명하시고, 태풍을 보내시고, 제비뽑기해서 요나가 뽑히게 하고, 바다에 던져지는 그 순간 물고기가 삼키게 하고, 물고기로 하여금 토하게 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도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더 중요한 의미는 예수님이 이 사건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해석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나의 사건을 인용해서 사역을 설명하셨다는 데 매우 큰 중요성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 요나가 3일 밤낮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인자도 3일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그 죄를 심판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마 12:39~41).

가장 정확한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요나의 사건은 악한 세대에게 주시는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고 있지만 예언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 (39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된 것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게 표적이 될 것이다”(눅 11:30).

표적이라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왜 믿어야 하는지를 보여 달라는 요구입니다. 믿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입니다. 악한 세대는 표적을 구합니다. 표적을 보아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그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의 표적이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요나와 같은 표적이 되셨습니까. 요나가 3일 밤낮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3일 밤낮을 땅속에 있는 것으로 표적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 표적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3일 밤낮 땅속에 있었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죽음 가운데서 3일 밤낮을 계시다가 생명으로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요나의 사건과 예수님의 사역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요나의 사건이 예수님을 통해 이뤄지는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나는 물에 던져져서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그의 옛 생명은 물속에 장사된 것입니다. 요나가 처한 상태는 지옥의 깊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지옥이라는 단어는 죽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요나가 바다 속에 던져진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정신 차리라고 고통을 준 정도가 아닙니다. 요나를 죽게 하신 것입니다. 고통 속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요나를 수장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요나의 생명을 요구한 것이고, 요나가 죽음으로써 죄의 삯을 지불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인류의 모든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시기 전에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세례는 영어로 ‘ Baptism’ , 헬라어로는 ‘ 밥티죠’ 입니다. 밥티죠는 물에 잠기다는 뜻입니다. 침례교에서는 진짜 물에 잠기게 합니다. 예식자체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나는 물에 빠져서 큰 물고기가 삼킴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머리에 물을 뿌림으로 옛사람이 수장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요나의 옛사람은 죽고, 그 죽음을 통과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부활의 생명으로 일어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옛사람을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나와 비교할 수 없는 죽음을 경험하셨습니다. 요나가 받은 고통은 숨 막히는 고통이었지만 예수님은 온 몸이 찢겨졌습니다. 요나가 받은 사명은 지극히 제한적이지만 예수님은 모든 나라,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사명이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도망하는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기쁘게 순종함으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요나는 실제적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해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인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롬 6:4).

 

회개하고, 감사할 때 비로소 구원이

 

여러분, 요나를 죽음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요나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받을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는 순간일지라도 회개하고, 감사할 때 여호와로부터 구원이 임할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의지하며 다시 시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보다 나은 삶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요나처럼 옛사람이 수장되고, 예수님이 땅속에서 죽으신 것처럼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옛사람이 개선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서 부활의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요나의 사건은 바로 이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나가 그 시대의 표적이 된 것처럼 예수님은 이 시대의 표적이 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표적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 표적이 이제 실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요나처럼 끊임없이 불순종으로 나아갑니다. 특권만을 바라고, 사명을 잃어버리는 불순종의 습관들을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옛사람이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힘으로 장사 지낸 바 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서 새 생명이 되어야합니다. 새 생명의 삶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