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요나의 분노와 하나님의 질문 (욘 4:1~11)

새벽지기1 2018. 3. 7. 07:07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찾고, 그토록 기다리시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투자하시는 것은 합당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긴 여행을 ‘30cm여행’이라고 합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을 일컫는 말입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과 삶으로 행하는 것의 차이가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니느웨 성으로 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니느웨 성 전체가 회개하고 돌이켰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를 받아들이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의 회개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인 요나도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감사하고, 찬양함이 마땅한데 요나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기뻐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분노했습니다. 니느웨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과 분노하는 요나의 모습이 대조됩니다. 이것이 요나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요나가 불쾌해하고, 분노하는 것은 여전히 미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모습이 매우 안타깝고 슬픕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셨지만 요나는 즉시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셨지만 요나의 마음속에는 불같은 진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비단 요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겸손한 참회의 기도를 드렸는데 지금은 교만하게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는 자신의 생명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생명을 거둬달라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지만 지금은 니느웨 백성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중적인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2장에서 요나의 기도를 거짓말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진실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진실이 이렇게 연약합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죄악으로 인해 이런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4장에 나오는 요나의 기도를 가리켜 ‘영적인 유아로 회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들도 영적 유아기 같은 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분노한 이유

 

“그는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이것이 내가 고향에 있을 때 내가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까? 이래서 내가 서둘러 다시스로 도망간 것입니다. 주께서는 은혜롭고 동정심이 많은 하나님이시고 진노하는 데 더디시고 사랑은 충만하시며 재앙을 내리는 것을 주저하신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었습니다’”(2절).
요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동정심이 많으시며, 진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으로 율법을 받으러 올라가서 더디 내려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한 신이라고 숭배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셨지만 모세의 간절한 중보기도로 뜻을 돌이켰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신 말씀이 출애굽기 34장 6~7절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모세 앞으로 지나가면서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 여호와, 긍휼하고 은혜로운 하나님,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하며 수천 대에 걸쳐 긍휼을 베풀고 죄악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며 죄지은 자들을 징벌하지 않고는 그냥 넘어가지 못하니 아버지의 죄를 그 자식들과 그의 자손들에게 3, 4대에 걸쳐 징벌한다.’”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는 수천 대에 걸쳐 이어집니다.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하시고. 수천 대에 걸쳐서 인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징벌은 3, 4대에서 그치는 하나님입니다. 이 모습이 얼마나 대조가 됩니까. 요나는 이 사건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들에게 진노를 거두시고, 용서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못했습니다. 그가 아는 하나님은 지식속의 하나님이지 삶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머릿속에는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잘못하고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줄 의무가 없는 존재가 주는 것입니다. 은혜는 이 두 가지 조건이 합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다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에게 은혜다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

 

최근 두란노서원에서 번역된 책 가운데 팀 켈러 목사님이 쓰신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를 영어로 ‘Prodigal son’이라고 합니다. ‘방탕한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그 단어를 하나님께 붙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집을 나가 방탕하게 살던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용서하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잔치를 베풀고, 기뻐하고, 용서하는 비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는 그 비유를 해설한 책입니다. 그런데 왜 ‘탕부 하나님’이라고 했을까요.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왜 그 비유가 주어졌는가 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것에 불만을 가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 비유를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환영하고, 잔치를 베풀고, 동네사람들을 초청해서 아들의 귀향을 환영하는데 그 잔치에도 들어가지 않은 한 인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로 첫째 아들입니다. 그는 동생이 방탕한 삶을 살다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용서를 못마땅해 했습니다. 아버지의 은혜가 잘못된 것이라고 반발했습니다. 자신은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 없이 순종하며 살았는데, 아버지 유산을 가지고 방탕하게 살다가 돌아온 동생을 왜 받아들였냐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이해할 수 없는 과도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배가 고파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처절하게 회개했기 때문에 받아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이미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을 보자마자 먼저 달려간 것입니다. 아들이 회개했다는 것을 듣고 달려간 것이 아닙니다. 그냥 끌어안은 것입니다. 입을 맞추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잔치를 베풀어 준 것입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은 것입니다. 리차드 렘브란트라는 화가는 탕자의 비유를 그릴 때 아버지와 아들을 끌어안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 그 옆 길목에서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노려보는 큰 아들을 그렸습니다. 이 비유를 잘 이해한 그림입니다. 방탕한 동생을 받아준 아버지는 팀 켈러 목사님이 이름을 붙인 것처럼 ‘탕부 하나님’입니다. 그 책에서는 이 비유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모차르트를 중심으로 아마데우스라는 희곡을 인용합니다. 모짜르트는 일종의 방종을 일삼는 탕자입니다. ‘살리에르’라는 사람이 볼 때 모짜르트는 형편없는 탕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성실하고 근면한 자신보다 모든 재능을 모짜르트에게만 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데우스라는 이름은 ‘하나님께 사랑 받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 책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재능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려고 본능적 욕망마저도 다 물리치고 있었건만, 모차르트는 약혼까지 한 상태에서 온갖 방종을 일삼는데도 아무런 징계가 없었다!”
살리에르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차르트에게 분노와 증오, 미움을 퍼붓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것은 우리가 회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용서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순서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요나는 어떤 모습입니까.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큰아들과 살리에리와 같습니다. 아낌없는 사랑으로 니느웨를 대하시는 하나님께 반발하고 있습니다. 악한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순종을 합리화했습니다. 자신의 불순종이 옳은 행동이었다고 합리화했습니다. 요나는 머리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마음과 삶으로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여호와여, 이제 제발 내 목숨을 가져가십시오. 내가 사는 것보다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3절).
여러분, 사람들이 왜 스스로 죽겠다고 말합니까. 자신이 옳은데 받아들이지 않으니 죽고 싶을 만큼 괴롭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지금 그렇습니다. 구약에도 요나처럼 죽겠다고 아우성을 친 사람이 있습니다. ‘엘리야’입니다. 그는 아합과 이세벨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한 뒤 광야로 도망가서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보내고 포기하지 아니하셨고, 엘리야를 아합과 이사벨에게 보내고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야도 아합과 이사벨을 상대하기 싫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받아들이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때로는 죽기보다 싫은 일 앞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확신하십시오.
요나와 엘리야의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에게 쫓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는 것이 낫겠다고 했습니다. 요나가 왜 이 지경까지 갔을까요. 마음속에 있는 불의한 분노를 참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는 의로운 분노가 아닙니다. 불의한 분노입니다. 의로운 분노는 절대 생명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의로운 분노는 사람을  죽게 하지 않습니다. 죽고 싶을 만큼 싫어하는 일이 있다면 마음속에 불의한 분노가 있는 것입니다. 요나에게 성령님이 계속 음성을 들려주셨을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도 하나님이 그를 깨워 올리셨습니다. 요나가 분노가운데 있을 때에도 성령님이 계속 그의 마음을 두드렸을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면 죽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꾸 그 길을 택하려는 것입니다. 그는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노하는 요나를 품어주시고 교훈해주셨습니다. 요나의 분노를 징벌로 대하지 아니하시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여러분, 질문과 가르침은 사랑이 있을 때 나옵니다. 정말 싫은 사람은 내버려둡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기에, 니느웨를 사랑하듯이 요나를 사랑하셨기에 그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짐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네가 화내는 것이 옳으냐?”
 
“그러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화내는 것이 옳으냐?’(4절).
하나님은 범죄 한 아담과 하와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서 교훈하십니다. “네가 화내는 것이 옳으냐?”라는 질문에 요나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불순종의 침묵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항변하는 고집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성 밖으로 나가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앉았습니다.
“요나가 성읍 밖으로 나가 그 성읍 동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그곳에서 초막을 짓고서 그늘 아래서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때까지 앉아 있었습니다”(5절).
요나의 행동을 보십시오. 니느웨를 하루 만에 떠났습니다. 하룻길을 여행하고 동쪽에 자리를 잡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멸망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나가 동편에 앉아있는 동안 하나님이 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넝쿨은 빨리 자라고, 잎이 넓어서 그늘을 만들어줍니다. 그 넝쿨로 요나가 시원해졌습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넝쿨을 준비하셔서 그것이 요나 위로 자라나 요나의 머리에 그늘이 되게 하셨으며 그의 불쾌함을 없애 주셨습니다. 요나는 넝쿨 때문에 기분이 아주 좋아졌습니다”(6절).
니느웨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심히 분노하던 요나가 자신을 시원하게 해주는 넝쿨하나로 심히 기뻐했습니다. 대조가 됩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가르치는 방법이 참 유머러스합니다. 하나님이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보십시오. 폭풍이 나오고, 큰 물고기가 나오고, 넝쿨이 나오고, 벌레가 나옵니다. 뜨거운 바람도 나옵니다. 요나가 넝쿨로 인해서 심히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새벽 하나님이 벌레를 보내서 넝쿨을 다 갉아먹게 했습니다. 요나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넝쿨이 없어졌습니다. 요나는 힘이 빠졌습니다. 그리고 죽기를 원했습니다.
“해가 뜨자 하나님께서는 뜨거운 동쪽 바람을 준비하셨습니다. 해가 요나의 머리 위를 따갑게 내리쬐어 그는 힘이 빠졌습니다. 그는 죽기를 원했습니다. 요나는 말했습니다. ‘내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8절).

 

“그 넝쿨 때문에 화내는 게 옳으냐?”

 

이때 하나님이 두 번째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 넝쿨 때문에 화내는 게 옳으냐?’ 그가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9절).
또 다시 화를 내고 분노하는 요나를 보면서 하나님이 “네가 넝쿨로 인해서 화내는 것이 옳으냐”고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넝쿨은 네가 심은 것도 아니고, 기르지도 않았고, 너희 것도 아닌데 넝쿨이 있다가 없어진 것을 보고 화를 낼 권리가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때 요나가 분노하면서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요나의 밑바닥에 있는 분노가 솟아 오른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이 고갈되면 조그만 일에도 분노합니다. 모든 종류의 분노는 사실 하나님께 대한 분노입니다. 내 안에 일어나는 분노의 원인을 가만히 보십시오. 화내지 않아도 될 것을, 점잖게 좋은 말로 할 수도 있는 것을 참지못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분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넝쿨 하나가 있다가 없어져도 화가 납니다.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나는 지금 하나님께 화가 나 있는 것을 환경에 분풀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넝쿨이 없어지면 요나가 어떤 반응을 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좁은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12만 명이나 되는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은 기뻐하지 못하고, 넝쿨 하나에 잠깐 기뻐했다가 다시 분노하는 인간의 얄팍한 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초라한 모습입니까. 하나님의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 앞에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좁은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과 요나의 침묵

 

“그러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가꾸지도 않고 기르지도 않은 넝쿨도 너는 아꼈다. 하룻밤 사이에 자라나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렸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오른손과 왼손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12만 명이나 있고 가축도 많이 있는 이 큰 성읍 니느웨를 내가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느냐?’”(10~11절).
이 세 번째 질문으로 요나서가 끝납니다.  선지자 요나의 침묵으로 요나서가 끝납니다. 이 침묵은 반항에 가까운 것입니다. 요나의 침묵은 우리에게 공을 던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질문하신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입니까. 니느웨 사람들이 변화하고, 회개한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못하는 요나처럼 우리도 내 가족과 우리 민족만 생각할 것입니까. 그렇다면 선교사님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선교를 불필요한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을 힘들게 한 민족들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모두 요나의 좁은 마음입니다. 우리에게도 요나와 같은 연약한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아끼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느냐?”, “내가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찾기 위해서 그토록 기다리시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투자하시는 것은 합당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행동으로 이 질문에 대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