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오직은혜, 오직 믿음 (사도행전 15:1~11)

새벽지기1 2018. 1. 22. 08:29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중세교회의 어두운 먹구름을 걷히게 하고, 개신교를 탄생시킨 종교개혁의 3대 모토는 오직 성경(sola sce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입니다. 오직 성경이 말씀하신 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밝게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은 생명을 걸고 싸웠습니다. 이 진리 때문에 교회가 바로 세워진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를 보면 이 진리를 올바로 믿고, 고백하고, 이 진리 위에 교회가 세워졌을 때 건강하고 순수했습니다. 이 진리가 희석되고, 분명하게 증거되지 않았을 때 교회는 방황하고, 배교에까지 이르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중세교회가 어두운 시대를 겪었던 것은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명확하게 깨닫지 못했고,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 교회를 보면서 중세교회와 닮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부패, 목회자의 타락 등 여러 가지 잘못된 모습들도 원인이지만, 가장 중요한 진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순순한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성경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첫 번째 교회회의

 

사도행전 15장 말씀은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진리를 사도들이 확인하고, 경험하고, 결정한 첫 번째 교회회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열린 첫 번째 교단 총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사에서는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합니다. 이 회의의 발단 배경은 이렇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서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수리아 안디옥교회가 선교기지가 되었습니다. 소아시아지역을 중심으로 1차 선교여행을 다녀온 이후 안디옥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들을 구원받게 하셨는지,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는지를 간증했습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감격했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그 이후 수년 동안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지역에 머물면서 믿음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온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몇몇 사람들이 안디옥교회에 와서 성도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가르침의 내용이 예수님을 믿어도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들은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지도 못했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성도들이었습니다. 그 가르침은 큰 충돌과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깨닫고, 가르쳤던 복음이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왜곡되는 것을 방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논쟁과 대립이 생겼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토론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로 가서 그들과 같이 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 해결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바나바 같은 중요한 지도자들조차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 문제를 명확하게 드러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을 보면 바울이 베드로를 심하게 책망한 사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교제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으로부터 야고보가 보낸 몇몇 유대인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중요시하는 율법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슬그머니 식사자리에서 도망쳤습니다. 바울이 그 모습을 보고 베드로를 호되게 책망했습니다. 바나바도 베드로와 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흥분해서 “이런 것은 위선이다. 복음의 진리대로 행하지 않은 것이다. 단순히 자리를 피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확실하게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을 두려워해서 피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의 뿌리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실천하기 어려웠습니다. 베드로와 바나바조차도 분위기에 휩쓸릴 정도니까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명확하게 고백하고 저주까지 합니다. 사도 바울의 강력한 도전이 있었기 때문에 초대교회가 올바른 복음을 분명하게 깨닫고, 전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으로 율법의 속박과 구속에서 벗어나

 

그들이 예루살렘교회에서 오랜 시간 토론을 합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토론했는지를 모르지만 베드로, 바울, 바나바, 야고보 등 중요한 지도자들의 고백을 통해서 결론을 맺게 됩니다. 먼저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토론한 끝에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도 알다시피 얼마 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서 나를 선택해 이방 사람들도 내 입술을 통해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셨습니다. 그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방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주셔서 그들을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믿음으로 깨끗하게 하셔서 우리와 그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째서 우리 조상이나 우리가 질 수 없었던 무거운 짐을 이방 신자들에게 지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하십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믿습니다’”(7~11절).


베드로가 자신의 체험을 간증했습니다. 그가 로마의 백부장이었던 고넬료와 그의 일행을 만난 사건을 고백했습니다. 베드로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환상 속에 내려온 동물들은 레위기의 율법에 근거하면 먹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먹으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먹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에 근거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깨끗하다고 한 것을 네가 불결하다고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환상이 베드로의 율법적인 사고방식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고넬료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로마 백부장이었던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존중했지만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체험한 것을 고넬료와 일행들도 체험을 했습니다. 오순절에 임했던 성령님이 고넬료와 일행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했습니다. 그 외에도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고,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된 것을 보았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러면서 율법적 유대인들에게 “여러분은 우리 조상이나 우리도 질 수 없었던 무거운 짐을 왜 이방인들에게 지우려고 하느냐”고 도전했습니다. 자신들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서 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이방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바나바가 자신의 체험을 간증했습니다.
“온 회중이 조용해지면서 바울과 바나바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이야기했습니다”(12절).


바울과 바나바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짧은 구절로 요약을 했을까요. 너무 길었기 때문에 모두 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고,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사건을 일일이 기록한다면 사도행전 이상으로 기록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과 바나바의 고백이 핵심적인 역할이었습니다. 이어서 야고보가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판단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방 사람들을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상으로 더러워진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는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19~20절).
야고보의 지혜를 통해서 안이 결정되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의 짐을 지울 수 없다. 단 네 가지를 멀리하라고 편지하자. 우상으로 더러워진 음식, 음행,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는 유대인들에게 너무나 혐오스러운 일들이기 때문에 이것은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를 차원을 뛰어넘어 덕과 배려의 차원에서 우리가 지키자고 결정했습니다. 이 안이 예루살렘 공의에서 결정이 되었습니다. 만장일치로 내려진 이 결정은 복음으로 율법의 속박과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온 세상에 순수하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한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적 사건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여러분,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은 복음의 가장 중요한 본질입니다.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게 하는 진리입니다. 이방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 사람들은 종교개혁 이전 중세교회 사람들의 생각과 가르침이 동일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내용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고, 행위는 그 의의 열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오직’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이것을 분명하게 고백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명확하게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변증하는 가장 중요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말씀이 창세기 15장 6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손에 대한 약속을 주실 때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음에 하나님이 그를 의롭게 여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점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구절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이전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수백 년 후입니다. 아브라함은 모세의 율법을 알지도 못하고 죽었습니다.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져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말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적어놓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변증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인해 이방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실 것을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모든 이방 사람이 네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저주 아래 있습니다. 기록되기를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항상 지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를 받는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율법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갈 3:8~11).
“그러나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을 알기에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인정받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갈 2:16)
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율법으로 지키는 선한 행위는 우리의 눈에 선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닙니다. 의롭다고 인정받을 육체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죄인의 상태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까. 마틴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경 전체에 나오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때문입니다.

 

세 가지 ‘전가(轉嫁)’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한 단어를 알면 이해가 가능합니다. 이 단어를 깊이 이해해야만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단어는 ‘전가’입니다. 영어로 ‘Imputation’입니다. 우리가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 진다는 것은 세 가지 전가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아담으로 인해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아담의 죄가 전가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니 태어난 이후 우리가 죄를 지어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느 누구도 의롭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다윗은 “우리가 죄악 중에 출생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예례미야 11장에는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만큼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동방의 의인이요, 하나님이 자랑할 만한 수준의 사람입니다. 그에게 극심한 고난이 닥쳤을 때 잘 이기는 것 같았지만 고난이 길어지니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분노, 원망, 죄들이 올라왔습니다. 연못물을 막대기로 휘저어보면 흙탕물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우리 마음도 편안하고 잠잠할 때는 의롭고 선한 것 같지만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오면 얼마나 더러운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과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 가장 정확한 현실입니다. 어느 누구도 선한 행위로 의롭다고 여길 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을 때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전가는 예수님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임 당하셨을 때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 안에서 처리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죄가 전가된 상태로 태어났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죄가 처리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제사제도가 있었던 것은 이 전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나의 죄가 제물에게 전가되었으므로 내가 당할 징벌을 이 제물이 대신 받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전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의 죄가 모두 처리되었습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세 번째 전가가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전가 받으셔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실 뿐만이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의롭게 되셨습니다.

주님의 생명과 그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로움이 나의 의로움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나의 생명으로 전가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유는 우리의 의로움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의로움이 하나도 없습니다.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담의 죄가 전가된 상태로 태어나고,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전가되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생명과 의로움이 나의 의로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볼 때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보실 때는 의인입니다. 우리는 죄인인 동시에 의인입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덮으실 때 그분의 의로움이 나의 의로움으로 전가되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는 마음으로 이러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수십 년을 철저하게 봉사하고, 헌신해도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우리 모두는 죄인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이 나의 모든 죄를 전가하는 죽음이며, 그분의 의로움이 나의 의로움이 될 때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걸로 보십니다.


리스도의 순종을 나의 순종으로 여기십니다. 예수님을 붙잡아야만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사건이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아담 안에서 철저한 죄인, 완전히 부패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죄를 대신한 죽음이며, 예수님의 의와 거룩과 생명이 나의 의로움이 됐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여기십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했습니다. 모든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도록 강요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줌으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의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이 귀한 진리를 날마다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진리를 체험한 자는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날마다 고백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 진리가 온 세상에 증거될 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