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무상한 인생 (야고보서4:7-17)

새벽지기1 2017. 11. 14. 07:10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이 해도 거의 다 저물어서 어느덧 1959년 마지막 성일을 당하였습니다. 세월이 빠른 것은 우리가 언제 잊으리오마는 이렇게 연말을 당할 때에 이런 면을 더 느끼게 되고 따라서 이런 때에 더 한층 인생의 엄숙한 면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모세의 기도로 알려진 시편 90편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모세의 눈에 비친 인생의 일면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인생은 한 티끌이라고「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란 구절이 거기 있습니다. 또는「저희는 잠자는 것 같으며」하루 밤 자고 깨는 것 같으며 혹은 아침에 돋는 풀과 같아서『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한 순간에 다 하였나이다 라고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인생은 무상하고 잠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다른 곳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루 밤 잠자는 것 같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 내려오는 말 그대로 사용하면 인생은 일장춘몽이라고 합니다. 한 마당의 봄꿈과 같다고 생각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시편 93편에 보면,『나의 날이 손 넓이만 하게 하였나이다.』이런 말이 있습니다. 손 넓이는 그렇게 넓지는 못합니다. 여기 우리가 읽은 말씀과 같이 나의 생명이 무엇인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아침의 안개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우리 한국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 초로인생(草露人生)이란 말이 있습니다. 풀에 맺힌 이슬과 같은 인생입니다. 아침 이슬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이렇게 인생이란 순간적일뿐더러 사실 인생이란 우리가 이 대 우주에 비교해 보면 지극히 작은 존재입니다.
시편 8편에는『주의 손가락으로 만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대 우주를 보고 우리 인생이란 것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적은 존재인 것을 옛 사람도 느꼈습니다. 하물며 이 우주 시대를 당해서 천문학이 발전되어서 이 우주가 얼마나 광대(廣大)무변(無邊) 하다고 하는 것을 아는 우리 20세기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이런 느낌이 더욱 커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옛날 글에 있는 말과 같이 문자 그대로 인생은 창해일속(滄海一粟)이라고, 푸른 바다의 조알 하나처럼 이렇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뿐 아니고 우리 인생은 얼마나 연약한지 역대기 상 29장 15절에 보면 인생은 그림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림자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존재입니다. 여기에는 안개와 같다고 했는데 안개도 거의 실체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약한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천재지변이 있습니다. 태풍이 불고, 해일이 있고, 지진이 있고, 홍수가 넘치고, 열병도 충만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뿐입니까? 인생은 사실 내일 일을 모르고 삽니다.『너희가 내일 일을 모르는 도다.』내일이 아니고 다음 시간의 일을 모르고 삽니다.


전에 제가 미국서 잘 알던 어떤 미국 부인이 한 분 계신대 대단히 어진 부인입니다. 이 부인이 45세에 비로소 결혼하였습니다. 결혼한 지 9일만에 그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생이란 내일 일을 모릅니다. 아마 미리 알았다면 결혼을 안 했을 줄로 압니다. 여기 독신으로 나오신 동포들 가운데 38선이 이렇게 오래 막힐 줄 알았다면, 어떻게 하든지 아마 가족을 등반하고 나왔을 겁니다. 우리가 내일 일을 모릅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그 해 곡식이 잘 되니 곡간에 가득히 채워 넣고 이제는 여러 해 먹을 양식이 넉넉하니『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고 그럽니다. 그러나 그 날 저녁에 그 영혼을 불러갈 줄을 인생은 모릅니다.
인생이란 이렇게 생각할 때에 사실 잠간이오, 또한 무상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와 같은 인생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되겠느냐? 여기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과 견해가 다르지마는 대체로 생각해 보면, 세 가지 견해와 태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속주의 적, 향락주의적 견해의 태도입니다. 둘째는 염세주의 적, 도피주의적 태도입니다. 셋째는 기독교의 견해와 그 태도입니다.


먼저, 세속주의 적, 향락주의적 그런 태도를 보면 대체로 이렇습니다. 옛날 헬라 문화가 전성할 시대에 그 시대를 지배하던 사상의 학파가 몇 있는데 그 학파 가운데 에피큐리안 학파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인가의 최상의 목표는 쾌락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표어가운데 하나가 성경에도 그 말 그대로 나타나지마는『먹고 마시자, 내일 죽으리라.』내일 죽을 터이니 살아 있을 때에 먹고 마시자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옛날 에피큐리안 학파에서만 가진 것이 아니고 어떤 시대나 어떤 사회에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사회에도 이런 사상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서도에서 오신 분도 많은데 서도에서 많이 부르는 수심가를 아마 기억하실 줄 압니다. 그 수심가를 잘 알지는 못하지마는 아이 때에 늘 부르는 소리를 좀 들었는데 무슨 내용인가 하면『노세 노세 젊어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이런 노래입니다. 그러니 젊어서 잘 먹고 잘 쓰며 거드럭거리고 놀자 입니다. 그것이 수심가에 나타나는 인생 철학입니다. 인생이 이렇게 무상하고 이렇게 잠깐 되니 그저 젊었을 때에 늙어지기 전에 잘 먹고 잘 쓰고 잘 놀자 인 것입니다. 세속주의 적, 향락주의적 견해와 태도입니다.


옛날 중국에 양주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양주의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인간이 오래 산대야 백년에 불과해 그런데 사실 백년을 사는 사람은 천 명에 하나도 드물다. 그런데 설사 여기 어떤 사람이 있어서 백년을 산다고 하자, 그렇지마는 가만히 보면, 아무 것도 모르고 알지 못하고 사는 유년기와 노년기가 그 절반을 차지한다. 또 밤에 잠자는 시간과 깨어서도 헛되이 지나는 시간을 합해 보면 그것이 또 나머지의 절반은 차지한다 또 그 다음에 환난을 당하고, 질고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시간, 이것 다 몰아 놓으면, 또 그 나머지의 절반을 더 차지해, 그러니 암으로 생을 즐길 수 있는 햇수는 백년을 살아도 10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중에 결론은 그러므로 살았을 때에 마음껏 향락을 누리고 사망이라는 것을 과히 생각지도 말고, 잊어 버리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사람 주장은 그저 귀로 듣고 싶은 말을 다 듣고,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을 다 보고, 코로 냄새 맡고 싶은 것을 다 냄새 맡고, 입으로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고, 또 입으로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육신으로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날 양주라고 하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세속주의 적, 현세주의 적, 향락주의적 견해와 태도요 철학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유물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생각밖에 다른 생각이 날 수가 없습니다.『향락을 누릴 수 있을 때에 누려 보자. 인생은 허무하다.』그런데 이런 태도에 대해서 한가지 생각할 것은 향락이라고 하는 것은 향락 자체를 인간의 최고 목표로 탐구하게 되면 탐구한 그 즉시로 그 향락이 환멸과 고통으로 변합니다. 결국은 멸망을 초래하고 맙니다.
그래서 아편을 먹는 사람이 향락을 위해서 아편 대를 빱니다. 빠는 그 즉시로 환멸을 느끼고 그 까닭으로 고통이 오고 마지막에는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의 운명, 정욕을 따르는 사람의 모든 운명, 향락 자체를 인간의 최고 목표로 하는 사람의 결말은 다 멸망으로 마치고 맙니다.


그 다음에는 염세주의 적 도피주의 적 그런 태도가 있습니다. 옛날 헬라 시대에 그 에피큐리안 학파와 반대되는 사상을 가진 학파가 있었습니다. 스토익 학파가 그것입니다. 이 스토익 학파의 사상 가운데는 이 염세주의 적인 사상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이란 이렇게 잠깐이오, 또 무상하니 결국은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결국은 인간 생활이란 절망이야 마지막에는 죽을 뿐이야. 그러니 근본적으로 생을 구하지 말라. 생을 부정하라. 생이라고 하는 것을 사랑하지 말아라.』그러면 적어도 생에 대해서 스스로 속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을 부정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사상은 우리 동양의 불교에 많이 있습니다. 불교의 근본적인 사상은 이 염세적인 사상, 생을 부정하는 사상입니다.『생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고통을 의미해. 산다고 하는 것이 곧 고통이야. 그래서 인생의 여러 가지 고통이 많은 중 네 가지 고통이 있어. 생로병사(生老病死)즉 나는 것이 고통이고, 늙는 것이 고통이오, 병나는 것이 고통이오, 죽는 것이 고통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무슨 향락을 누리려 하지 않고 생을 도피하라. 생을 피하라, 부정하라. 가정이 쓸데없어, 집에서 나가라, 입산해라, 그저 깊은 산 속에 가서 혼자 살라.』이것이 염세주의 적인 도피주의 적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상에 대해서 한 가지 생각되는 것은 이 생이라고 하는 것은 피해지지 않습니다. 산에 들어간다고 인생고가 없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암만 피한다고 해도 결국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셋째로 우리 성경이 가르쳐 주는 기독교적 견해는 어떠하냐? 지금 여러분께서 들으시고 읽으신 바와 같이 사실 성경도 인생이란 무상하고 생이란 순간적이란 것을 인정하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인생의 이와 같은 무상한 면이 있지마는 인생을 좀더 깊이 통찰하도록 권면합니다. 생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무상하고 이렇게 순간 성이 있지마는 그러나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보이는 면뿐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보이는 면뿐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이 보이는 육신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아니하는 영혼이 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보이는 육신은 잠간이라고 할지라도, 보이지 아니하는 영혼은 영원의 불멸의 존재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인생을 좀더 깊이 통찰하도록 우리에게 지시합니다. 그리고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인생의 육신생활이 이렇게 잠간이라고 하지마는 이 시기는 매우 중대한 시기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 까닭은 이 시기에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작정됩니다. 잠깐 되는 이 삶을 가진 이 시간에, 우리가 과연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느냐? 인간 일생의 영원한 운명이 육신을 쓰고 사는 이 시대에 작정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기를, 육신을 쓰고 사는 동안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어서,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우리에게 외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인간의 육신 생활이 비록 잠간이라고 하지마는 이 잠깐 사는 생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 하나를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잠깐 동안 세상에 살게 하지마는 이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사명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잠깐 동안 사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경륜을 발견하고, 따라서 내 사명을 발견해서,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다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나의 사는 날이 많지 못하니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광음을 아껴서 열심히 나의 맡은 바 사명을 다하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잠깐 되는 세상이니 세상을 위해서 살면 안 됩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세상을 살되 봉사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과 국가에 봉사해야 됩니다. 그 자체를 위해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나의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밤이 오기 전에, 겨울이 오기 전에 네 사명을 다하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 선생이 고린도 전서 15장 58절에 권면한 말씀을 읽을 때에 자세히 들으시기를 바랍니다.『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우리의 인생 생활이 비록 무상하고 잠간이라고 하지마는 주안에서 수고하고 주안에서 하는 일은 절대로 헛된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이와 같이 잠깐 되는 까닭으로 더욱 우리의 생활을 바로 하고,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의 사명을 다 해야 되겠습니다. (1958년 12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