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 (로마서5:1-11)

새벽지기1 2017. 11. 19. 06:14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 은 단적으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우리에게 선언하여 주시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어떠한 속성은 우리가 깨닫기 쉽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 또는 하나님의 권능 같은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우주를 통해서 자연계를 통해서 우리가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마는 어떠한 속성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것은 그렇게 쉽게 얼른 알아 보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그가 지으신 이 자연계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따뜻한 아침 햇빛 혹은 아름다운 저녁 노을, 밤에 은연(隱然)한 달빛 혹은 영원히 빛나는 별빛을 바라 볼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그 가운데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혹은 봄 동산에 피는 꽃이든지, 여름에 성하는 녹음방초(綠陰芳草) 든 지, 가을에 무르익은 곡식과 실과를 바라 볼 때에 혹은 노래하는 새의 노래를 듣고, 들에 달리는 짐승을 바라볼 때에도 우리는 이와 같은 때 자연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까지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마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분명하게 보여준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은 이 자연계는 어떤 사람들이 기록한 바와 같이 여러가지 모순이 있어서 피에 물들인 이빨과 발톱을 볼 수가 있고, 약육강식의 참상을 또한 볼 수 있으며, 천재지변도 적지 아니한 것을 우리는 목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사랑은 그가 지으신 바 자연계를 통해서 곧 알아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을 만큼 분명히 나타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우리 인간에게 보내어 주셨습니다. 모세를 보내 주셨습니다. 호세아를 보내 주셨습니다. 혹은 이사야를 보내 주시고 예레미야를 보내 주셨습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호소하는 소리를 친히 들으시고 그 백성을 애굽의 폭정 가운데에서 구원해 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40년 동안 광야를 통해서 그들을 인도해 주시고, 마지막에 가나안 복지를 허락하여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 위에 여러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을 영원하신 사랑의 줄로써 이끌기를 힘쓴 역사를 우리는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이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도 오리려 만족할 것은 되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게 되었습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마지막에는 독생자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사람의 모습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의 사랑의 얼굴을 통해서, 사랑의 음성을 통해서, 사랑의 성품을 통해서, 사랑의 입을 열어서, 여러 가지 사랑의 교훈을 통하여, 사랑의 손을 펴서, 여러 가지 사랑의 일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혹은 죽은 자를 고쳐 주심으로, 혹은 주린 자를 먹이심으로, 혹은 슬픈 자를 위로하여 주심으로, 혹은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시다 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셨습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내서 보일 수 있도록 하셨습니까?


오늘 읽은 이 본문은 그 진리를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줍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을 확실히 증명하여 주셨습니다. 대 자연계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까지 나타낸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까지 계시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생활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신 것은 곧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죽음이올시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십니까? 이미 읽은 바와 같이『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그가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면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으리라.』길이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그가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친히 아버지께서 그 안에 계셔서 우리들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요한 복음 1장 1절에 기록한 바와 같이『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독 하나님이시니라.』곧 하나님이시오, 말씀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실히 증명하여 주신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까? 여기 보니까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우리」는 여기 앉은 여러분과 저만 가리킨 것뿐만 아니고 인류 전체를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시오, 길이요, 질리요, 생명이시오, 아버지께서 친히 계셔서 그 모습으로 보여 주시는 주시오, 말씀이시오, 하나님이신 그는 인류 전체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어떤 순교자가 어떠한 진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순교도 얼마나 고귀한 죽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떠한 애국자가 자기의 민족과 자기의 나라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초개같이 버릴 때, 이와 같이 순국자의 죽음도 얼마나 거룩한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떤 진리만을 위한 순교만이 아닙니다. 어떠한 민족 어떠한 나라만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인류를 위해서, 인류 전체를 위해서, 그들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그들을 굽어살피기 위해서, 죽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미국 남북전쟁이 있을 때에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고 합니다. 북군에서 전쟁에 나갈 군인을 징발할 때에 전쟁이 자갈 만한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그 사람들 가운데서 제비를 뽑아서 다 나갈 필요는 없으니까 나갈 사람을 먼저 뽑아서 내 보낸 일이 있다고 합니다. 어떠한 동리에서 몇 사람이 모여서 제비를 뽑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어떤 사람이 제비를 뽑혔는고 하니, 가족도 많고 부모도 계시고 전쟁에 나가면 그 가족도 전혀 부양할 사람이 없는, 그런 사람이 그만 제비에 뽑혀서 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광경을 보고 그 친구 가운데 부모도 안 계시고 그는 아직도 결혼도 하지 아니했는데 그 경지를 보고서 대신 자원해서 전쟁에서 싸우겠다고 이와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그 징발하는 책임자에게 말하니까 그도 감격해서 대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에 나가도록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전쟁에 나가서 자기의 나라를 위해서 싸움하고 있습니다. 자기 동네에서 자기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이 사람은 자기 대신 나간 사람이 그에 대한 감격이 얼마나 깊은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신문을 보면 얼른 전쟁 뉴스부터 먼저 보고 특별히 어떤 곳에 격전이 있다고 하면 거기 혹 자기 친구가 들지 않았는가 해서 먼저 그것부터 살펴보고 또 이따금 죽은 사람의 명단이 나게 되어도 행여 자기 친구가 전사하지 않았나 제일 먼저 그것만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 한번은 큰 격전이 있게 되었는데 그만 자기 친구가 그 격전 가운데서 싸울 수밖에 없었고, 그 다음에 신문에 나는 것을 보니까 죽은 사람의 명단 가운데, 그 사람의 이름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런 신문을 보고 이 사람이 앞이 아득했습니다. 곧 그 싸움터에 나가서 자기 대신 죽은 그 시체를 자기가 친히 모셔다가 자기 가족 공동 묘지에 그 시체를 묻고 그의 이름을 쓰고 그 아래는 간단히『그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다.』라고 묘비를 새겼다고 합니다.『그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다.』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있을 때에 그가 죽으셨습니까?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 인류의 형편을 네 가지로 설명하였습니다. 5장 6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리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경건하지 않은 때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거룩하지 못하고, 선을 행하지 못하지만,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서 예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읽는 이 8절에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죽는 자가 쉽지 않습니다. 의인보다 오히려 선한 사람,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을 위해서 혹 죽는 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마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많은 죄 짐을 지고 이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을 그런 때에, 구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10절에 내려가서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뿐더러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하나님과 사실 원수가 되어 있을 그 때에 하나님께서 사랑의 손을 내미실 뿐더러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를 보내셔서 원수 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속량 해 주심으로 그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증명하신 것입니다.
언약할 때에 죽으셨습니다. 경건하지 아니할 때에 죽으셨습니다. 죄인 되었을 때에 죽으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원수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제가 어떤 책을 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 아마 옛날 같습니다 - 깊은 산림 지대를 마차에 타고 가족과 동반해서 지나가던 중이었습니다. 마차부는 오래 동안 그 주인을 위해서 봉사한 충성된 분입니다. 또 이런 산림 지대는 여러 번 다녀 보아서 경험도 많은 그런 좋은 마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쯤 깊은 산림지대를 지나갈 때에, 말 네 필이 그 마차를 끌렀는데 말 두 필이 갑자기 놀라면서 앞으로 달음질하기 시작하니 다른 말들도 같이 네 굽을 안고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마차부가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뒤에 짐승들이 여러 마리 따라옵니다. 그 마차부는 거기에 이따금 나오는 이리떼인 것을 곧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마차부도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해서 동리가 과히 멀지 않으니까 동리로 달립니다. 그렇지만 이리처럼 빨리 달릴 수는 없습니다. 얼마쯤 있다 보니까 그 이리의 무리가 몇 마리가 아니고 여러 수십 마리가 따라 오는데 가만 보니까 그 이리한테 잡히면 말과 사람이 다 희생될 것 같이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마차부가 생각다 못해 말 가운데 두 필을 말고삐를 찍어서 채찍으로 때려서 다른 방향으로 달음질시켰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 이리들이 그 말을 쫓아서 그 방향으로 전부 달아납니다. 그래서 두 말로 마차를 몰면서 그 마부는 이제는 생명을 구했다고 생각하면서 달려갈 길을 빨리 갑니다. 얼마쯤 있다 보니까, 이 이리들이 벌써 그 말들을 따라가서 다 잡아 먹은 모양입니다. 그리고서 오히려 힘을 더 얻어서 더 빨리 따라옵니다. 그러니까 빨리 가면 어떤 동리에 들어가게 되는데 아무리 두 말을 몰아서 빨리 가지마는 또 다시 이리가 가까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다른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주인보고 하는 말이『주인께서 이 말을 몰아서 빨리 동리로 들어가세요. 나는 필경 저놈들과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그리고서는 하나 밖에 없는 총을 메고 마차를 내렸습니다. 내려서 마차는 빨리 보내고 이리를 향해서 그저 총알 있는 대로 이 이리와 싸웁니다. 이 주인은 얼른 동리에 들어가서 여러 사람에게 청병(請兵)해서 총을 많이 가지고 많은 사람이 빨리 구원하러 왔습니다.
왔지마는 그만 불행히 그 마차부는 총탄이 다 없어지고 이리에게 희생된 뒤였습니다. 이렇게 이 마차부는 자기의 주인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은 그 마차부를 위해서 특별히 기념비를 세워 주어서 영원히 그 마차부의 충성을 표상 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마차부가 자기 주인과 자기 주인의 가족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까지 희생한 것, 얼마나 고귀한 충성이요, 얼마나 고귀한 희생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은 이보다도 더 귀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 마차부는 그래도 자기의 주인을 위해서 자기의 친구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원수들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올시다. 이것이 십자가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올시다.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반대하는 원수들을 위해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주시고 그 사랑하는 아들을 월수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침으로 주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얼마나 거룩합니까? 우리 사람의 생각으로 그 높음과 그 깊음과 그 넓이를 감히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죄 짓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영원히 하나님과 원수 되어서 죽을 것밖에 없고,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지마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의 한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를 다 속량 해 주시고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무심히 보시지 맙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오, 섬기려 하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생명을 대신 바쳐서 우리의 죄를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것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인류에게 십자가상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랜트(사순절)기간을 통해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좀더 깨달을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품속에 돌아 와서 모든 죄를 회개하고, 내가 먼저 구원을 얻으며, 이 사랑의 소식을 온 세상에, 이 쓸쓸하고 냉랭한 세상에 사람의 복음을 전파하여야 되겠습니다. (1960년 3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