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성령9-자비, 이유 없는 베풂 (마가복음6:27-36)

새벽지기1 2017. 10. 2. 11:57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매우 부담이 되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자비가 좋다고 해도 유분수지 저렇게 살라고 말씀하시면 어떡해,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따라 살았다가는 남아나는 게 하나도 없겠다, 하는 의문이 들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괜히 이 말씀을 하신 건 아닙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눅6:36)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입니다. 우선 창조를 봅시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왜 창조했을까요? 하나님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창조했을까요? 만물로부터 영광을 받기 위해 창조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위해 창조했습니다.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도 사실이지만 만물을 위해 만물을 창조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베풂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들을 세상에게 무한정 쏟아낸 하나님의 베풂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자비롭고 은혜롭고 인애가 많으신 분이라고 말합니다(출22:27, 34:6, 신4:31, 삼하22:26, 대하5:13,20:2130:9, 시18:25, 신7:9,12, 렘9:17, 슥7:9).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늘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토브) 그의 인자하심(헤세드)이 영원함이로다”(시106:1)라고 후렴처럼 반복했습니다. 여기서 자비는 은혜로운 베풂을 뜻합니다. 어떤 보상이나 답례도 바라지 않고 그냥 베푸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를 자비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하나님의 창조가 자비의 행위, 베풂의 행위였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에게 돌아올 어떤 보상이나 답례를 기대하고 창조한 게 아니라 단지 자비의 행위로서 세상이 존재하도록 하셨다고 믿습니다.


온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실로 거대한 세상이 우리 앞에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거저 주어진 것들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만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구걸해서 받아낸 것도 없습니다. 다 거저 받은 것들입니다. 태양도 거저 받았고, 지구도 거저 받았고, 대기도 거저 받았고, 나무도 거저 받았고, 꽃도 거저 받았고, 고래도 거저 받았고, 부모님도 거저 받았고, 이웃도 거저 받았고, 내 존재도 거저 받았고, 시간도 거저 받았고, 예수님도 거저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정말 어마어마하게 베푸셨습니다. 온 세상을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이 베푸심에 의지해서 삽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이 베푸심에 기초해서 삽니다. 루터는 이 진실을 발견하고 임종 앞에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거지들이다. 그것은 참 말이다.” 예, 백 번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받아 사는 거지들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진실을 모르고 자기 힘으로 사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는데 사실은 다 받아 사는 거지들이에요. 하나님이 베풀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들입니다. 제가 지금의 제가 된 것도 주의 은혜요 세상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저를 사랑으로 만나주셨고, 또 수많은 사람들의 돌봄과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오늘의 제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나름 열심히 공부한 것도 사실이지만 공부라는 것도 사실은 받는 것입니다. 공부의 9할은 다른 사람의 것을 받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내 것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도 따지고 보면 다 받음에 기초해서 이루어집니다. 제가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도 누군가가 개발한 덕분에 편하게 사용하는 것이고, 제가 옷을 입는 것도 누군가가 만들어준 덕분에 편하게 입는 것이고, 제가 밥을 먹는 것도 누군가가 농사를 지어준 덕분에 편하게 먹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가족의 돌봄 덕분이기도 하지만 의사와 간호사들이 최선을 다해 수술하고 돌보아 준 덕분입니다. 예, 다 덕분입니다. 누군가의 수고 덕분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저의 수고 덕분에 여러분이 말씀의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고, 여러분의 수고 덕분에 제가 말씀 준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의 수고 덕분에 우리가 맛있는 주일 점심을 먹는 것입니다. 예,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덕분입니다. 세상만사가 다 선물이에요. 세상이 온통 선물이고, 삶이 온통 선물입니다. 오늘 하루도 위대한 선물입니다. 영원히, 영원히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모기가 어떻게 선물이냐, 바퀴벌레가 어떻게 선물이냐, 바이러스가 어떻게 선물이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알지 못해서 그렇지 그런 것들까지도 신비로운 선물이라고 봐야 합니다. 죄와 죄의 삯인 죽음 외에는 모든 것이 선물이라고 봐야 합니다. 나 자신부터가 나에게 선물이고,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받은바 선물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삶의 근원 진실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베풂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창조뿐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또한 베풂이요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느니라.”(요10:11)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렸습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고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목숨을 내어줬습니다. 창조를 위해서는 자기 목숨을 버리지 않았는데 구원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까지 내어줬습니다. 누가 요구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스스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욕 먹어가면서, 조롱받아가면서, 정죄당해가면서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구원은 창조보다 더 큰 베풂이요 더 값진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내어줌을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이라고 찬미했습니다(엡1:6).


옳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창조와 구원입니다. 그런데 창조와 구원은 본질적으로 베풂의 행위입니다. 그것도 거저 내어주는 베풂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자비(헤세드)입니다. 어떤 보답을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고 거저 내어주는 것,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베푸는 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정확하게 말씀한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비하신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한없이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온 세상을 품고 계십니다. 창조한 세계를 구원하시느라 눈코 뜰 새가 없으십니다. 그러니 세상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비가 가득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온 세상에는 죄와 어둠이 넘칩니다. 모든 사람 안에도 죄와 어둠이 넘칩니다. 죄와 어둠이 세상 곳곳에 깊은 상처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가 온 세상에 넘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죄악이 극성을 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파멸하지 않고 이렇게 발전하며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세상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서울여자대학교 장경철 교수는 [성품]이라는 책에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우주에서 가장 활동적인 원리입니다.”(성품. 107쪽) 루터는 믿음으로 하나님에게서 받는 것을 존엄한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 가운데 가장 고귀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미로슬라브 볼프. 베풂과 용서. 66쪽).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주를 감싸고 있습니다. 매순간 우리 몸속에 뜨거운 피가 흐르듯이 하나님의 뜨거운 자비가 온 세상에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받아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산타클로스와 같은 분일까요? 산타클로스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단지 선물을 주고 떠나는데 하나님이 그런 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달랑 선물만 주고 떠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해 사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또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기도 하십니다. 서로 사랑해라,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 피차 용서하라, 세상을 본받지 마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자비를 베풀어라, 등등 정말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처럼 살라’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요구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요구입니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과 산타클로스의 차이입니다. 산타클로스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단지 주는데 비해 하나님은 조건 없이 베푸시지만 동시에 엄청난 요구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산타클로스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주기만 하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산타클로스 같은 분이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산타클로스가 아닙니다. 아니, 산타클로스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시니까, 세상을 너무너무 사랑하시니까 선물 몇 개 던져주고 ‘내년에 또 올게’ 하고 떠나는 것으로는 도무지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할 때까지는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살고 내가 하나님 안에 살고,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처럼 살 수 있을 때까지는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목이 곧은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질 때까지는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끝없이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처럼 살라고 끝없이 요구하십니다.

 

이 요구는 실로 엄청난 요구입니다. 과중한 요구가 아니라 심히 영광스러운 요구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처럼 엄청난 요구를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10:12-13).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의 행복을 위해 요구하시고, 온 세상의 화평을 위해 요구하십니다. 그것도 무작정 요구하시는 게 아니라 넘치도록 베푸신 후에 요구하십니다. 우리에게 하라고만 다그치지 않으시고 친히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행할 수 있도록 깨우치시고 격려하시고 힘을 더하시면서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라며 파송할 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며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케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10:7-8). 예,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대원칙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뒤집으면, 거저 주려면 먼저 거저 받은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베푸심이 얼마나 크고 광대한지를 인식해야만, 거저 받은 줄을 온 몸으로 깨달아야만 비로소 거저 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사람이 거저 받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절대로 거저 줄 수 없습니다. 은혜를 온 몸으로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뭔가를 성취했을 때 엄청난 오판을 하게 됩니다. 자기가 잘나고 자기가 똑똑해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피땀 흘려 노력해서 자수성가했다고 생각하고 모든 영광을 자기에게 돌립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일구었으니 내가 일군 모든 것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맘대로 쓰고 누려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자기만큼 성취하지 못한 자들은 무시합니다. 저 놈들은 게으르고 능력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노력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무시합니다. 거저 받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어쩔 수 없어요. 거만하고, 교만하고, 인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로 겸허할 수 없어요. 거저 줄 수 없어요. 은혜를 깊이 깨달아야만, 그것도 온 몸으로 깨달아야만 거저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자비의 원천은 은혜입니다. 은혜의 샘에서만 자비가 솟아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세상의 은혜를 아는 자의 심령에서만 자비라는 열매가 맺힙니다.

그런데 이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지금 이 시대는 은혜를 모르는 시대입니다. 우리 모두 경험하고 있듯이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을 거래하는 시장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30년 전만 해도 지금하고는 많이 달랐어요. 대중가요계만 해도 그 때는 가수들이 곡을 그냥 주고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수 윤형주 씨나 이장희 씨는 작곡을 많이 했는데, 자기가 작곡한 곡을 김세환 씨가 달라고 하면 그냥 줬습니다. 송창식 씨에게도 그냥 주고, 다른 가수들에게도 그냥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안 합니다. 철저하게 계약을 맺고 거래를 합니다. 글 하나도 그냥 써주는 법이 없어요. 글도 거래를 하고, 아이디어도 거래를 하고, 노동도 거래를 합니다. 책도 내용이 얼마나 충실하냐로 판단하지 않아요. 얼마나 많이 팔리느냐로 판단합니다. 영화도 주제를 어떻게 표현했느냐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관객이 보았느냐로 판단합니다. 대학도 교수와 학생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느냐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학생이 취업하느냐로 판단합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거래를 통해 이루어지고, 거래량이 모든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됐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거래하는 시장사회에 자비가 발붙일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예수님 말씀은 씨알이 먹히지 않습니다. 아무리 목이 터지라 말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립니다. 좋은 말씀이긴 한데 비현실적인 이야기야, 받은 만큼 주고 준 만큼 받아야지 무슨 소리야, 움켜 줘도 살기 힘든 세상에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꿈같은 이야기지, 바보짓일 뿐이야, 나는 그렇게 못 살아, 라고 선을 딱 그어버립니다. 실제로 모든 걸 거래하는 시장사회에서 살다보니 거저 주고 거저 받는다는 게 굉장히 낯선 일이 됐습니다. 현대인은 거저 줄 줄도 모르고 거저 받을 줄도 몰라요. 무엇이 됐건 거래를 해야 마음 편해하지 거저 받으면 굉장히 불편해합니다. 받는 것도 불편해하고 주는 것도 불편해합니다. 내 것 내가 쓰고, 네 것 네가 쓰고 살자(더치페이), 이것이 이 시대의 모토입니다.

 

또 자본주의 사회는 사적 소유 개념이 매우 강합니다. 내가 수고해서 벌은 것, 내가 가진 것은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집도 내 것, 자동차도 내 것, 남편도 내 것, 아내도 내 것, 자식도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인은 모든 것을 내 것이냐, 내 것 아니냐로 구분합니다. 내 것에 대한 소유의식이 매우 강합니다. 애기들도 자기 것에 대한 소유의식이 아주 강합니다. 자기 것은 절대 안 줘요. (은혜가 은혜롭지 않아) 애나 어른이나 자기 소유권을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내가 힘써서 이루었으니까 내가 소유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맘대로 처분하고 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반쪽 진실에 불과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것이 상식입니다만 근원 진실에는 어긋나는 생각입니다. 근원 진실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게 근원 진실입니다.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은 받은 것’이라는 게 근원 진실이에요.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는 이 커다란 진실을 부정하고 외면합니다. 내가 땀 흘려 수고했고, 정당한 값을 지불했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지 모든 것이 은혜의 선물이라는 근원 진실은 부정하고 외면합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한 마디로 ‘은혜를 부정하는 사회’입니다.


이처럼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은혜를 부정하는 사회이다 보니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은혜를 모릅니다. 자기 권리를 주장할 줄만 알지 은혜를 몰라요. 사람은 모름지기 은혜를 알아야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고, 베풀면서 살 수 있는데 은혜를 모릅니다. 그리고 은혜를 모르니까 사람들이 싸가지가 없어요. 미안해할 줄도 모르고, 염치없어 할 줄도 모르고, 감사해할 줄도 몰라요. 자기 권리만 주장하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악랄한 짐승이 됩니다. 사람이 은혜를 모르면 능력이 뛰어날수록, 돈이 많을수록,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더 악랄하고, 더 교활하고, 더 사악한 짐승이 됩니다. 사람들이 흔히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개만도 못하다’고 욕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은혜에 눈뜨지 못하면 짐승보다 못한 짓을 하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은혜가 세상의 근원 진실입니다. 세계 자체가 은혜의 결실이고, 모든 생명과 삶이 은혜에 기초하여 살고 있다는 것이 세상의 근원 진실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말하는 근원 메시지도 다른 게 아닙니다. 온 세상은 거저 주어진 선물이라는 게 창조의 근원 메시지입니다. 사람은 이 근원 진실에 눈떠야 합니다. 이 근원 메시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루터처럼 모든 것을 받아 사는 거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근원 진실에 눈뜬 사람입니다. 자기가 거지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실이고 그 은혜에 기초하여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받은 자’이고, 세상 앞에서는 ‘주는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받은 자로 살고, 세상 앞에서는 주는 자(베푸는 자)로 사는 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또 이것이 하나님이 디자인한 세상의 질서입니다. 더욱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처럼 베풂을 행할 때에만 완성됩니다. 우리의 삶 또한 베풂을 행함으로써만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베풀어야 합니다. 이유 없이 베풀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소유하기 위해 이 땅에 오지 않았습니다. 베풀기 위해 왔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받은 자’로 살고, 세상 앞에서는 ‘주는 자’로 살기 위해 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의 본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소유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세상을 소유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소유가 많은 것을 자랑하며 살고 있습니다. 잘못 살고 있는 겁니다. 세상의 근원 진실을 보지 못하는 장님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거짓에 속고 있는 겁니다. 사람은 소유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베풀기 위해 존재합니다. 사람의 위엄과 영광은 소유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많든 적든 베푸는데 있습니다. 이유 없이 베풀 때 사람의 위엄과 영광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처럼 이유 없이 베풀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유 없이 베풂으로써 사람으로서의 위엄과 영광을 잃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을 듣겠습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