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성령7- 화평, 관계의 정상성에서 오는 삶의 온전함 (로마서5:1)

새벽지기1 2017. 9. 18. 06:42


우리는 지금 성령의 열매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제일 먼저 사랑을 살펴봤고, 두 번째로 희락을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로 화평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화평은 그리스어로 ‘에이레네’(Εἰρήνη)입니다. 그리스어 ‘에이레네’는 평화 ‧ 평강 ‧ 평안을 뜻하는 히브리어 ‘샬롬’(שָׁלוֹם)과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샬롬’(שָׁלוֹם)을 ‘에이레네’(Εἰρήνη)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나라 성경학자들은 헬라어 ‘에이레네’를 어떤 데서는 ‘화평’으로, 어떤 데서는 ‘평안’으로, 어떤 데서는 ‘평강’으로, 어떤 데서는 ‘평화’로 각각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다 같은 말입니다. 평화, 평강, 평안, 화평이 헬라어로는 다 ‘에이레네’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을 때 화평, 평화, 평안, 평강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조금씩 다른 뜻이려니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 ‘에이레네’ ‘샬롬’을 뜻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에이레네’는 무엇일까요? 성령의 열매로서의 화평은 과연 무엇일까요? 단지 마음에 두려움이나 염려, 공포나 불안이 없는 것일까요? 단지 근심이나 걱정이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화평, 평강, 그러면 대뜸 마음의 문제라는 생각이 앞섭니다. 마음에 두려움이나 염려, 공포나 불안, 근심이나 걱정이 없는 상태라는 생각이 앞섭니다. 그러나 화평은 단순히 마음이 평안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화평은 모든 관계가 정상적인데서 오는 삶의 정상성입니다. 관계의 정상성에서 오는 삶의 평안함, 관계의 정상성에서 오는 삶의 온전함, 관계의 정상성에서 오는 삶의 충만함이 화평입니다. 화평은 단순히 마음의 문제가 아니에요. 마음을 포함하는 삶의 문제입니다. 삶은 헝클어져 있는데 마음만은 평안하다, 그것은 화평이 아닙니다. 마음뿐 아니라 삶 전체가 평안한 것이 화평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화평은 모든 관계가 정상적인데서 오는 삶의 정상성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계를 이런 화평의 세계로 창조했습니다. 모든 것이 관계 속에서 평안을 누리도록 창조했습니다. 태양은 태양대로 살고, 지구는 지구대로 살고, 호랑이는 호랑이대로 살고, 꽃은 꽃대로 살고, 고래는 고래대로 살고, 사람은 사람대로 살도록 만들지 않으시고, 모든 것이 관계 속에서 화평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 몸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 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세포와 신경조직과 뼈와 혈관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뇌, 눈, 귀, 코, 입, 손, 발, 위장, 내장, 콩팥, 심장, 혈관, 뼈, 피부, 손가락, 발가락, 빛, 공기, 물, 밥까지 기막히게 연결되어 있어요. 만일 이 연결 고리 중에 하나만 떨어져나가도, 하나만 제 역할을 못해도 몸 전체가 고통 받습니다. 눈이 제 역할을 못해도 온 몸이 고통을 받고, 손이 제 역할을 못해도 온 몸이 고통을 받고, 간이 제 역할을 못해도 온 몸이 고통을 받고, 뼈가 제 역할을 못해도 온 몸이 고통을 받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신체 조직 하나하나가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고, 제각각 자기 역할을 다 해야만 비로소 몸이 평안합니다. 이것이 화평입니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하나 열심히 성실하게 산다고 해서 삶이 화평할 수는 없습니다. 내 삶이 화평하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이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사람과 동물이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동물과 식물이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태양과 지구와 달이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산과 바다가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바람과 꽃과 나비가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실로 삼라만상이 다 연결되어 있어야 길가의 코스모스가 화평할 있고, 갯벌의 망둥어가 화평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이 화평할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태양이 화평해야 내 삶이 화평할 수 있고, 지구가 화평해야 내 삶이 화평할 수 있고, 산 바다 강 대기가 화평해야 내 삶이 화평할 수 있고, 닭이 화평해야 내 삶이 화평할 수 있고, 네가 화평해야 내 삶이 화평할 수 있습니다. 화평이란 이런 거예요. 모든 관계의 그물망이 정상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찾아오는 삶의 안정됨(온전함)이 바로 삶의 화평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세계, 화평의 질서가 충만한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화평의 질서로 충만했던 이 세계가 깡그리 파괴됐습니다. 비가시적 세계인 하늘과 가시적 세계인 땅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 형제와 형제의 관계도 형편없이 망가졌습니다. 사람과 땅의 관계도 험악해졌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관계, 동물과 동물의 관계, 사람과 식물의 관계, 식물과 식물의 관계, 지구와 태양의 관계, 지구와 달의 관계도 많이 헝클어졌습니다.

그래서 만물이 고통하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사람만 신음하는 게 아닙니다. 지구도 신음하고, 강도 신음하고, 대기도 신음하고, 호랑이도 신음하고, 고래도 신음하고, 닭도 신음하고, 소와 돼지도 신음하고, 나무도 신음하고, 꽃도 신음하고, 콩나물도 신음하고, 복숭아와 사과도 신음하고 있습니다. 정말 무엇 하나 맘 놓고 평안하게 사는 게 없어요. 먹고 먹히는 적자생존의 정글에서 잡아먹힐세라 쉼 없이 경계하며 초조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날마다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롬8:22).

하나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이 세상 너머에 계시니까 태평하실 거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세상처럼 신음하십니다. 아니, 하나님이 가장 깊이 신음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또 만물의 고통을 깊이 체감하시기 때문에 만물보다도 훨씬 깊이 신음하십니다.

 

자, 왜 이렇게 된 걸까요? 화평의 질서로 아름다웠던 세계가 왜 이토록 불화가 가득한 세상이 된 걸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세계는 본래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이었지 않습니까? 화평으로 충만한 세계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불화가 가득한 세상이 된 걸까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만드신 분이 그분인데 세상을 만드신 분과의 관계가 어긋나니까 세상 전체의 관계 또한 어긋나서 그렇게 된 겁니다.

사실 하나님과 아담(사람)의 관계는 모든 관계의 시작입니다. 옷으로 비유하자면 첫 단추와 같습니다. 우리가 옷을 입을 때 첫 단추를 잘 끼워야 옷매무새가 정상이 되지 잘못 끼우면 다른 단추도 다 잘못 끼우게 되고 옷매무새도 엉망이 됩니다. 멋지고 균형 잡힌 옷이 이상하고 형편없는 옷이 됩니다. 세상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옷의 첫 단추와 같아서 이 관계가 어긋나면 다른 관계도 연달아 어긋나게 되어 있고, 온 세상 또한 엉망진창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관계가 어긋났습니다. 첫 단추와 같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어긋났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뱀의 말을 들은 겁니다. 이것은 행동으로써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깃장을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불화로 가득하게 된 겁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아담에게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라고 알아듣게 설명했습니다(창2:17).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가 끊어지면 화평의 세계가 박살난다는 뜻이거든요. 모든 관계가 어긋나서 세계의 샬롬(에이레네)이 깨어지고, 삶의 평강이 깨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충분히 설명했어요. 그런데 아담이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화평의 질서를 깨뜨렸습니다. 그 결과 세계의 샬롬(에이레네)이 깨어지고, 삶의 평강이 깨어진 거예요. 남자가 노동하는 것과 여자가 해산하는 것이 극심한 고통이 된 겁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서로 손가락질하면서 서로를 욕망하고 지배하는 관계로 일그러지게 된 겁니다. 형제의 관계도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인데서 드러나듯 폭력적으로 변해버린 겁니다.

인류의 역사도 보십시오. 인류의 역사라는 게 한 마디로 전쟁과 폭력과 배반의 역사였지 않습니까. 툭하면 돌아서고, 툭하면 속이고, 툭하면 싸우고, 툭하면 죽이는 전쟁과 폭력과 배반의 역사였습니다. 인간은 정말 수많은 이유로 전쟁을 했습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면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전쟁을 일삼았습니다. 어디 전쟁만 했나요. 같은 종족을 노예로 부리고, 온갖 억압과 폭력을 행하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악한 짖은 다 했습니다. 지금도 같은 종족을 대량으로 살상하기 위해 최첨단 과학기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같은 종족을 살상하기 위해 무기를 수출하고 수입하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정말 미친 짓입니다. 미쳐도 보통 미친 짓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오늘도 이 미친 짓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아예 소시민의 삶까지도 다 전쟁입니다. 지금 모든 사람은 경쟁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더 많은 돈을 버는가,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가, 누구의 몸값이 더 비싼가, 누가 더 높은 점수를 얻는가, 누가 더 빠른가, 누가 더 유명한가, 누가 더 고급 제품을 쓰는가, 누가 더 멋진가, 이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아예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엄마에 의해 경쟁에 뛰어들고, 죽는 순간까지 경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삶 전체가 그야말로 피 말리는 경쟁의 연속입니다. 경쟁, 경쟁, 경쟁, 경쟁이 삶의 현실이 됐습니다. 삶이 경쟁이고, 경쟁이 삶인 세상이 됐습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영원한 승자란 없습니다. 순간의 승자는 더러 있겠지만 그 승자도 결국은 패배자로 추락하고야 맙니다. 모든 것이 경쟁체제인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어요. 모든 인간이 패배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살면 살수록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패배자만 양산하는 사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사회 시스템을 바꾸지 못한 채 그 시스템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이 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 이 시스템을 인정하고 거기서라도 잠깐의 승자가 되어보자며 각자도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다 관계가 어긋났기 때문에 빚어진 재앙입니다. 특히 옷의 첫 단추와 같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어긋났기 때문에 빚어진 재앙입니다. 자, 이 재앙을 어찌해야할까요? 어떻게 해야 이 재앙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화평의 세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다른 묘안이 없습니다. 완전히 어긋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복원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나서 이렇게 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물론 다른 관계도 정상화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 나와 너의 관계, 국가와 국가의 관계, 사람과 자연의 관계도 정상화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지 않으면 그런 관계가 정상화될 수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돼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관계가 정상화될 수 있습니다. 우주만물의 네트워크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일을 했습니다. 성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어 화목제물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하심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복원시켰습니다. 어긋났던 관계를 다시 복원시키고, 뒤틀렸던 관계를 다시 정상화함으로써 화평의 세계로 가는 길을 활짝 열었습니다. 화평으로 충만한 세상, 모두가 승자가 되는 세상, 모두가 평강을 누리는 세상, 서로 사랑하고 상부상조하는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하고 감사하며 사는 세상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열었습니다.

사실 이 일은 오래 전부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했던 것이고(창3:15),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도 거듭거듭 말씀했던 것입니다.

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했습니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하지 못하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네게 노하지 아니하며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54:9-10)

또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했습니다.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지라.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 그들이 알겠고, 그들이 다시는 이방의 노략거리가 되지 아니하며 땅의 짐승들에게 잡아먹히지도 아니하고 평안히 거주하리니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겔34:25-28)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게 세워서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들 가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겔37:25-28)

 

이 화평의 언약은 완벽하게 실행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의 언약을 온전히 이루었습니다(골1:20). 그래서 누가는 예수님의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행10:36).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라고 했습니다(엡2:14). 로마서에서는 아주 담대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화평의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으니 믿음으로 나아가 그 화평을 누리자는 겁니다. 하나님이 막혔던 관계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으니 마음껏 하나님과 소통하자는 겁니다.

옳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것이 화평의 세계로 나아가는 출발입니다. 모든 화평은 하나님과의 화평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물론 하나님과 화평하다고 해서 모든 화평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하나 관계가 회복되면서 화평의 길로 나아가게 돼 있습니다.

 

실제로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신뢰하는 자, 하나님이 세상보다 크신 분임을 고백하는 자, 하나님 안에 세상이 있고, 하나님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깊이 믿는 자는 절대로 세상이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돈으로도 넘어뜨리지 못하고, 권세로도 넘어뜨리지 못하고, 어떤 유혹으로도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 앞에서 겁먹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보다 크신 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세상 앞에서 겁먹지 않아요. 어떤 고난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아요. 아무리 험한 세파가 밀려와도 흔들리지 않아요.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냅니다. 항상 담담하고 평안합니다. 심령에도 ‘에이레네’(평강)가 넘치고, 삶에도 ‘에이레네’가 넘칩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기 때문입니다.’(시23)

바울은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압송되어 갈 때 유라굴로라는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때에 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떨었습니다. 항해 경험이 많은 선원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고, 배와 화물을 소유한 선주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항해 전문가도 아니었고, 배를 소유한 선주도 아니었고, 많은 화물을 싣고 가는 무역상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호송 중인 죄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거센 풍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심히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5)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폭풍보다 크신 분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폭풍보다 크신 하나님을 깊이 신뢰했기 때문에 바울은 풍랑 가운데서도 화평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화평은 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권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명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인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화평은 하나님이 나의 구원자시고, 나의 목자임을 깊이 신뢰하는데서 나옵니다. 하나님과 화평에서 나옵니다.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1:7)이라고 말합니다. 화평도 그렇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화평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높이는 것,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에 모시고 따르는 것이 화평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이것을 방해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하나님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모시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잘 아시는 대로 오늘 이 시대는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시대입니다. 백화점에 가서 상품을 선택하고 구매하듯이 종교도 자기 맘에 드는 것을 선택하고 구매하는 시대입니다. 예수를 선택할 수도 있고, 마호메트를 선택할 수도 있고, 부처를 선택할 수도 있고, 공자를 선택할 수도 있고, 신흥종교를 선택할 수도 있고,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시대입니다.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하면 다 비웃습니다. 하나님도 오직 한 분이라고 말하면 다 비웃어요. 하나님을 많은 신들 중의 1/n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은 없을 수도 있고, 혹시 있다 해도 하나님은 많은 신(神) 중의 한 분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떨까요? 그리스도인도 이런 시대의 영향을 음으로 양으로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올곧게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에 모시지 않습니다. 삶의 한 부분에 적당히 모시고 적당히 대우해가며 삽니다. 하나님도 절대화하지 않고, 예배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예배 한 번 안 드린다고 인생 망하는 것 아니니까 몸이 찌뿌둥하거나 마음이 꿀꿀하면 예배 안 드리고 건너뜁니다. 주일예배를 고집하는 것은 율법에 매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모시지는 않아요. 시대가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절대를 부정하니까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경외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삶의 화평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불안해하고 불화하고 요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에 휩쓸리고, 소비문화에 휩쓸리고, 경쟁에 휩쓸리고, 개인주의에 휩쓸리고, 상대주의에 휩쓸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모시지 않으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대부분 시늉만 하고 있으니까 화평이 없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만일 내 삶이 화평하지 못하다면 이유는 명백합니다. 하나님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모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시늉만 하고 있기 때문에 화평이 없는 거예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렇습니다. 시대 속에서 시대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경외하는 시늉만 하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경외하지는 않습니다. 세상 앞에서, 치열한 경쟁 앞에서 하나님은 항상 뒤로 밀립니다. 하나님의 뜻이 거의 무시됩니다. 시대가 그렇고, 그런 시대의 영향 아래에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이 시대는 도무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기만 하지 하나님을 경외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시대에 감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십시오. 시늉만 하지 말고 진실로 경외하십시오. 그러면 정녕 화평이 임할 것입니다.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화평이 임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령의 열매 중에서 사랑 ‧ 희락 ‧ 화평을 살펴봤습니다. 사랑 ‧ 희락 ‧ 화평, 이 세 가지는 가장 빛나는 삶의 보석입니다. 삶에는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만 사랑 ‧ 희락 ‧ 화평보다 더 삶을 빛나게 하고, 삶을 아름답게 하고, 삶을 충만하게 하고, 삶을 창조적이게 하고, 삶을 부요하게 하고, 삶을 복되게 하고, 삶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사랑 ‧ 희락 ‧ 화평은 정말 보석 중의 보석입니다. 이 보석은 세상에 없습니다. 이 보석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는 자에게만 이 보석이 주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