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온갖 비리와 폭력, 거짓과 술수가 난무합니다. 요 며칠은 청소년들의 잇단 폭력이 도를 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탄식하고 있고, 북한의 김정은이 쏘아대는 미사일로 인해 세계가 시끄럽습니다. 헬 조선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일은 한 마디로 전쟁입니다. 끝없는 생존경쟁입니다. 어린 아이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생존경쟁이라는 치열한 전쟁을 치르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들 바쁘고 부산하고 시끄럽고 복잡하고 사납고 무례하고 무대뽀입니다. 옆 사람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니까 너는 너고, 나는 나라고 딱 선을 긋고 전쟁하듯 살아갑니다. 서바이벌 게임을 하듯, 한계상황을 버텨내듯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헬 조선이라는 현실 한 가운데서 생존경쟁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희락(기쁨)이 없습니다. 희락이 성령의 열매라는 건 알지만 그런 열매에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승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비그리스도인보다 더 열심히, 더 경쟁적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인의 승리에 있지 않은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승리하자고 난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돈과 성공을 거머쥐는데 있지 않은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돈과 성공을 거머쥐자고 난리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승리도 아니고 부와 성공도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희락(기쁨)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던 어느 날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권면을 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그러니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15:5,9) 이렇게 간곡히 권면하시고는 그렇게 권면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제자들의 기쁨을 위해서 자기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제자들이 기쁨을 얻는 길은 오직 자기 사랑 안에 거하는 것밖에 없다는 걸 아시고, 자기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한 거였습니다.
요한복음 16장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는 것 때문에 제자들이 근심할 때 예수님이 이렇게 위로합니다. ‘내가 지금 떠난다고 해서 영 떠나는 건 아니다. 나는 분명히 다시 온다. 사실은 내가 다시 오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볼 것이다. 그러면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다. 아니,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을 것이다.’(요16:6-7,20-22) 여기서도 예수님이 제시하는 건 기쁨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가져오는 최고의 선물은 기쁨이라는 겁니다. 물론 영생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기쁨을 말했습니다.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이 제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가져온 아주 존귀한 선물이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왜 기쁨을 가져왔을까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한 삶이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디자인했습니다. 삶이 기쁨이 되도록, 기쁨이 삶이 되도록 디자인했습니다. 그래서 기쁨을 가져온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디자인한 삶을 가져온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기쁨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쁨이란 무엇일까요? 흥이 넘치는 것이 기쁨일까요? 항상 밝고 유쾌한 것이 기쁨일까요? 매사에 낙천적인 것이 기쁨일까요? 소소한 일에도 재미를 느끼는 것이 기쁨일까요?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기쁨의 요소 중 하나일 수는 있지만 기쁨의 본질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지만 사랑이 하나님은 아닌 것처럼, 기쁨은 밝고 유쾌한 것이지만 밝고 유쾌한 것이 기쁨은 아닙니다. 밝고 유쾌한데 기쁨이 없을 수 있어요. 흥은 넘치는데 기쁨이 없을 수 있어요. 기쁨은 타고난 성향이나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쁨은 타고난 성향이나 기질에서 나오는 흥이나 밝음이나 유쾌함 같은 것과는 달라요.
기쁨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발견할 때,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을 때 우러나오는 감사와 감격의 정서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이유가 나옵니다. 양을 치는 목자가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목자는 그 양을 찾기 위해 온 산과 들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천신만고 끝에 잃은 양을 찾았습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는 너무 기뻐서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가서 벗들을 불러 즐기자고 소리칩니다. 바로 이것이 기쁨입니다.
어떤 여자가 드라크마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여자는 노심초사하며 등불을 켜고 집안을 다 뒤지고 쓸며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자 벗과 이웃을 불러 나와 함께 즐기자고 환호성을 지릅니다. 바로 이것이 기쁨입니다.
두 아들이 있는데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갔습니다. 그 순간부터 아버지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집 나간 아들 걱정에 애간장을 태웁니다. 날이면 날마다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동네 어귀를 바라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허랑방탕한 세월을 보내던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발견한 아버지는 너무 좋아서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좋은 신발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는 흥겨운 잔치를 벌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쁨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발견했을 때, 잃어버린 것을 되찾았을 때 우러나오는 감사와 감격의 정서가 기쁨입니다.
물론 이것이 기쁨의 전부는 아닙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았을 때 우러나오는 기쁨은 기쁨의 출발일 뿐입니다. 이 기쁨은 더 온전해져야 합니다. 더 깊어지고 확장돼야 합니다. 그러나 우선은 기쁨의 출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실로 많은 것을 받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가족부터 하늘과 땅, 산과 들, 강과 바다,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 태양과 달, 수많은 별들까지 실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들을 받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하고 값진 것은 다 잃어버렸습니다. 진짜 생명을 잃어버렸고, 창조주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진리, 빛, 자유, 사랑, 하나님나라, 등 진짜 소중한 것들은 다 잃어버렸습니다. 진짜는 다 잃어버린 채 껍데기만 붙잡고 아등바등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쁨이 없는 겁니다. 진짜를 잃어버린 채 껍데기만 붙잡고 아등바등 살고 있기 때문에 부자가 돼도 기쁨이 없고, 성공을 해도 기쁨이 없고, 욕망을 채워도 기쁨이 없는 겁니다. 물론 때때로 즐거운 일도 있고, 재미난 일도 있고, 오감을 자극하는 일도 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더 재미있고 더 짜릿한 즐거움을 찾고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기쁨은 없습니다. 기쁨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을 때에만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잃어버린 생명, 삶, 하나님, 진리, 빛, 자유, 사랑, 하나님나라, 등등을 되찾지 않는 한 기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아야만 기쁨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시면서 제자들의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고 말씀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이 그동안 보지 못한 것들, 잃어버린 것들을 보게 할 것이고, 되찾게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기쁨이 충만할 것이기 때문에 너희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고 말씀한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구원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즉 생명, 삶, 하나님, 진리, 빛, 자유, 사랑, 하나님나라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게 하고 그것들과 함께 살게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 세상과 전혀 다른 신비한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게 구원이 아니고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보게 하고 되찾게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결국 기쁨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데서 오는 감격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데서 오는 감격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기쁨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기쁨이 없거나 메마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부족해서일까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아서일까요? 기도하지 않아서일까요? 우리는 백날 이거밖에 말할 줄을 모릅니다. 어떤 일이 터져도 믿음이 부족해서,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아서, 기도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만 말합니다. 정말 가난합니다. 생각이 너무너무 가난해요. 맨 날 이거밖에 말할 줄 모르는 한국교회를 보면 심히 안타깝습니다.
이제는 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이야기를 합시다. 그리스도인 안에 왜 기쁨이 없는 걸까요? 그것을 이해하려면 구원이 무엇인지를 다시 곱씹어봐야 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구원을 찬찬히 곱씹어보지 않습니다. 단지 구원받았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또 확인할 뿐입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대단한 축복을 받았다며 기뻐할 뿐입니다. 이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조그만 어려움이 있어도 기쁨이 시들해지고,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여 가면 시간과 함께 점차 시들해집니다. 그러지 않으려면 구원을 곱씹어야 합니다. 제가 설교할 때마다 구원이 뭔지를 묻고, 구원을 다양하게 설명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오늘 또 묻겠습니다. 여러분, 구원이 뭡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눈으로 만물과 만사를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 눈(세상에서 듣고 배우고 익히고 경험한 내 눈)으로 만물과 만사를 바라보며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눈으로 만물과 만사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으로 만물과 만사를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세계를 근원 시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며 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좀 더 구체화된 구원 이해예요.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것이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이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만물과 만사를 바라보고 해석하며 사는 것입니다. 세계에 대한 근원 시각을 회복하는 것, 세계에 대한 근원 시각에 눈 뜨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으면 세계에 대한 근원 시각이 열려요. 아니, 세계에 대한 근원 시각이 열리는 것이 구원이에요. 하나님이 눈에 들어오고, 하나님의 사랑이 눈에 들어오고, 만물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가 눈에 들어오고, 지금 여기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들어오고, 온 세상에 충만한 신비와 장엄함이 눈에 들어오고, 진리가 눈에 들어오고, 내가 눈에 들어오고, 역사가 눈에 들어오고, 태양과 달이 눈에 들어오고, 꽃과 나비와 새들이 눈에 들어오고, 온갖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리고 온갖 것들이 눈에 들어오면, 그동안 잠자고 있던 감각이 깨어납니다. 자아에 갇혀 있고, 욕망에 갇혀 있던 감각이 깨어납니다. 사물에 대한 감각이 깨어나고, 몸의 감각이 깨어나고, 생각하는 지성의 감각이 깨어나고, 슬픔에 대한 감각이 깨어나고, 죄에 대한 감각이 깨어나고, 타인에 대한 감각이 깨어나고, 진리에 대한 감각이 깨어나고,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깨어나고, 영적인 감각이 깨어납니다. 바로 이것이 기쁨입니다. 근원 시각으로 만물과 만사를 바라볼 때 솟구치는 내적 감각,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신뢰하는 데서 오는 정서적 반응,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별견하고 선물 받은 자로서 삶을 대하는 근원 정서가 기쁨입니다.
바울이 옥중에 갇혀 매를 맞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또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과 현실을 바라보는 근원 시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 안에 기쁨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믿음이 없어서입니까?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아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근원 시각(하나님의 시각)을 갖지 못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왜 근원 시각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그 작업이 힘겹기 때문입니다. 근원 시각은 하루아침에 열리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루아침에 받지만 근원 시각은 하루아침에 열리지 않아요. 근원 시각이 열리려면 자기 시각에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뀌어야 되고, 부분을 보던 것에서 전체를 보는 것으로 시각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간다고 해서 절로 바뀌지도 않습니다. 그저 끊임없이 시각 교정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 작업이 매우 힘들지만 어쩔 수 없어요. 해야 합니다. 그래야 조금씩 시각이 교정됩니다. 시각이 교정돼야 행동이 변화되고, 시각이 교정돼야 삶이 변화되고, 시각이 교정돼야 정서가 변화됩니다.
신앙생활이란 한 마디로 시각 교정 작업의 연속입니다. 시각 교정 작업을 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헛바퀴 도는 거예요. 다람쥐 쳇바퀴 도는 거예요. 백날 해봐야 아무런 진전이 없어요. 시각 교정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깊어지고 구체화됩니다. 그런데 이 작업을 안 합니다. 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목회자도 이 작업을 안 해요. 힘들어서도 안 하고, 그런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도 안 합니다. 대부분은 신학교에서 배운 알량한 지식 가지고 평생을 우려먹든지, 아니면 남의 설교 카피하든지 하면서 같은 래퍼토리를 반복합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같은 이야기를 상투적으로 반복해요. 이처럼 시각 교정 작업을 안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감각이 깨어나지 않는 것이고,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어났던 감각조차도 교회 안에서 시들시들해지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쉼 없이 시각 교정을 작업을 해야 하는데, 나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부분만 보는 시각에서 전체를 보는 시각으로 시각 교정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 작업을 안 하니까 기쁨의 샘이 고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을 잃어버린 첫 번째 원인입니다.
두 번째 원인은 이 세상 문화의 영향 때문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욕망을 자극하고 욕망을 극대화하는 문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눈과 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영상과 광고인데 이것이 우리의 욕망을 쉬지 않고 자극합니다. 이 자동차를 타라, 이 옷을 입으라, 이 제품을 구매해라, 우리 회사 제품을 사용해라, 그러면 당신은 성공한 사람이요 매력 있는 사람이요 1%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끝없이 유혹하면서 소비 욕망을 자극하고, 성공 욕망을 부추기고, 돈에 대한 욕망을 조작합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아이건 노인이건 욕망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눈앞의 소비 욕망만 커졌지 다른 감각은 다 죽었어요. 한 마디로 인간이 욕망을 좇는 기계가 됐습니다. 소비가 존재를 규정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인간을 그 사람이 소비하는 상품으로 규정하는 참으로 굴욕적인 시대가 됐습니다. 더욱이 현대인은 끝없이 비교당하며 삽니다. 영상에 나오는 호화판 생활과 후줄근하기 이를 데 없는 자기 생활을 비교당하며 살고, 영상에 나오는 스타의 모습과 자기 모습을 비교당하며 삽니다. 끝없이 비교당하면서 열패감에 사로잡혀 씩씩거립니다.
그리스도인도 이런 세상 문화에 노출되어 삽니다. 성경 읽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시간보다 영상과 광고에 노출되는 시간이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습니다. 한 마디로 세상의 문화가 그리스도인 안에 스멀스멀 들어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와요. 은근슬쩍 들어와서 그리스도인을 지배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세상 문화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아니, 교회가 앞장서서 욕망을 부추겼습니다. 소비 욕망, 성공 욕망, 소유 욕망을 부추겼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 안에 기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예 없거나 있어도 고갈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아주 간곡히 권면했습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예, 그리스도인은 기쁨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가난해도 괜찮아요. 못생기고 못났어도 괜찮아요. 성공하지 못했어도 괜찮아요. 그러나 기쁨은 꼭 있어야 합니다.
이 기쁨은 하늘에서 부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이 마술을 부려서 기쁨을 생산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는 작업을 합니다. 근원 시각을 회복시키는 작업을 합니다. 세계의 근원 진실을 열어 보게 하는 작업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맺는 열매가 기쁨입니다. 우리도 성령이 하는 그 작업에 동참해야 합니다. 내 시각에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부분만 보던 시각에서 전체를 보는 시각으로, 세상 문화를 좇는 시각에서 하나님나라를 좇는 시각으로 교정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더디고 힘겹지만 포기하지 않고 이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잠자던 감각이 깨어날 수 있고, 잠자던 감각이 깨어나야 기쁨의 샘이 넘칠 수 있습니다. 시각 교정 작업을 해야 구체적으로 구원을 살 수 있고,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살 수 있고, 그래야만 비로소 기쁨의 샘이 넘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령과 함께 시각 교정하는 작업을 하시기 바랍니다. ‘나, 그냥 하나님만 믿을래’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냥 하나님만 믿는 것은 상투적으로 믿는 것이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하나님만 믿었기 때문에, 상투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형편없이 망가진 겁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렵지만 성령과 함께 시각 교정 작업을 꾸준히 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세상과 삶에 대한 근원 시각을 갖게 될 것이고, 온갖 감각이 깨어날 것이고, 기쁨의 샘이 터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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