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성령4- 사랑, 최고의 존재 양식 (요한일서4:7-11)

새벽지기1 2017. 8. 28. 08:53


그동안 성령의 오심을 임마누엘이라는 측면에서, 또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라는 측면에서 거시적으로 살펴봤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봤습니다. 오늘부터는 성령께서 일으키는 내적인 변화의 열매가 어떤 것인지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일으키는 내적인 변화의 열매를 성령의 열매라고 했습니다(갈5:22-23). 그런데 바울이 성령의 열매라고 했다고 해서 꼭 성령이 맺는 열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이 혼자 맺는 열매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반복해서 말씀드렸다시피 성령은 예수를 보게 합니다. 또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그 결과 맺는 열매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열매는 성령만의 열매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삼위 하나님의 열매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내적인 변화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입니다. 그렇지만 그 아홉 가지만이 성령의 열매라고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그 9가지 외에도 성령의 열매는 많이 있습니다. 감사, 용기, 지혜, 분별력, 겸손, 창조력, 자유, 이런 것도 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곰곰이 따져 보면 성령의 열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또 성령의 ‘열매’라고 하니까 사과나 배나 감처럼 눈에 보이는 무엇이라고, 외적으로 드러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거라고 내놓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성령의 열매를 보십시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어느 것 하나도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사랑도 손으로 잡을 수 없고, 희락도 손으로 잡을 수 없어요. ‘이것이 화평이다, 이것이 자비다’ 하고 내놓을 수 없어요. 사과와 비교해봅시다. 사과는 내 밖에 있습니다. 내 밖에 있는 객체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내 밖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은 내 안에 있어요. 사랑은 내 밖에서 객체로 존재하지 않고 나라고 하는 주체 안에 있습니다. 나라는 주체 안에 있으면서 일상을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태도나 방식 속에 묻어날 뿐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사랑이 녹아 있고, 옆에 있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 속에 사랑이 숨어 있습니다. 사랑이 ‘나 여기 있다’고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요. 수많은 삶의 양식과 관계 속에 녹아 있고 숨어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인격에 속한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았던 존재의 방식과 삶의 방식이 곧 성령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 예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 성령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 곧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첫 번째로 꼽힌 사랑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이 성령의 열매를 꼽으면서 첫 번째 열매로 사랑을 꼽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4:16).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최고의 특성을 전지전능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특성, 최고의 성품은 사랑과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이고, 자유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여기서 잠간 생각하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왜 세상을 창조했을까요? 굳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아도 되는데, 세상을 창조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세상을 창조했을까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한 것이고, 지금까지 수억 년의 세월동안 세상과 함께 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안으로 굽지 않는 성향이 있습니다. 자기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사랑은 밖으로 퍼집니다. 자기 안에 갇히지 않고 자기를 넘어 타자를 향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넘어 타자를 향하는 이 사랑이 세상을 창조하도록 이끈 것입니다. 자기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니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타자를 향하는 성향이 있으니까,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사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한 것입니다.

결국 만물은 사랑 때문에 창조되었고, 사랑으로 창조되었고, 사랑을 위해 창조됐습니다. 그리고 만물이 사랑 때문에 창조되었고, 사랑으로 창조되었고, 사랑을 위해 창조됐기 때문에 우주만물이 하나같이 사랑을 원하고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사람만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닙니다. 동물도 사랑을 필요로 하고, 식물도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면 동물도 사나워지고, 식물도 메말라 죽어요. 심지어 물도 사랑한다, 고맙다, 좋다고 말해줘야 아름다운 결정체를 이루지 미워한다, 증오한다, 나쁘다고 말하면 아주 흉측한 결정체를 이룬다고 합니다(물은 답을 알고 있다).

 

인간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아주 예민하고 섬세합니다만 그중에서도 사랑에 가장 민감합니다. 인간의 최고 관심사 역시 단연 사랑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돈에 관심이 많습니다만 아무리 돈에 관심이 많다고 해도 사랑에 대한 관심을 능가하지는 못합니다. 인간의 모든 이야기를 보십시오. 모든 것이 사랑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빠진 이야기는 앙꼬 없는 찐빵과 같아서 아무런 재미나 감동이 없습니다. 사랑이 들어가야 소설도 재미있고, 영화도 재미있고, 연극도 재미있고, 노래도 재미있습니다.

또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을 때 살아갈 힘이 생기고 삶의 의미가 살아납니다. 제 가까운 후배 중에 한 사람이 오래 전에 이혼했습니다. 딸이 하나 있는데 딸과도 떨어졌어요. 이혼하기 전에는 자주 만났는데 이혼 후부터는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지인을 통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후배가 하는 말이 ‘살아야 될 아무런 이유나 의미가 없다.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사는 날이 허다하다’고 했답니다. 후배 소식을 듣고는 참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그리고 이해가 됐습니다. 사람이란 그런 존재이니까, 아무리 돈이 많고 지위가 높아도 사랑할 대상이 없고 사랑받을 대상이 없으면 살아가는 낙이 없고, 살아야 할 이유나 의미가 없는 법이니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 사랑이 뭘까요? 사랑이 뭐기에 다들 사랑에 울고, 사랑에 웃는 것일까요? 사랑이 뭐기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랑 타령을 하는 것일까요? 마음에 드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사랑일까요? 호감을 갖는 것이 사랑일까요? 매력에 사로잡히는 것이 사랑일까요? 취향이 비슷한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 사랑일까요? 욕망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사랑일까요? 무조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사랑일까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 사랑일까요? 하늘에서 별을 따 달라 하면, 별을 따주는 것이 사랑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런 걸 사랑이라 생각하고, 이런 사랑에 울고 웃고 별별 짓을 다 하는데 이런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물론 완전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 속에는 이런 사랑이 작동하고 있고, 이런 사랑 때문에 울고 웃는 것이 사실이니까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대부분 이런 것들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은 이런 사랑을 ‘에로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에로스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상대방을 수단으로 대하지 않고 목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 최고의 도덕이라고 했는데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것’은 최고의 도덕이기 이전에 최고의 사랑입니다. 서울여자대학교 장경철 교수도 사랑을 꽤 독특하게 정의했습니다. “사랑이란, 내 삶의 경계를 넘어서 내게 찾아온 상대방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임으로써 상대방에게 가치를 두는 행위입니다.”(성품, 21쪽) 말은 좀 다르지만 내용은 같은 이야기입니다. 상대방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 성경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랑은 다 이런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가를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좋아하실까요? 우리의 매력에 푹 빠지실까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실까요? 우리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시중을 들어주실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목적으로 대하실 뿐입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세요. 그리고 이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아니, 이것만이 사랑입니다. 상대방을 위해 온갖 헌신을 다 한다 하더라도, 상대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하더라도, 상대를 수단으로 대하는 한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목적으로 대할 때에만 비로소 사랑입니다. 개에 대해서도 똑같아요. 요즘 개를 예뻐하다가 병들고 늙으면 버리는 사람들이 꽤 있나본데, 그것은 개를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지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개를 이용하는 것이지 사랑하는 건 아닙니다. 개를 목적으로 대하는 것만이 진정으로 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상대방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랑해야 할 어떤 이유나 조건을 덧붙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랑을 위해 사랑하는 것만이 참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옳습니다.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어서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을 위해,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것만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입니다.


더욱이 사람은 하나의 개인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격적 존재입니다. 아니, 사람은 곧 인격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가 불가능한 독특한 인격입니다. 물론 사람의 몸은 땅에서 비롯됐습니다. 정신의 뿌리인 뇌도 물질에서 비롯됐습니다. 마음도 세상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많고, 지식도 세상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인격은 세상에서 비롯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출신 철학자 베르쟈예프는 “인격은 자연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노예냐 자유냐. 27쪽). “인격은 우주의 일부가 아니고 오히려 우주가 인격의 일부이며 인격의 질이다”(28쪽), “인격은 법칙에 예속되지 않는다”(30쪽)고 말했습니다. 예, 인격은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인격의 뿌리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인격(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인격입니다. 사람은 인격입니다. 이 인격은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수단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인격만큼은 수단이 될 수 없어요. 인격을 수단으로 대하는 것은 인격에 대한 모독이고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인격은 오로지 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 인격에 대한 마땅한 태도입니다. 그리고 인격을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이 만물을 대하실 때 사랑의 방식으로 대하신다, 만물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신다는 말입니다.

 

결국 사랑은 자유로운 인격자 안에서 펼쳐지는 가장 고상하고 독특한 행위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인격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 방식이자 삶의 양태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구체적인 내용은 상대방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직 사랑의 방식으로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랑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 가장 인격적인 존재 방식이고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도 사랑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마22:40).

사랑을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우리가 원수를 좋아하기는 어렵고, 원수에게 매력을 느끼기도 어렵습니다. 사람은 제각각 취향이 달라서 받은 것도 없는데 괜히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준 것도 없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괜히 끌리는 대상이 있는가 하면, 특별한 이유 없이 끌리지 않는 대상이 있습니다. 옆에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찌할 수 없어요. 사람마다 취향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만나는 모든 사람을 좋아하거나, 만나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거나,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마음이 끌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만나는 모든 사람을 목적으로 대할 수는 있습니다. 호감이 가지 않아도, 내 맘에 들지 않아도, 매력을 느끼지 않아도, 철천지원수라도 목적으로 대할 수는 있어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얼마든지 목적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웃을 좋아하라고, 이웃에게 호감을 가지라고, 이웃이 원하는 바를 다 채워주라고 말씀하지 않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모든 이웃을 좋아하거나 모든 이웃이 원하는 바를 채워주는 건 불가능하지만 모든 이웃을 목적으로 대하는 건 가능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는 이 명령을 들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내 취향에 맞지 않아도, 호감이 가지 않아도 그를 존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를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고 최대한 존중하며 목적으로 대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내 맘에 들지 않고 내 취향과 다르다고 해서 무례하게 대하면 안 돼요. 선을 딱 그어놓고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밀어내면 안 돼요. 이것은 사람을 자기중심적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자기 취향에 맞는 물건은 옆에 두고 자기 취향에 맞지 않는 물건은 쓰레기통에 버리듯이 자기중심적으로 사람을 다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악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의 모든 죄악은 상대방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대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성폭력을 비롯한 모든 형태의 폭력, 살인, 거짓, 사기, 시기, 질투, 원망, 미움, 전쟁, 테러 등 모든 죄악이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데서 비롯돼요. 부부 간의 다툼이나 가족 간의 다툼까지도 깊이 추적해보면 상대방을 수단으로 여기는데서 비롯됩니다. 아끼고 염려하기 때문에 다투기도 합니다만, 마음 깊은 곳을 추적해보면 부부가 서로를 수단으로 여기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자식을 수단으로 여기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 가장 원초적인 죄악이고, 가장 궁극적인 죄악이고, 가장 보편적인 죄악입니다.

 

우리는 이 죄악을 넘어서야 합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이 체질화된 죄악, 뼛속 깊이 내성화된 이 죄악을 넘어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죄악을 넘어서게 하려고 예수를 보냈고 성령을 보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제일 먼저 하는 일도 바로 이 죄악을 넘어서게 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이 체질화된 죄악, 뼛속 깊이 내성화된 죄악을 넘어서게 하는 것, 다시 말하면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게 하는 것,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성령이 하는 첫 번째 일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열매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겁니다.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닌 겁니다. 사도 요한이 분명히 말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누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요일4:8,20)

그렇습니다. 사랑은 거역할 수 없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과 함께 하는 사람은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악한 습성에서 빠져나와 목적으로 대하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 안에서 저항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체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습성이 뼛속 깊이 내성화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의 열매가 쉽게 빨리 맺히지는 않습니다. 우리 안에서 수많은 갈등과 저항과 싸움이 일어나요. 하지만 성령의 압력이 끝내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엄청난 진통과 실패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 둘씩 사랑의 열매를 맺히게 합니다. 보기 좋고 탐스러운 열매까지는 못되더라도 좌우간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성령 안에 거하면, 정말 성령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성령 안에 거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싹틉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싹이 터요. 만나는 모든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은 최고로 아름답고 고상한 삶의 양식입니다. 사랑하는 삶이 가장 성공적인 삶이고, 가장 아름다운 삶이고, 가장 고상한 삶입니다. 사람이 최고로 아름답고 고상한 존재인 것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고, 진정 고상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사랑에 실패한 사람은 인생을 헛사는 겁니다. 사랑에 실패하면 모든 것에 실패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 삶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이 운명을 사랑하세요. 하나님이 내 삶의 울타리 안으로 들여보낸 사람들을 사랑하세요. 그들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세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