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성령2- 하나님의 구원경륜과 성령의 오심 (에베소서1:7-14)

새벽지기1 2017. 8. 15. 07:59


지난 주일 우리는 성령의 오심을 임마누엘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성령의 오심을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홀로 고고하신 분이 아닙니다. 세상을 초월해 홀로 존재하시는 절대타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현존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하십니다. 세상을 넘어서시고 세상보다 크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에 현존하십니다. 우주만물 가운데 현존하시면서 세상을 이끌어 가십니다. 세상은 단순한 물질 덩어리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거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하나님의 집입니다. 논리적으로는 모순이지만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하시면서 세상에 현존하시고, 세상에 현존하시면서 세상을 초월하십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5-6)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십니다. 만유 안에 갇혀 계시지 않고 만유 위에서 만유를 초월해 계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만유 가운데 계십니다. 만유를 떠나 홀로 계시지 않고 만유 가운데 만유와 함께 계십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

다윗이 고백한 대로 하나님은 한 순간도 세상 가운데 현존하지 않는 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매 순간 지속적으로 세상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루터도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신비를 깨닫고 다음과 같이 서술했습니다. “하나님의 장엄함이 너무 작아서 밀알 한 알 안에, 그 표면에, 그 위로, 그것을 통과해, 안과 밖에 충분히 현존한다. … 하나님의 장엄함은 너무 커서 이 세상이나 천 개의 세상이라도 능히 둘러쌀 수 없고, ‘보라, 여기 있도다’라고 말할 수 없다. …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은 어디에 의해서도 누구에 의해서도 둘러싸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감싸고 모든 것 안에 계신다.”(재인용. 엘리자베스 존슨.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267쪽)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우주만물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누구나 보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하나님은 세상 속에 현존하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현존은 아들 예수를 통해 좀 더 구체화되고 명확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현존은 눈에 보이는 구체적 현실이 됐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가난한 자들을 배불리 먹이고, 죄인을 용서하고, 유대교 체제에 갇혀 있던 하나님 말씀을 재해석하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당함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하게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방식으로 다스리는 게 아니라 사랑의 방식으로 다스린다는 것, 죄인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방식이 아니라 당신이 정죄당하고 심판당하는 방식으로 다스린다는 것, 하나님은 강한 분이 아니라 지극히 연약한 분이라는 것, 죄인의 손을 뿌리치는 분이 아니라 죄인에게 손을 내미는 분이라는 것, 죄인에게 돌을 맞고 죽임당하는 분이라는 것,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도 아파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이런 분이십니다. 특별할 것 없는 시골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마구간에서 태어나실 만큼 지극히 겸손하신 분이시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빌라도 총독에게 고난과 멸시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을 만큼 한없이 연약하신 분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돌려보내시고, 세리의 기도를 축복하신 참으로 자애로운 분입니다.

 

베드로는 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봤습니다. 요한이나 바울도 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봤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봤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14:9) 바울도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빌2:6). 그렇습니다. 예수는 육체를 가진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요지입니다.

이것을 뒤집으면 예수를 보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옳습니다. 예수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참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통하지 않은 하나님 인식은 다 부족한 인식일 수밖에 없고, 거짓되고 왜곡된 인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통해 보지 않은 하나님은 하나님 아닌 하나님입니다. 형이상학의 하나님,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 부동의 동자로서의 하나님, 전지전능한 절대자로서의 하나님, 이런 하나님은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거짓 하나님입니다. 오직 십자가에 죽은 예수만이 참 하나님이세요.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 땅에 왔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정확하게 충분히 보여줬습니다. 얼마나 정직하게 하나님의 진면목을 보여줬던지 하나님 말씀에 정통하다는 이스라엘 사람들,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비난과 정죄를 받았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정말 하나님을 보여줬을까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봄으로써 구원을 받고 진리에 이르는 것인데(딤전2:4) 과연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을까요? 안타깝게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일차적으로 모든 사람이 육체로 계신 예수님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몇몇 사람들, 예수님과 지리적으로 가까이 살던 소수의 사람들만 보았지 대부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거기다가 육체로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해서 다 하나님을 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따른 열두 제자들마저도 육체로 계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후에도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예수가 하나님의 본체이심을 충분히 알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제쳐두더라도 최소한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보았어야 하는데 제자들마저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복음에 전체가 말하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베드로가 자기를 부인할 것도 알았고, 십자가 죽음 앞에서 제자들이 다 흩어질 것도 알았습니다. 육체로 있는 자기를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 보기를 원하시지만 예수가 육체로 있는 한 모든 사람이 자기를 통해 하나님을 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도 알았습니다. 성령을 통해 이 문제를 극복할 것이라는 것, 자기의 책무는 십자가에 죽는 것까지이고, 자기가 죽으면 아버지께서 부활시킬 것이고, 부활 후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보혜사 성령을 보냄으로써 이 문제를 극복할 것이라는 것, 성령은 예수를 보게 하는 영이니까 성령이 오면 모든 사람이 자기를 볼 수 있게 될 것이고, 자기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 이것이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경륜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경륜을 꿰뚫어 알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죽는 것이 유익이라고 말했던 것이고,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을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피하지 않고 잠잠히 감당했던 것이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설교 서두에서 하나님은 세상에 현존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 안에 계시고, 만유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굳이 와야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 이미 하나님이 현존하시는데 왜 예수가 오고 왜 성령이 와야 하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이미 온 세상에 충만히 현존하시는데 왜 현존하는 세상에 예수를 보내고 성령을 보낸 것일까요? 그것은 만유 가운데 하나님이 현존하지 않는 곳이 딱 한 군데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만유 가운데 계시지만 인간의 마음에는 현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현존하기 싫어서이거나 현존하기를 거부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이 더러워서도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현존을 싫어하고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기 때문입니다(롬1:28).

 

인간은 만물 중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입니다. 세상 만물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현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존재는 그렇지 않아요. 인간에게는 마음이라는 게 있고, 이 마음에는 하나님이 맘대로 현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허락해야만 현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대단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현존까지도 거부하고 외면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이 거부하고 외면하면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하나님 맘대로 인간 속에 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NO’하면 하나님이 멈추세요. 하나님은 인간의 NO를 절대 뚫고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허락해야만 비로소 인간 안에 하나님이 현존하십니다. 이것이 인간의 위대함이고 마음의 독특함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인간의 NO를 뚫고 들어온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의 NO를 뚫고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이뿐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세상의 통치자로 높이 세웠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간에게 위임했어요. 정말 대단한 특권을 부여한 것이지요. 하나님은 인간을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위대하고 대단한 존재로 만드셨고 존중하십니다. 하나님은 정말 인간을 너무너무 존중하세요.

 

그런데 그렇게 존중받은 인간이 어떻게 했습니까? 보란 듯이 하나님의 현존을 외면하고 거부했습니다. 세상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몰아낼 수는 없지만 자기 마음에 현존하는 것은 거부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현존하지 못하도록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가 자기 마음의 왕이 됐습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됐습니다.

사실 인간의 마음은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처소거든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집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그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처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온 세상에 현존하는 것보다 인간의 마음에 현존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이 처소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현존해야 할 가장 중요한 처소가 마귀의 처소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이 마귀의 처소로 바뀌자 인간이 하는 모든 일 또한 마귀 짓이 됐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이 현존한다면 온 세상 또한 하나님의 세상이 되었을 텐데 인간의 마음에 마귀가 현존하기 때문에 온 세상 또한 마귀의 세상이 됐습니다. 어둠과 탐욕과 죽음이 왕 노릇하는 악한 세상이 됐습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 이야기가 말하는 것이 다 이 이야기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현존해야 할 가장 중요한 처소인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예수가 온 것이고 성령이 온 것입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이 현존하심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처소인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이 현존하지 않으니까 인간의 마음에 현존하기 위해서 예수가 온 것이고 성령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을 바꾸고 구원하는 유일무이한 길입니다.

세상을 바꾸고 구원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의 통치자로 세움 받은 인간을 구원해야 하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을 구원해야 하고, 인간의 마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이 현존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이 현존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온 세상이 마귀의 세상으로 추락했으니까 온 세상을 새롭게 구원하려면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이 현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이 현존할 수 있으려면 먼저 인간의 마음이 깨끗해져야 합니다. 죄를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가 먼저 와서 죄를 용서하고 깨끗이 씻는 일을 한 것이고, 그 후에 성령이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는 이 땅에 와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일(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깨끗이 씻는 일)을 했습니다. 또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라는 걸 존재와 삶으로, 말씀으로, 마지막에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만으로는 모든 사람이 예수를 볼 수도 없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성령이 와야 합니다. 오직 성령께서만 예수를 제대로 보게 하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하니까 예수를 보게 하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하려면 성령이 와야 했습니다. 또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기 위해서도 성령이 와야 했고, 우리를 새롭게 하고 하나님나라에 속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도 성령이 와야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입니다(엡1:9,3:2,9).

 

결국 성령의 오심은 하나님의 구원경륜에서 마지막 때에 해당하는 종말적 사건입니다. 예수의 오심도 종말적 사건이지만 성령의 오심은 종말 중에서도 종말에 해당하는 사건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영이 만민에게 부어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구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다.”(욜2:28-29) 오순절 성령 강림은 바로 이 예언이 성취된 사건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행2:17-18) 성령의 오심은 하나님의 구원경륜에서 마지막 때에 해당하는 종말적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경륜은 하나님의 임재 방식의 경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으로 임하셔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객관적인 구원을 성취했고, 성령 하나님으로 임하셔서 아들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성취한 구원을 개개인 안에 주관적으로 성취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게 하고(요14:26), 하나님을 알게 하고(고전2:10),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요16:13), 죄를 회개하게 하고, 서로 사랑하게 하고, 생명을 살게 함으로써 객관적으로 이루어진 구원을 각 사람 안에 구체화하고 현실화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 방식의 경륜이 곧 구원의 경륜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만 예수를 알 수 있고,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입니다(요17:3). 영생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떡고물 같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영생이고, 하나님의 생명을 함께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핵심은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것 하고 저것 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을 모시고 성령과 함께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