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성령8- 오래 참음, 신뢰에서 오는 견딤과 기다림 (로마서8:23-25)

새벽지기1 2017. 9. 25. 07:03


바울이 제시한 성령의 열매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성품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 내적인 성품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성격이나 기질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타고난 성품이나 타고난 성격의 문제가 아니에요. 성령의 열매인 사랑은 정이 많은 성격과 다릅니다. 성령의 열매인 기쁨은 명랑하고 유쾌한 성격과 다릅니다. 성령의 열매인 화평(평강)은 태평한 성격과 다릅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오래 참음 또한 끈질긴 성격과 다릅니다. 한국 사람은 대체로 은근(야단스럽지 아니하고 꾸준함)과 끈기(쉽게 단념하지 아니하고 끈질기게 견디어 나가는 기운)가 대단합니다. 아마 한국 사람처럼 은근과 끈기가 대단한 민족은 없을 겁니다. 한국 사람은 뭐든지 한 번 붙잡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끈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 참음은 끈기하고 다릅니다. 오래 참음은 어려운 상황을 견뎌내는 능력도 아닙니다. 억지로 참아내는 것도 아닙니다. 무조건 참고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관대한 것도 아닙니다. 오래 참음은 상대(약속)를 깊이 신뢰하는데서 오는 기다림이자 견딤입니다. 오래 참음은 기다림만도 아니고 견딤만도 아닙니다. 미래를 기다리면서 오늘을 견디고, 오늘을 견디면서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다윗을 보겠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양을 치고 있을 때 생각지 않게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의 골리앗을 쓰러뜨린 사건으로 사울 왕궁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사울 왕의 광기와 시기로 인해 핍박을 받습니다. 죽을 위기도 많이 겪고, 해외로 도피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는 중에 사울 왕을 죽일 절호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사울이 뒤를 보러 굴 속에 들어갔는데 마침 그 굴속에 다윗이 있었던 겁니다. 이것은 정말 하늘이 내린 기회였습니다. 다윗의 부하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부하들은 ‘오늘이 하나님이 허락한 바로 그 날이니 사울 왕을 죽이라’고 속삭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에게 살며시 다가가 겉옷 자락만 몰래 잘랐습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도 사울 왕을 죽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일렀습니다(삼상24:1-7).


여러분, 다윗은 왜 사울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왜 모른 척 지나쳤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여호와의 약속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왕으로 세우실 것이라는 것, 여호와의 기름 부으심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깊이 신뢰했기 때문에 성급하게 자기 손으로 사울 왕을 죽이는 죄를 범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핍박받는 도망자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데서 오는 견딤과 기다림이 바로 오래 참음입니다. 결국 오래 참음의 원동력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오래 참음은 본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말할 때마다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되뇌었습니다(민14:18, 느9:17, 시86:15, 103:8, 145:8, 욘4:2). 하나님이 모세에게 십계명 두 돌 판을 주실 때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는 여호와다. 나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지 않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벌할 것이라.”(출34:6-7).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의 양면을 모두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는 죄악을 벌하는 자다. 그러나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지만 벌하시고, 벌하시지만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지 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멸시할 정도입니다.


시편을 보십시오. 시편에는 탄원시가 많은데 10편이 대표적인 탄원시입니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 계십니까? 어찌하여 환난의 때에 숨어 계십니까?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합니다. 가련한 자들이 저들의 흉괴에 빠져 듭니다. 저들은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고 악담을 늘어놓으며 여호와를 배반하고 업신여깁니다(v.1-3). 저들이 가는 길은 언제나 형통하고 하나님의 심판은 높아서 저들에게 미치지 못합니다(v.6). 저들은 교만한 얼굴로 ‘여호와는 벌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없다.’고 큰 소리 칩니다.”(v.4). 저들은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라고 지껄입니다(v.6,11).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하게 하십니까?’(v.13).

 

예, 이것이 사실입니다. 악한 자들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해서 사람이 회개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오히려 그분의 넘치는 자비와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업신여긴단 말입니까?”(롬2:4)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의 자비와 오래 참으심을 보며 멸시합니다. 오늘도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오래 참으시니까 하나님은 없다고, 하나님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고 지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말씀합니다. “나는 내 이름을 위하여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너에 대한 분노를 참고 너를 멸망시키지 아니하리라.”(사48:9)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의 허를 찌르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멸시하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 분노를 오래 참는 것이야말로 여호와의 영예를 지키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말의 환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가운데 ‘깨어 있으라. 생각지 못한 때에 인자가 올 것이니 깨어있으라. 준비하고 있으라.’고 경계하시고는 악한 종의 비유를 말씀했습니다. “만일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이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24:48-51) 열 처녀 비유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열 처녀가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잤다고 했습니다(마25:5). 베드로도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기에 이르기까지 참고 또 참으십니다. 완고하고 게으르고 속히 빛으로 나오지 않는 우리를 참고 또 참으며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처럼 오래 참으시는 분임을 감사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오래 참는 분이 아니라면 온 세계는 아마 수 천만 번 멸망했을 겁니다. 우리도 골 백 번은 죽었을 겁니다. 만일 제가 행한 대로 하나님이 갚으셨다면 저는 이미 수천 번은 죽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이 오래 참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처럼 오래 참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온 세상의 왕이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그토록 오래 참으시는데 우리가 뭐라고 성급하게 굴 수 있겠습니까? 오래 참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래 참는다’ 그러면 대뜸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로 참아야 할 대상은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오래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노하는 것만을 더디 하시는 게 아니라 구원하시는 것도 더디 하시고, 복을 주시는 것도 더디 하십니다. 독생자 예수를 보내어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도 보십시오. 무척 더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한 것도 무척 더디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속히 오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하고 떠난 지가 벌써 이 천년이 지났습니다. 이 천년,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지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가 기다리기에는 너무 긴 시간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약속을 헛되다고 생각합니다.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어리석은 일일까요? 예수님의 약속은 정말 헛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약속)은 결코 헛되이 돌아간 적이 없습니다(사55:10). 때가 되면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됐지만 아직은 손에 잡히지 않는 구원, 세상 속에 은폐되어 있는 구원, 이미 이루어졌지만 아직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의 현실을 온 몸으로 견뎌내며 기다려야 합니다.

 

바울도 이 사실을 말했습니다. “성령의 첫 열매로 받은 우리까지도 속을 신음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3-25) 예수님도 말씀했습니다. 세상에 환란이 있겠지만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마24:13).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3:14)고 말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에 말씀했습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계2:26)

이 말씀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하나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오래 참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더디게 일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일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시간표와 다르게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오래 참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오래 참을 수 있어야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 기독교 신앙은 한 마디로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오래 참으면서 그분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요 본질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 대하여 오래 참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기도를 응답해 주지 않는다고, 고통스러운 환란을 제거해주지 않는다고 원망합니다. 우리의 기대와 시간에 맞춰주지 않는다고 성화를 합니다. (내 친구 완기 이야기)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그럴 수 없어요.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정말 신뢰하면 끝까지 참아요. 끈기로 참는 게 아니라 신뢰하기 때문에 참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오래 참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에 대하여 오래 참는다는 것은 자기를 너그럽게 대하는 것하고는 좀 다릅니다. 자기에 대하여 오래 참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부족한 자기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하고 기다려준다는 뜻입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고 흠이 많은 불량품입니다. 만물의 영장이기도 하지만 흠이 아주 많은 불량품이기도 해요. 저는 저 자신을 볼 때마다 정말 형편없는 불량품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불량품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반품해야 마땅한 불량품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인간의 근원 진실입니다. 우리는 이 근원 진실을 꼭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요 흠이 많은 존재인지를 꼭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인식이 정확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반석 위에 자기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어떤 집을 짓더라도 결국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언젠가는 허물어지고야 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인식하지 않은 채 그저 때가 되면 학교 가서 공부하기에 바쁩니다. 나름의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성취하기에 바쁩니다. 치열한 경쟁에 휘말려 들어가 각자도생하기에 바쁩니다. 열심히 자기계발해서 자기 몸값 높이기에 바쁩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에 대하여 오래 참지 않아요. 인생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자기를 다그치고 옥죄기만 하지 오래 참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인생이라는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하기도 합니다. 나는 패배자라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현실이 무섭다며 방문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기도 하고, 꿈꾸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며 자기에게 실망하고 자학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에 대하여 오래 참아주지 못해요. 부족하고 흠이 많은 자기에 대해 실망만 하고 자학만 하지 오래 참지는 않습니다.

다들 자기 인식 없이 인생에 뛰어드니까 자기에 대하여 오래 참지 못하는 거예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체 인생에 뛰어드니까 자기에 대해 비현실적인 기대와 목표를 갖고 거만하게 날뛰는 것이고, 결국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하여 자학도 하고 절망도 하고 자살도 하고 그러는 겁니다.

 

사실 인생은 빨리 가느냐 늦게 가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멀리 가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마지막까지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멈추지 않고 달려가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오래 참을 수 있으려면 첫째로 나는 기대 이하의 불량품이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자각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물 많은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실패를 통해서 연단하시고 아픔을 통해 치유하시며 성화의 길로 한 걸음씩 이끌어 가신다는 것,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량품인 자기에 대하여 오래 참을 수 있는 여력이 생깁니다. 인생길에서 실패하고 쓰러지더라도, 이런저런 허물이 반복적으로 노출되더라도, 거대한 세상의 악 앞에서 짓밟히고 상처 받더라도 그런 자기를 용납할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 두 가지가 없으면 - 내가 불량품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하나님이 허물 많은 나와 함께 하시며 실패를 통해 연단하시고 아픔을 통해 치유하시고 성화의 길로 한 걸음씩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 당연히 자기에 대하여 오래 참을 수 있는 힘이 안 생깁니다. 자기에 대하여 오래 참을 수 있는 없으니까 근거 없이 거만하든지 쓸데없이 자학하든지 하게 됩니다. 아니면 거만했다가 자학했다가를 끝없이 반복하면서 널뛰듯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제발 여러분 자신을 오래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잣대로 자기를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될 미래를 소망하면서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온전케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세 번째로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현재의 모습 그대로 용납한다(받아준다)는 뜻입니다. 내가 부족하고 허물 많은 사람이듯 옆에 있는 사람도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이고, 내가 불량품이듯 옆에 있는 사람도 불량품이니까, 나에 대하여 오래 참듯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도 오래 참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듯 저 사람도 사랑하시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듯 저 사람과도 함께 하시니까, 나를 용납하듯 옆에 있는 사람도 용납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허물, 그 사람의 부족함, 그 사람의 독특함, 그 사람의 고유함을 용납해야 합니다. 특히 내 맘에 들지 않는 부분, 나와 다른 부분, 나와 부딪치는 부분들을 용납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싫은데 좋은 척 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 때문에 속상한데 속상하지 않은 척 하라는 게 아닙니다. 싫은 건 싫은 겁니다. 속상한 건 속상한 거예요. 그 사람의 어떤 부분 때문에 힘들면 힘든 거예요. 그러니까 힘든 것은 힘들다고 이야기해도 됩니다. 때로는 시시비비도 가릴 수 있고, 권면도 할 수 있습니다. 단지 내가 싫고 속상하다고 해서, 내가 힘들다고 해서 엎에 있는 사람을 비난하거나 정죄하거나 내치지는 말라는 겁니다. 싫고 속상해도 옆에 있도록 받아주라는 거예요. 내치지 말고 함께 하라는 거예요. 그 사람의 부족함과 허물을 긍휼히 여기며 받아주라는 겁니다. 그 사람이 성장하기까지 기다려주라는 겁니다. 한 마디로 옆에 있는 사람 꼴을 좀 보라는 겁니다. 이것이 옆에 있는 사람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사람이 함께 있다 보면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다 다르거든요. 멀리 있을 때는 모르는데 가까이 있으면 다 다른 게 보여요. 느끼는 것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결정하는 것도 다르고, 행동하는 것도 다 다릅니다. 그리고 그런 다름이 불편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짜증나기도 합니다. 또 그런 것들이 반복되다 보면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화가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분노가 폭발하기도 하고, 내 안에 가라앉아 있던 온갖 구정물이 위로 올라오기도 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생래적 거부 반응이 생기기도 합니다. 사람이 그래요.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는다는 것,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한 자다.”(잠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잠16:32)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한다.”(잠15:18) 예,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는다는 것은 정말 힘겨운 일입니다. 오늘날 이혼하는 부부가 많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지 못하는 것 때문에 가정이 파탄 나고 인생이 곤두박질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지 않으려면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도 사랑하시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의 인생에도 간섭하시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니까, 우리도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가 오래 참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 시대 문화가 오래 참는 것을 어렵게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오늘 이 시대는 불신이 하늘을 찌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불신합니다. 또 사람을 수단으로 대합니다. 사람을 목표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대합니다. 사람보다 성과를 중시합니다. 사람보다 이익을 중시하고, 사람보다 효율을 중시합니다. 거기다가 시간의 리듬이 짧습니다. 예전에는 사계절이 생활의 리듬이었는데 지금은 하루가 생활 리듬이 됐고, 심한 경우 시간 단위로,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서 씁니다. 시간을 짧게 분 단위, 초단위로 쪼개 쓸수록, 하루 일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훌륭한 사람이고 유능한 사람이고 성공한 사람이라는 공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현대인은 좌우지간 바빠야 돼요. 바쁘지 않으면 바쁜 척이라도 해야 돼요. 그러지 않으면 무시당합니다. 현대인은 좌우지간 빨라야 합니다. 현대인에겐 빠른 게 선이고 느린 게 악입니다.

 

지금 우리는 바쁨과 빠름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는 삶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불신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게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참지를 못합니다. 쉽게 성내고, 쉽게 욕하고, 쉽게 갑질하고, 쉽게 판단하고, 쉽게 싸우고, 쉽게 돌아서고, 쉽게 포기하고, 쉽게 절망하고, 쉽게 상처받고, 쉽게 정죄합니다.

오래 참음은 깊은 신뢰에서 나오는 법인데 불신이 가득하니까, 시간에 쫓기니까,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니까 도무지 참고 기다리질 못합니다. 한 번 눈에 벗어나면, 그러면 그렇지 하고 기다렸다는듯 선을 긋고 정죄하고 돌아서버립니다. 하나님에 대하여도 오래 참지 못하고, 나에 대하여도 오래 참지 못하고,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도 오래 참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하니 너희도 노하기를 더디 하라. 내가 오래 참으니 너희도 오래 참으라. 역사의 주인인 나에 대하여 오래 참고, 너 자신에 대하여 오래 참고, 네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으라. 바울은 여기에 덧붙였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전13:4). 옳습니다. 오래 참는 것이 사랑입니다. 오래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진실을 기억하고 오래 참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오래 참는 방식으로 구원하시고, 오래 참는 방식으로 다스리시니까 우리도 오래 참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도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하고, 나에 대하여도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하고,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도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오래 참을 수 있어야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고, 나에 대하여 오래 참을 수 있어야 인생길을 마지막까지 걸어갈 수 있고,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을 수 있어야 삶이 화평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