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첫 꽃 주일 (마가복음9:33-37, 10:13-16)

새벽지기1 2017. 8. 10. 06:35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

오늘은 유월 둘째 주일, 세계적으로 어린이 주일 혹은 꽃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아마 자연계에서 꽃이 제일 아름답고,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어린이들이 제일 아름다우므로 이 어린이 주일을 꽃 주일이라고 부르게 된 듯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꽃을 사랑하시고 또 어린이들을 사랑하십니다.
오늘 아침설교 제목을 첫 꽃 주일이라고 정하였습니다. 그것이 꼭 합당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것을 꽃 주일이 시작된 첫 날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꼭 그 날이 주일이었는지 물론 확실히 모를 것입니다. 꽃 주일은 예수님에게 부모님들을 데리고 옴으로부터 말하자면 그 날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이 읽은 성경 말씀, 마가복음 10장 13-16절까지에 기록된 그리스도 생활에 있어서 한 작은 일화, 부모들이 주님께서 만져 주시기를 원해서 주님 앞에 데리고 오니 제자들이 그들을 보고 꾸짖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오히려 분히 여기면서 어린아이들이 예수께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아이들을 환영하면서 그 아이들을 친히 안으시고 그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고 축복하여 주신 일입니다.
이 간단한 일화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것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는 줄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지나 갈수록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이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와 어린이에 대한 그 교훈의 뜻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18세기는 민중을 발견한 세기요, 19세기는 여자를 발견한 세기요, 그러나 20세기는 어린이들을 발견한 세기라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근래에 심리학이 점점 발전됨에 따라서, 더욱 일생을 통해서 이 아동 시기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라고 하는 것을 제 인식하게끔 되는 것입니다. 구세군은 처음으로 설립한 바아드(Baath)대장은, 우리는 마귀보다 손을 먼저 써서 어린이들에게 죄악을 배우기 전에 선을 배워줘야 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 말하자면 첫 꽃 주일에 된 사실을 다시 한번 추억해서 우리가 피차에 은혜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읽은 대로 이 첫 꽃 주일은 부모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옴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부모들이 혼자 오지 아니했습니다. 어린이들을 데리고 예수 님께 온 것입니다. 여기에 꽃 주일에 부모들의 의무를 우리가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부모들은 어린아이들을 주님께 데리고 올 의무가 있습니다.

한나는 어린 사무엘을 데리고 성막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도 결례의 날이 찰 때에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으로 간 것입니다. 엘리사베드도 역시 아기 요한을 데리고 성전으로 간 것입니다. 구약 시대 모든 경건한 부모들은 어린 아기들을 데리고 성전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이 원리는 지금 우리에게도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어른들만 교회에 나오는 것은 부족합니다. 우리 어린이들도 데리고 같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모가 다 세례를 받은 경우에는 우리 가정의 귀한 선물 아기가 올 때에 먼저 하나님께 데리고 와서 아기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6개원 전에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에는 결례의 날 40일이 지나면 어린 아기를 성전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아이들을 영아부에 데리고 와서 영아부에 같이 참여시키는 것을 의미하고, 그 다음에 유년부, 그 다음에 초등부, 그 다음에 중등부, 그 다음에 고등부, 주일학교 각 부에 어떻든지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꼭 출석하게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와 같이 사방에서 모여오는 경우에 있어서는 어떤 가정은 교회가 너무 멀어서 어린아이들을 본 교회로 데리고 오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사실 유년 부나 초등부 시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모의 의무를 바로 한다고 하면 적어도 중학시대부터는 본 교회에 보모와 함께 참석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습관을 꼭 양성시켜 주어야 될 것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교회에 나가서 찬송을 배우고 기도를 배우고 성경 말씀을 듣고 교회에 출석하는 습관을 양성해 주는 것은 그 아이들의 일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아이들을 예배당에 데리고 오는 것만이 의무를 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모들이 중심으로 어린아이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교회에 데리고는 나오지마는 중심으로 아이들을 바치지 않는 가정이 많은 줄 생각합니다. 한나는 중심으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중심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모든 어진 부모가 그러했습니다. 중심으로 바친다고 하는 것은 아이들을 기를 때에 온전히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교육을 하는 것이나 학교를 작정하는 것이나 모든 일에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중심해서 아이들을 인도한다고 하는 뜻입니다.『네 아들이 어디 잇느냐?』주님께서 우리에게 종종 묻습니다. 부모들은 이 자리에 나와 앉았지마는 여러분의 아들과 딸들은 이 시간 어디 있습니까? 부모들은 신앙가운데서 천국에 들어왔지마는 여러분의 아들과 딸들은 이 시간 영적으로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각각 대답하시고 깊이 자성(自省)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영락교회 교정의 제일 아름다운 광경은 여러분께서 보시려고 하면 아침에 일찍이 예배당에 나와 보세요, 어린이들이 주를 찾아 나오며 특별히 혹은 할머니 혹은 어머니가 아이의 손을 잡고 업고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오는 그 광경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목사로서 한 가지 제일 큰 낙이 있다고 하면, 아마 그 경경을 보는 즐거움일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집이올시다. 아마 그보다 더 큰 낙이 있다고 하면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뺨이 석류 반 조각 같이 붉은 어린 아기를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일일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을 주님께 데리고 오는 것을 우리가 입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의 신앙 생활을 바로 지도하려고 하면 할 수 있는 대로 온 가족이 특별히 중학생 이후에는 한 교회에 나오도록 우리가 인도하고 그 아이들의 예배당에 나가서 가지는 태도와 사귀는 동무들까지 부모가 자세히 감시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 첫 꽃 주일에 제자들이 이렇게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보고 꾸짖었다고 그랬습니다. 물론 이 실수는 고의로 한 실수는 아닙니다. 사실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해서 분주한데 아이들까지 데리고 오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이 부모들과 아이들을 꾸짖은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을 사랑이되 지식이 없는 사랑입니다. 열심은 열심인데 지식이 없는 열심입니다. 이해가 없는 열심입니다. 또 아이들도 예수께 와야 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그릇된 생각입니다. 또 보통으로 어른들보다 아이들을 경시(輕視)하는 것이 그 때 일반 사람들이 가지는 태도 가운데 하나였든 듯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태도를 실상은 아이를 데리고 오는 어머니에게도 잘못이요, 어머니와 같이 나오는 아이들에게도 잘못이요, 그 아이를 영접하려고 하는 예수님의 대해서도 실수입니다. 이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배치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에 위배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격과 그 일상 생활에 반대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분히 여기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어린아이들이 예수께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금하지 말라고 하는 말은 좀더 원어에 가깝게 번역한다고 하면 방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장해하지 말라, 어린아이들이 내게 올 때에 장해물을 두어서 장해하기 말아라 하는 그 뜻입니다.


자, 먼저 이 제자들의 실수를 생각하고 특별히 교회의 제직자들이나 주일학교 선생들은 이 말씀을 자세히 들을 필요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조금 잘못하면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하는 것 같지마는 그만 어린아이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떤 가정에 심방 가서 우리교회에 새로 나오는 어떤 청년들 만났는데, 그 청년의 신앙 경험을 물어보니 일찍이 이북에 있을 때에 주일하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주일 학교에 다니다가 그만 두고 오래 동안 예배당에 안 나오다가 다시 나오는데 어떻게 되어서 그 때 그가 그만 둔 사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청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옛날 일제 말기 우리교회가 일제 탄압 아래에 있을 때에, 열두 시가 되어서 사이렌만 울리면 묵도하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에는 이렇게 설교하다가도 열두 시만 되면 설교하다 말고 다 묵도할 수밖에 없는 그런 때를 우리가 지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이들이 그 때 예배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주일학교에서 아마 무슨 집회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열두 시가 되니까 다 묵도하라고 해서 묵도하는데, 이 학생이 묵도를 안 했다고 합니다. 또 하기야 정성 있게 묵도한 사람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그 아이가 묵도를 안 했다고 주일학교 선생이 와서 그 아이를 때렸다고 합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 자세히 들으시오, 주일 학교에서 아이들을 때리면 안 됩니다. 무심하게 아마 질서를 유지하노라고 선생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맞는 아이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섭섭했습니다. 그 청년은 오랫동안 교회에 안 나가다가 그 후에 장성해서 아무래도 자기가 예수를 믿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답니다. 이런 각오를 가지고 다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주일학교에 나오다가 어떻게 우리 교회의 직분 맡은 분이나 목사가 실수를 함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안 나오는 학생은 이 사람만이 아닌 줄 생각합니다. 방해하지 아니하도록 우리가 조심해야 될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걸음 더 깊이 생각할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 믿는 사람들의 불건전한 신앙생활, 곧 모든 경건하지 못한 언행들은 근본적으로 아이들이 주님께 나오는 것을 방해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언제든지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가 사를 것도 혼자 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활은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는 특별히 우리 가정에 있는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믿는다 하면서 우리가 생활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좋은 모범을 주지 못한다고 하면, 이것이야말로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나오는데 큰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도 그 생활을 봅니다. 그래서 어른들의 생활을 통해서 말하자면 요사이 말로 그들에게 시청각 교육을 줍니다. 여러분은 다 아이들이 구경하는 활동사진의 배우인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이라고, 백 마디의 말보다도 한 가지의 행동으로서 반대의 행동을 보여 주면 아이들은 그것을 본받습니다.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여러분 부모들은 신앙생활을 잘 하는 가운데 있다고 하지마는 자녀들 가운데 아직 신앙 생활에 들어오지 못한 가정이 있다고 하면 깊이 반성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과연 우리 가정에서 하는 일 내 사회에서 하는 일이 명실공히 신행(信行)이 일치해서 나의 제일 가까운 자녀들에게 참된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는가 그렇지 아니하고 단순히 외형으로 예배당에만 출석했는가? 우리의 생활이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나오는데 장해가 되지 아니해야 되겠습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더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 것은 제일 큰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나는 믿는 소자 하나를 범죄 하게 하는 자는 차라리 큰 맷돌을 그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으리라.』어른들이 아이들은 죄게 빠뜨리는 일, 선생이 학생을 유혹하는 일, 장성한 사람들이 철없는 아이들을 죄에 빠뜨리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흉악하고 용서 못할 죄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그리고 셋째로, 꽃 주일의 축복이 있습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예수 께 데리고 올 때에는 그저 좀 만져나 줄까 하고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여기 기록을 보니 주님께서는 그 아이를 친히 팔로 안으시고, 복을 비시고, 손을 그 머리에 얹어 주셨다고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의 넘치는 부모의 기대에 넘치는 복을 주셨습니다. 부모들이 상상하던 그 이상의 축복을 어린이들에게 예수 님께서 더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누구든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중심으로 주님께 바치는 아기 위에는 부모가 상상하고 기대하는 그 이상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한나가 어린 사무엘을 데리고 와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많은 기대가 있은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에 사무엘의 머리 위에 한나가 상상하던 그 이상의 축복을 더하여 주신 것입니다. 엘리사베드가 아기 요한 을 데리고 하나님께 바칠 때에 큰 기대가 있은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이상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요게벳이 어린 모세를 하나님께 바칠 때에 큰 기대가 있은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후에 사실을 보면 어머니가 상상하던 몇 십 배, 몇 백 배의 그 이상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중심으로 하나님께 아이들을 바치는 그 가정에 기대 이상의 주님의 크신 축복이 임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할 때에 세상에 있어서 제일 큰복은 자손의 복이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사실 자손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려고 하면 그 자손의 머리 위에 하나님의 축복의 손이 있어야 그 가정의 축복이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오히려 화가 미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을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은과 금은 우리에게 없지마는 주님의 축복을 유산으로써 우리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넷째로 꽃 주일의 교훈을 잠깐 생각하세요.『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이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편견이 없습니다. 선입 주견(主見)이 없습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진실합니다. 그 천진성(天眞性)을 우리가 배워야 되겠습니다. 둘째로, 어린이들은 의심이 없습니다. 부모의 말이나 어른의 말이면 털끝만치도 의심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믿습니다. 그 절대의 신뢰성, 전적으로 믿는 그 믿음을 우리가 배워야 되겠습니다. 셋째로는, 어린아이들은 무슨 지식이나 무슨 문벌이나, 무슨 지위나, 무슨 물질에 대한 교만이 없습니다. 겸손합니다. 그 겸허성(謙虛性)을 우리가 배워야 되겠습니다. 진실 되고 참으로 믿고 겸손히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은 나이는 많지마는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하늘 나라의 귀한 어린 자녀입니다.


주님께서 그와 같은 심령을 하늘 나라로 영접하시고 그 위에 축복을 더하여 주십니다. 오늘 꽃 주일을 당해서 부모들의 의무를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제자들이 한 실수를 우리가 경계해야 되겠습니다. 주님의 축복은 우리 기대 이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어린이에게 배워서 겸손하고 참되고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1959년 6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