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남준목사

화목제의 순수성을 지킴 (레 7:19-20)

새벽지기1 2017. 7. 25. 10:59

 

“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먹지 말고 불사를 것이라 그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을 것이니 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요” (레 7:19-20)

 

I. 본문해설

 

본문은 화목제를 드리고 난 후에 그 고기가 제사장에게 바쳐졌는데 만약 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이 되었으면 먹지 말고 모두 불사라 버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화목제물은 모든 제물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바쳐질 때부터 구별되어야 했다. 불결한 물건에 접촉하거나 선별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바쳐진 제물이 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도 제사장에게 드려졌는데 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하면 먹을 수 없었다. 이렇게 제물에 관한 까다로운 규정은 순수해야 할 화목제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다.

 

II. 순수해야 할 화목제

 

A. 헌제물의 순수성  

여기서는 크게 헌제물의 순수성과 헌제자의 순수성을 말하고 있다. 먼저 헌제물의 순수성이다. 하나님 앞에 바쳐질 때뿐 아니라 제사가 끝난 뒤에도 성결하게 구별된 가운데 그 고기는 제사장들에게 이용될 수 있었다. 레위기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까다로운 제사의 의례들이 등장한다. 왜 좋으신 하나님이 당신을 경배하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까다로운 제사의 규칙들을 요구하실까?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순종하는지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까다로운 규칙들을 모두 준수하는 과정을 통해서 헌제자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있는지 보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은 행동의 주의 깊음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주의 깊음, 이것은 자기가 존경하고 높이는 대상에 대해 필수적으로 따르는 행동의 규칙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화목제물인데 불결한 물건에 접촉을 해서 더러워졌다. 그러면 개를 주라고 성경은 말 하지 않는다. 제사 드린 제물은 제사장에게 돌려져야지 용도를 바꿀 수 없다. 용도가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데 쓸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우리는 헌제물의 순수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볼 수 있다.

 

이것을 오늘 신약시대인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이 이루어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개념 없이 살다가,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려 죽으신 것이 하나님과 나를 화목하게 하여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큰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반응하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에 대한 믿음과 헌신의 반응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헌신하게 된다. 외형적인 것은 바뀌지 않았어도 목표 자체가 바뀌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된 사람의 변화이다.

 

또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리고 나면 이제 이웃들이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생애는 이런 사실에 대한 그림과 같은 예시이다. 주님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아들이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였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바쳤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 헌신된 분이셨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되고 당신 자신을 다 바쳤기 때문에 무지한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진리의 빛을 받게 되었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위로 받고 벗어날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삶을 살지 않는 자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가 어떤 죄인이며 하나님과 자신을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잊었기 때문에 무위도식하는 것이다. 한때는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울며 자기를 주님 앞에 바쳤다. 그때는 자기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변했다. 이제는 예수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거나 내 인생이 주님께 드려졌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바쳐진 자신의 헌제물은 불결하고 더러운 인생의 동기와 접촉하여 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많은데 하나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주님께 바쳐진 이 헌제물에 불결한 것들이 접촉되어 형식적으로는 삶이 하나님께 바쳐졌으나 실제로는 이 헌제물이 더럽혀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높임을 받으려는 교만한 태도는 그릇된 동기이다. 순수함을 찾아볼 수 없다. 꾸밈이 없고 순수한 태도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나를 바치며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을 이롭게 함으로 내가 소비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고 하는 진정한 의식이 없다. 그러니 그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그의 하는 일에 복을 내리실 리가 없다. 감사의 가장 순수한 동기는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이 불결해지지 않고 정결하게 하나님만을 위해서 사용되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살아가야 한다.

 

B. 헌제자의 순수성  

두 번째는 헌제자의 순수성이다. 자, 제물은 정결하게 화목제에 바쳐졌고 끝난 후에도 불결한 물건에 접촉하지 않고 깨끗하게 보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먹어야 할 제사장이 혹은 그것을 먹어야 할 사람이 율법적으로 금지 된 물건이나 시체, 동물 등에 접촉해서 불결해졌다. 그러면 그것을 먹어서는 안된다. 무시하고 먹는다면 언약 백성 중에 끊어져 버린다고 하는 가장 단호한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왜 하나님은 제물뿐만 아니라 제사 드리는 사람이 입을 옷, 행동하는 태도, 많은 규례들을 만드셔서 그것을 준수하게 하셨을까? 하나님의 말을 듣나 안 듣나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사람들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고 그 규칙을 따를것이요, 그렇치 않은 사람들은 짜증이 나거나 규칙을 무시해 버릴 것이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순수한 동기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사랑을 가리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성향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갖고 싶은 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다. 내부적으로는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정서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말씀을 깊이 깨닫고 감사하거나 죄를 깊이 뉘우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통한 사랑의 정서를 주신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주 소중하게 느껴지고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마음의 정동이 일어난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을 사랑하던 속된 욕망들이 확 쏟아져 깨끗하고 꾸밈이 없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자기를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서 은혜의 경험이라고 한다. 이런 은혜의 경험을 하고 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가난한 자를 돕거나 무지한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해주고자 하는 강한 헌신의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이때 헌제자는 순수한 마음이 된다.

 

오늘날 기독교에 대한 많은 비난들이 쏟아진다. 요즘 도가니라는 영화에 나오는 기독교인들의 악한 행동은 불편하긴 하지만 그리고 과장은 됐지만 기본적으로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우리와 종자가 다른 사람이라고 쉽게 잘라 말할 수 없다. 우리 또한 다른 부분에서 죄를 뿜어내며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에 먹칠하며 살고 있지 않은지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그게 결국 무엇 때문인가? 주님을 위해 한때 바쳤지만, 한번 드린 것이 영원한 것일 수 있겠나? 성경에는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육체로 마쳤던 수많은 믿음의 위인들이 나온다. 히스기야는 어두운 밤하늘에 별같이 빛나던 임금이었으나 육체로 마쳤다. 믿음의 사람, 종교개혁을 이루었던 요시아나 아사 같은 임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일생을 주님 앞에 드렸어도 매일매일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부족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할 존재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이 당신의 은혜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한도 안에서만 순수한 헌제자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십자가 사랑의 감격을 많이 체험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더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주님을 위해서 온전히 헌신하며 살기에도 우리의 인생은 모자라다.

 

III. 부정한 자를 돌이키심

 

그러면 만약에 내가 화목제의 음식을 받을 수 없는 불결함에 접촉 되었을 때에는 제사장인 우리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일까? 여기서 부정한 자를 돌이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구약의 제사에서 실수로 불결해진 사람들을 다시 깨끗하게 하는 히브리어로 ‘아샴’이라고 하는 속건제가 있다. 속건제는 하나님의 율법에 금하신 물건과 접촉함으로 부정하게 된 사람을 다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사야 53장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 인류를 위한 속건 제물이 되셨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고 예언하심으로 우리 모두 창조의 목적을 떠나 죄로 불결해져 하나님이 주신 이 놀라운 구속의 은택을 누릴 수 없는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다시 정결하게 되어 주님의 화목제물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이다.

 

이제껏 살아온 날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지만, 주님 앞에 드린 인생의 헌제물이 더렵혀졌고, 우리의 인생을 아버지께 드린 헌제자로서 삶의 순수한 동기들이 불결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많이 드렸지만 주님이 받으신 것은 인생의 매우 적은 부분밖에 없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목을 끄는 탁월한 삶을 사는 것을 더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탁월한 지식이 없어도 삶의 작은 부분이라도 주님께 드리며 순수한 화목제물을 아버지께 그리고 이웃들을 위해 바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인생을 훨씬 더 기쁘게 받으신다. 그래서 우리의 불결이 하나님 앞에 이 어두운 세상에서 얼마나 굳게 만드는지를 생각하며 하나님을 위해서 온전히 드려지는 그런 헌신과 사랑의 삶을 매일 살아가야 한다.

 

IV. 결 론: 다시 거룩함으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아무것도 아끼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분은 이 세상에서 아무 욕심도 없이 순수한 헌제자의 마음으로 자신의 옥체를 하나님께 바치심으로 주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들을 화목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에서 누리는 모든 영적인 좋은 것과 물질적인 좋은 것과 정신적인 모든 좋은 것들이 예수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크신 은혜에 감격하며 우리를 주님께 온전히 드려 주님과 교회와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헌신을 누릴 수 있도록 그래서 그들이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이렇게 우리 자신을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