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경건한 어머니의 모습 -어머니 주일- (잠언31:1-31)

새벽지기1 2017. 6. 7. 07:04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우리가 어느 때에 어머니를 생각하지 아니하리요 마는 오늘은 특별히 일년에 하루를 정해서 어머니를 기억하는 날이올시다. 경건한 어머니의 모습을 한번 더 추억해 보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경건한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먼저 약 3천년 전 나일 강변 어떤 히브리 사람의 가정이 기억됩니다. 이 가정에 귀한 옥동자가 출생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이 시대 이 땅에 사는 히브리 사람들은 아들을 기를 수 없는 운명에 있은 것입니다. 그리해서 아들을 낳은 기쁨은 말할 수 없지마는 이와 같은 땅에서 어떻게 이 아들을 기를 수 있을까? 염려하는 초조한 어머니의 모습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문을 굳게 닫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바깥에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몰래 이 아이를 기릅니다. 갑자기 밖에서 무슨 인적 기가 있으면 놀라는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금 기억하게 됩니다. 이렇게 기르는 중에 아기는 점점 큽니다. 아기가 점점 크는 것은 감사하지마는 아기의 울음소리도 점점 커갑니다. 아만 생각해도 이 아기를 집안에서는 기를 수가 없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해서 마지막에는 할 수 없이 갈대로 상자를 만들고 거기에 역청을 발라서 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그 속에 강보를 놓고 그 안에 귀여운 어린아이를 둘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어머니는 차마 떨어지지 아니하는 발길을 돌려서 바구니에 담은 이 어린아이를 가지고 나일 강변으로 나아갑니다. 나일 강변 어떤 갈대밭 속에 이 아기를 놓습니다. 이 아기를 놓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이키기 전에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부득이 돌아올 수밖에 없지마는 아무래도 이 아기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 같이 갔던 미리암을 명해서『나는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발견될 염려가 있으니까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마는 너는 여기에 있어서 아기가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아라.』그리고는 이 어머니는 초조한 얼굴로써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갈대밭 사이로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이 어머니는 이 아기가 어떻게 되는가? 소식을 기다리면서 문자 그대로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로 딸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몇 시간이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의 딸이 황급히 돌아오면서, 문도 열기 전에 자기의 어머니를 찾습니다. 어머니의 음성을 듣자마자 기쁜 얼굴로 들어오면서『어머님 빨리 오세요. 나하고 같이 저 나일 강변으로 가십시다. 어머님이 들어가신 후에 얼마 있다가 애굽의 공주가 목욕을 하려 나왔습니다. 이 아기를 보드니 아기가 아주 잘 생겼다고 칭찬을 하면서 자기가 데려다가 자기의 아들을 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유모를 나보고 구해달라고 그래서 제가 유모를 구하여 왔습니다. 어머니를 유모로 소개했으니 빨리 나오세요 같이 갑시다.』 꿈인가 생시인가도 모르는 사이에 나일 강변으로 다름 질 해 간 줄 압니다. 그리고서는 기쁨으로 이 아기를 데리고 다시 자기 집으로 다름 질 해오는 모습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아들이지마는 자기의 아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이 아기를 기르는 어머니의 심정을 또한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기는 속히 큽니다. 어느덧 일년이 지났습니다. 젖을 떼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무나 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은 공주가 와서 이 어린아이를 찾아간다고 하는 그런 소식이 왔습니다. 부득이 이 어머니는 자기의 아이를 자기의 무릎에서 내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마는 이 아기가 자기의 무릎 앞에서 자라든지 어느 곳에서 자라든지 그저 이 아기가 잘 자라고, 좋은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그 모습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눈물의 어머니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성지 순례를 할 때에 예루살렘을 떠나서 북편으로 자동차를 몰아 갑니다. 가는 도중에 기브아가 어느 곳이라 혹은 히엘이 어느 것이라. 이곳 저곳을 가리키는 말을 들으면서 얼마쯤 가니까 손가락으로 왼쪽을 가리키면서 바로 저 산 위가 옛날 성막이 있던 유명한 실로라 하는 곳이 고적이올시다 합니다.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실로에는 옛날 성막이 있었고, 특별히 그 성막에서 성기던 유명한 제사장 엘리는 우리가 다 기억합니다. 우리가 엘리를 기억하게 될 때에는 자연히 어떤 누구보다도 먼저 한나를 우리가 기억하게 됩니다. 한나는 라마에 사는 여자로서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수모도 많이 당했습니다. 이 성막이 있는 실로에 와서 성막에 들어와서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간절히 아기를 달라고 기도를 했던지 엘리가 보기에 술 취한 여자같이 보였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서 아기가 있어서, 열 달이 지난 후에 귀한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한나는 이 아기를 받아 기르면서『이 아기는 하나님께서 내가 간절히 구하여 기도로 받은 아기인데 어떻든지 이 아기를 내가 꼭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고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그런 약조를 스스로 한 것입니다.
매년 자기 남편이 실로에 가서 서원제(誓願祭)를 드리지마는 그 해는 가지 않았습니다.『나는 이 아이가 젖이 다 떨어져서 상당히 커서 그 스스로 자랄 수 있을 때에는 이 아기를 성막으로 데리고 가서 온전히 하나님께 받치려고 합니다.』
남편도 한나의 심정을 이해해서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신 줄 압니다. 그래서 온전히 젖이 다 떨어지고, 이 아기가 혼자 자라날 수 있으리 만큼 되었지마는 아직도 어립니다. 그러나 자기는 마음에 작정한 대로 그 아이를 데리고는 그 때 풍속대로 제물로서 살찐 소 세 마리를 가지고 고운 기름도 가지고 많은 예물과 같이 성막이 있는 실로로 갔습니다.
그리고서 대제사장 엘리를 향해서 하는 말이『나는 몇 해 전에 여기 와서 간절히 애기를 달라고, 기도하는 라마에서 온 여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셔서 이 아기를 주셨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나도 이 아이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립니다』했습니다. 그리고서 그 아이를 온전히 엘리라 하는 대제사장에게 맡긴 것입니다. 여기 자기 아이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우리가 봅니다. 신약에 볼 것이면 어느 어머니의 모습보다도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우리가 연상치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 님 탄생한 자리에 기념 예배당이, 주후 4세기에 지었다고 하는 굉장한 예배당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 제단 아래편 지하실로 들어가면 조그마한 방이 있고, 제단을 차려 놓고, 그 제단 아래는 바로 별 모양으로 대리석의 표를 한 것이 있습니다. 안내자의 말을 들으면 바로 그 곳이 예수 님께서 탄생하신 옛 마구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곳에 순례를 하는 사람마다 그 곳에 가서 서게 될 때에는 자연히 이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요셉과 마리아를 연상하게 됩니다. 그들은 호적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에 오기는 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와서 벌써 돈 많은 사람 세력 많은 사람이 좋은 방 다 점령했습니다. 다른 곳에 있을 수가 없어서, 마구간 한구석을 얻어 가지고 그 곳에서 유숙한 거룩한 가족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아기를 낳을 때가 되어 그 곳에서 부득이 해산을 하게 되어 아기를 낳아 강보에 싸서 눕게 한 곳이 구유였다는 그 말씀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귀한 첫 태의 어린 아기를 눕게 할 데가 없어서 구유에 누이는 가난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아니해서 목자들이 와서 경배를 합니다. 천군 천사들의 찬송과 메시지를 와서 전해줍니다. 오래지 아니해서 멀리 동방의 박사들이 와서 경배를 드리면서 예물을 그리고 갑니다. 그것까지는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루 밤에는 요셉에게 이상한 하늘로서의 현몽(現夢)이 있었습니다.『헤롯이 아기를 죽이려 하니 이 아기를 데리고 곧 애굽으로 피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밤에 황급히 일어나서 짐을 싸서 어린 아기를 가슴에 안고 적은 나귀를 타고, 고요한 밤중을 타서 몰래 베들레헴을 도망해 나오는 초조한 성모 어머니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을 향해서 밤과 낮을 계속해 갔습니다. 산을 넘고 들을 건너고 강을 건너면서 어떻든지 헤롯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서 혹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리면 헤롯의 군사가 아닌가? 놀라고 마음을 조이면서 길을 재촉하며 갑니다. 먼 지평선상에 금자탑의 그림자가 보일 때에야,『아 이 곳은 벌써 애굽이 되었구나 이제는 헤롯의 권세가 여기는 미치지 못하지 이제는 괜찮다』하는 그런 안도감(安堵感)을 가지면서, 나일 강변 어떤 조그마한 집에 방을 얻고 젊은 두 부부가 어린 아기를 데리고, 사는 모습을 우리가 추억할 수 있습니다. 헤롯이 죽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그 다음에는 먼길을 다시 와서, 갈릴리 나사렛에 왔습니다. 나사렛에 와서 전설에 의지하면 어떤 굴속에 머물러서 살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마리아가 물을 길어 먹던 그 우물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와서 물을 긷고 옷을 빨며 이 귀여운 아기를 잘 기릅니다. 촌에서 목수의 아내로서 아이를 기르는 성모(聖母)의 모습을 우리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느덧 아기는 컸습니다. 삼십이 되었습니다, 요단강에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서 세례 요한이 이상한 옷을 입고『지금 때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외칠 때에 많은 사람이 요단강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가까운 줄 알고 요단강에 나아가서, 세례 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3년간의 전도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물론 성모 마리아는 같이 따라 다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마리아의 기도는 예수 님과 같이 따른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유월절은 마리아도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해하려 한다는 말은 물론 많이 들었습니다. 어떠한 저녁에 갑자기 없어졌습니다. 많이 사람이 길가에 모이기에 나갔더니 어떤 젊은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리면서 그 좁은 거리를 올라옵니다. 자세히 보니 그는 예수였습니다. 십자가를 진 예수를 보면서 눈물 흘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마침내 골고다에 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땅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가슴에도 그 날 십자가가 선 것입니다. 여기에 경건한, 순결한, 희생과 기도와 눈물의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약을 읽을 때마다 성모 마리아의 모습 외에 또 다른 어머니의 모습을 저는 항상 기억합니다. 이 여자는 유대 여자가 아닙니다. 헬라 여자입니다. 스로보니게 족속에 속하는 여자입니다. 예수 님께서 한번은 두로와 시돈에 전도하러 갔을 때에 이 헬라 여자가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서 따라오면서,『다윗의 자손 예수여! 불쌍히 여기소서』간절히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예수님께서는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들은 체 만 체하고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너무 민망해서『아 저, 여자가 지금 부릅니다. 어떻게 말씀해서 보내세요.』 예수 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내가 보냄을 받은 것은 잃어진 이스라엘의 양을 찾으러 보냄을 받은 것이지 이방 사람을 위해서 받은 것은 아니다』고 냉정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여자는 예수 님의 발 앞에 왔습니다. 발 앞에 엎디어서 하는 말이『내 딸이 귀신이 들려서 죽게 되었으니 내 딸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간절히 부르짖습니다. 이상하게도 예수님이 다시 하시는 말씀이『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이 여자는 듣지 않고 이어 맞받아 하는 말이『주여 옳습니다. 그렇지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이 딸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했습니다. 그 때에 아마 예수 님께서 얼굴에 웃음을 가득히 담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여자여! 내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했습니다. 여기 믿음의 어머니의 모습을 우리가 봅니다. 자기의 딸을 위해서, 자기의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이와 같이 냉정한 태도를 가지는 데도 불구하고 한 번 구하고, 두 번 구하고, 세 번 구하고 계속해서 간절히 구하는 믿음의 어머니의 모습을 봅니다.


교회 역사를 통해서 우리 교회 가운데 진주같이 귀한 이와 같은 경건한 어머니가 수없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아마 그 가운데 제일 유명한 어머니, 일반적으로 알려진 어머니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인 줄 생각합니다. 모니카의 아들 어거스틴은 매우 재주가 많은 사람이올시다. 공부도 잘했습니다. 글 잘하고 말도 잘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안 믿었습니다. 죄악 가운데 빠졌습니다. 경건한 이 어머니 모니카는 어거스틴을 회개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십 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응답은 없습니다. 죄악 길로 그냥 나갑니다. 더욱이 한번은 그 아프리카 북방의 고향을 떠나서 로마로 가려고 합니다. 제일 화려한 곳 죄악이 많은 로마로 가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모니카는 가지 말라고 간절히 부탁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어떻든지 못 가게 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습니다. 그러나 모니카 몰래 배를 타고 도망쳐서 로마로 가기 전 모니카가 얼마나 마음이 상했던지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목사에게 와서 이 사실을 호소합니다. 목사가 이 말을 가만히 듣더니『과히 염려하지 마세요. 이와 같은 눈물의 아들이 언제든지 회개할 때가 있습니다.』그랬으나 모니카의 기대와는 반대로 오히려 어거스틴이 로마에 가고 그 다음에 밀란에 가게 되고, 밀란에서 유명한 암부로스 목사를 만나고, 그의 설교를 듣고, 그의 감화를 통해서 회개해서 모니카의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여기 간절한 기도로써 승리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우리가 봅니다.


이와 같은 어머니는 옛날만 있은 것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에도 여러분 계십니다.
제가 지난 이른 봄 어떤 저녁에 저녁을 먹고 앉았노라니까 우리 교회에 다니는 어떤 자매님이 아이를 다섯을 데리고, 제 집에 찾아 들어옵니다. 들어와서 하시는 말씀이 대략 다음과 제가 이미 사정은 대강 압니다. 이 어머님은 6·25때 자기 남편이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어린 것은 두 살인가 세 살인가 그렇게 되고, 좀 크대 야 아마 열 너덧 살 이렇게 났던 모양인데 이 어머니는 아이 다섯을 데리고 살려고 하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에 있지 못하고 직장에 가서 일합니다. 또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다 학교에 보냅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이 세살 난 아이입니다. 이 아이를 어디 맡길 데도 없고 볼 사람도 없고 그래서 부득이 갈 때는 어디 가서 잃어지면 안 되겠다고 그래서 밖으로 문을 걸고 마치 가두다시피 하고 늘 직장에 나가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랬었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금년에 우리 맏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가두어 기르던 저 애가 이제는 국민학교엘 다닙니다.』
그 어머님의 얼굴과 그 아이들을 쭉 둘려볼 때 참 눈시울이 뜨거워서, 눈물을 금할 수가 없는 것을 억지로 참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와 같은 어머니가 우리 교회와 우리 한국에 얼마든지 많이 계십니다. 이와 같은 어머니로 말미암아서 가정이 유지되고, 교회가 유지되고, 국가가 유지되고 아니 전세계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진주보다 더 귀한 어머니의 모습이올시다. 여러분 얼마 전 신문에서 영등포에 기차가 지나갈 때에 마침 어린것이 차 앞에서 놉니다. 어머니가 그것을 보고 뛰어 들어가서 어떻게 아이를 구해서 내 던지고, 어머니는 달리는 기차에 치어서 죽은 사실을 여러분 다 기억하실 줄 압니다. 이와 같은 비극 가운데서 거룩한 모성애(母性愛), 어머니의 경건한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아들이 잘났든지, 못났든지 어쨌든 자녀를 사랑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깨끗합니다. 불순한 동기에서 생기는 것이 없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희생적 사랑이올시다. 그런고로 어머니의 기도를 간절합니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기도는 응답이 됩니다.


내 어떤 책을 보니까 어떤 잘 믿는 어머니 셋이 있는데 자기 아들은 다 안 믿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두 세 사람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겠다』고 했는데 우리 함께 모여서 기도합시다. 그래서 한 주일에 한 번씩은 늘 모여서 자기 아들을 회개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기도 동맹을 조직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계속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 동안에 얼마 있다가 두 어머니의 아들은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한 어머니의 아들은 종래 회개를 안 합니다. 그만 회개하는 것을 못 본 채 한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세상 떠난 다음에 이 아들이 회개하고 그 후에 목사가 되었다는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어느 때 어머니를 존경하지 아니하리요 마는 특별히 이 날 어머니를 존경하고 어머니를 기억할 수 있기 바랍니다. 어머님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십시다. 어머니를 도와주고 후원하십시다. 집을 떠난 젊은 사람들은 특별히 오늘날 어머니가 다른 데 계시면 편지 한 장이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하십시다. (1958년 6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