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를 위한 설교비평(2)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들어가는 말
설교비평(Sermon Criticism)이란 단어는 널리 알려진 용어가 아니다. 영어권에서도 설교비평이란 말은 잘 쓰이지 않는 용어이며 필자의 한계적 연구를 통해서는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영문으로 된 책을 만날 수도 없었다. 비평이란 말 자체가 어떤 대상을 분석한 후 논리적인 평가를 내리는 작업이라면 사실 설교에 대한 비평이 인쇄된 책이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설교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지니지 않았다 하더라도 많은 교인들은 설교에 관하여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리고 나누기도 한다. 다행히 한국교회에 근간에 설교비평이란 이름이 회자되면서 설교자에게는 신선한 도전이요 강단에는 역동적인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비평이란 부정적인 비판에만 머물 수 없다. 설교비평이란 설교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통해 사람들에게 그 사람과 설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력을 돕고, 바람직한 설교에 대한 그림을 그려주며, 또한 설교를 하는 당사자에게는 이를 통해 설교의 발전을 꾀하여 결국 한국교회 강단을 말씀에 근거하여 새롭게 세우는 데 있어야 한다.
금번에 한국설교학회에서 한국교회 설교비평에 대한 논의를 주제로 삼고 집중적인 연구를 시작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먼저 설교비평이란 이름이 막 유행하는 이 시점에 한번쯤은 지금까지의 논의들을 묶어 정리할 필요가 있다. 또한 현재의 설교비평이 대부분 전문적인 설교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보다 교회사 학자들이나 일반 신학자들에 의해 주도되기 때문에 설교학자의 시각에서는 바로 세워야 할 점 역시 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교회에 바람직한 설교비평의 학문적 정착을 위해 성경적인 설교학에 근거하여 바람직한 설교비평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은 큰 의의가 될 것이다. 이번 학회의 발제와 토론을 통해 한국교회에 설교비평이란 장르가 한층 더 발전되어 설교비평에서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는 한국의 목회자들에게 큰 도전으로 제시되어 성경적인 설교에 대한 거대한 바람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현실을 고찰하고 바람직한 설교비평을 위해 몇 가지 요구되는 것을 제언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현재까지 한국교회에 설교비평이 어떻게 시도되었는지 그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 설교비평의 내용에 대한 분석과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마지막으로 바람직한 설교비평이란 학문이 한국교회에 자리 잡기 위하여 다섯 가지를 제언하고자 한다.
I.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간략한 역사
한국교회 설교비평에 대한 역사는 문자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매우 오래되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설교비평이란 이름으로 구체적으로 문자화된 것으로 1990년도 이전의 출판물을 쉽게 발견할 수는 없었다. 설교자 연구와 그의 몇 편의 설교를 연구한 것에 대한 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정성구 교수는 1986년 발간한 『한국교회 설교사』에서 한국교회의 초기 선교사들과 초기 한국교회 설교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교회를 대표한 설교자들을 소개한다.1) 그의 연구는 김장호 목사로부터 시작되어 길선주, 김익두, 이성봉을 다룬다. 그리고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신비주의로 알려진 이용도 목사의 설교를 다루고 1930년대를 지나면서 김화식과 주기철 그리고 손양원과 박형룡 그리고 한상동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 책은 설교에 대한 본격적인 비평이라기보다 “지난 100년 동안에 강단에 외쳤던 메시지를 설교학적으로 정리하면서 새롭게 조명해” 볼 목적으로 썼다는 저자의 서문처럼 한국교회 설교사에 빛나는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조명이라 말할 수 있다.2) 정성구의 책은 비록 설교학을 전공한 학자는 아닐지라도 설교자에 대한 조명과 설교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대단히 균형 잡힌 연구로 보인다. 정성구의 저술은 비록 설교비평을 지향하면서 집필한 책은 아닐지라도 100년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설교자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로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것이다.
본격적인 설교비평이라고 할 수 있는 초기의 책으로는 1997년 4월 10일 초판이 발행된 정장복 교수의 『설교의 분석과 비평』이 있다.3) 이 책은 저자가 지난 2년 동안 <월간목회>에 연재한 글들을 모아 출판한 것으로써 자신의 설교를 스스로 평가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설교는 모두 3부로 나뉘어 소개되는데 1부에서는 분석 설교, 2부는 대지 설교, 그리고 3부는 설화체 설교라는 이름으로 설교 장르로 나누고 해당되는 설교를 각각 8편, 6편, 4편을 소개한다. 정장복은 한 편의 설교가 나오기까지의 구체적인 과정을 다루고 자신의 설교에서 부족한 점들을 신랄하게 평하고 있다.
1996년대에 이르러 한국교회사학 연구원에서는 한국교회 10대 설교자를 선정하고 해마다 한 사람씩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제일 먼저 설교가 연구대상으로 조용기 목사가 선정되었고 뒤이어 김선도, 곽선희, 이만신, 그리고 김장환 목사가 연구대상이 되었다. 처음에 연구된 다섯 사람의 연구를 모아 2000년에 『한국교회 설교가 연구』라는 제목으로 출판한다.4) 그 다음 연구대상으로 선정된 사람은 옥한음, 김삼환, 길자연, 이종윤, 그리고 2005년도 하용조 목사를 마지막으로 10대 설교자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5)
2000년대에 이르러 설교비평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가장 먼저 설교비평에 포문을 연 것은 2001년 1월에 한종호의 『전병욱 비판적 읽기: 설교비평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라는 제하의 책이다.6) 전병욱 목사의 책과 설교를 꼼꼼하게 읽고 그에 대한 날카로운 해부를 시도한 이 책은 비록 한 사람에게 집중된 비평이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한국교회 설교비평에 대한 신호탄을 울렸다. 몇 년 후 설교비평은 조금 더 제 모습을 찾아가는데, 2004년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판된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에서는 보다 발전된 설교비평의 면모를 보인다. 이 책에서는 곽선희, 김진홍, 조용기, 김선도, 옥한음, 홍정길, 하용조, 이동원, 김홍도, 김삼환, 김동호, 김남준, 김서택, 강준민, 그리고 전병욱 등 해방 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16인의 설교자들을 다룬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설교자들의 설교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과히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주춧돌을 놓았다고 할 만하다.
2006년도에 이르러 한국교회 설교비평에 한 획을 그을만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정용섭이 지난 몇 년간 <기독교사상>에 연재해 온 설교비평을 묶어 『속 빈 설교 꽉찬 설교』란 이름으로 세간에 소개했고 이 책은 마치 1971년 『권위 없는 자처럼』(As one Without Authority)이란 책으로 미국의 설교학계에 코페르니쿠스적 대변환을 가져온 프레드 크래독(Fred Craddock)의 책처럼 한국교회 설교비평이라는 이름을 제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전의 설교비평이 주로 설교와 목회세계에서 알려진 최고의 고수들을 소개했다면 정용섭의 설교비평은 각기 나름대로 설교의 획을 긋고 있지만 10대 설교자 또는 20대 설교자 하면 소개되지 않을 뻔한 사람들까지도 발굴하여 소개했다는 점에서 이미 신선함과 다양함을 제공한다.
첫 비평의 도마에 오른 사람으로 김기동, 김기석, 김남준, 김동호, 김진홍, 박영선, 박옥수, 박종화, 윤석전, 이재철, 임영수, 조용기, 그리고 하용조 목사가 있다. 정용섭의 『속 빈 설교 꽉찬 설교』의 효과가 한국강단에 거대한 파도를 몰고 올 때 그는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라는 설교비평 시리즈 제 2권을 소개한다. 이번에 설교비평의 대상이 된 인물로는 김상복, 김서택, 김지철, 민영진, 송기득, 이동원, 이성희, 이정익, 장경동, 전병욱, 정필도, 최영기, 릭 워렌, 로이드 존스 목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최근까지도 <기독교사상>을 통해 계속해서 김영봉, 옥한음, 이민재, 판넨베르그 등을 소개하고 그들의 설교를 심층적으로 비평한다.
2007년에 접어들어 <그 말씀>에서는 한국교회 10대 설교자들을 선정하여 격월로 소개한다. 현재까지 이동원, 곽선희, 옥한음, 홍정길, 김삼환 등의 설교가 연구되고 있다. 이 연구 프로젝트는 먼저 10대 설교자 대상에 오른 설교자와의 대담을 시도하고 그들의 설교를 연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연구자들은 모두 설교를 전공하는 분들이라는 점에서 그 전문성을 인정받으나 설교전반에 대한 비판의 성격보다 설교자를 소개하고 설교에 나타난 긍정적 특징을 정리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그 외 설교비평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비록 한국교회 설교자는 아니지만 <월간목회>를 통해 30차례가 넘도록 김기홍은 해외 설교자들과 설교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류응렬 역시 2006년부터 월간 <프리칭>을 통해 지난 2000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설교자들과 21세기의 설교자들을 동시에 다루면서 한 편씩의 대표적인 설교를 소개한 후 세밀하게 비평하고 있다. 류응렬의 설교비평의 특징은 한 편의 설교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면서 한국교회에 던지는 교훈을 찾고자 하는 데 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살펴본 것처럼 한국교회의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비평은 약 20년 전 혹은 그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설교비평이란 이름으로 소개된 것은 약 10년 전으로 볼 수 있다. 본격적인 설교비평이 자리 잡고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매우 최근의 사건으로 2001년 출간한 『전병욱 비판적 읽기』와 2004년의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 그리고 정용섭의 두 권의 설교비평 『속 빈 설교 꽉찬 설교』와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라고 할 수 있다.
II.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지금까지 필자는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역사를 중요한 출판물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고찰했다. 이제부터 지금까지의 출판된 책을 중심으로 설교비평을 분석하고 평가를 내리고자 한다. 분석 및 평가 대상으로는 2000년도 이후에 출간된 본격적인 설교비평이라 할 수 있는 네 종류의 책, 즉 한국교회 사학 연구원의 『한국교회 설교가 연구』와 한종호의 『전병욱 비판적 읽기』 그리고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와 정용섭의 두 책들을 다루고자 한다.
1. 박명수 외 『한국교회 설교가 연구』
『한국교회 설교가 연구』는 한국을 대표할 만한 설교자 10명을 선택하여 해마다 각 분야의 전문가에게 연구를 의뢰하여 10월 말에 발표회를 가진 후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이 책은 한국교회 설교비평이라는 배를 만들기 시작한 출발점으로 보인다. 처음 5년간 연구 대상이 된 설교자로서는 오순절 교단의 조용기, 감리교의 김선도, 장로교의 곽선희, 성결교의 이만신, 그리고 침례교의 김장환이다. 처음 5년 동안에는 설교자 대상 선정에서 교단 안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이 보인다. 다음에 선정된 5인은 모두 장로교 목사이다.
이 연구는 한 사람의 설교자에 대한 집중적이면서도 다양한 면의 연구를 동시에 진행했다는 점에서 설교자와 설교에 대한 균형 잡힌 연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용기 목사에 대한 연구로서 박명수는 “오순절 운동과 조용기 목사의 신학”을, 서정민이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설교사 이해”를 연구하고 임승안이 “역사신학의 입장에서 본 조용기 목사의 신학”을 이호열이 “조용기 목사의 설교에 대한 목회학적인 입장에서의 평가”를 통해 다양한 각도에서 조용기를 평가한다.7) 한사람의 설교는 단순하게 본문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이들은 설교자인 동시에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들이기도 하다. 강단에서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단순히 본문을 풀이하는 주해가로서나 청중을 이해하는 전달자로서의 모습뿐 아니라 설교자의 전 인격과 삶이 투영된 궤적이다. 따라서 한 사람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그 사람의 배경과 그의 신학 그리고 그의 설교에 대한 철학 등 다양한 것이 요구된다. 적어도 한 인물에 대해 세 사람 이상의 연구자를 세운 것은 객관적인 연구와 다양한 시각에서의 평가를 시도함으로써 한 설교자에 대한 전 삶을 연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클 것이다.
설교비평이라는 입장에서 이 책과 연구들을 보면 결정적인 한계가 발견된다. 무엇보다 설교자에 대한 연구가 한 사람의 설교에 대한 연구가 아닌 “설교자” 자신에 집중한 연구라는 점이다. 물론 설교란 설교하는 사람의 전 인격을 통과해서 선포되는 종합예술과 같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주변 연구와 지식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주변만 훑어보다가 정작 중요한 설교 자체를 보지 못한다면 설교비평이라기보다 오히려 인물비평에 가까울 수 있다.
설교비평 자체에 대한 아쉬움은 집필진에서부터 발견된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교회사 교수이거나 성경신학 교수들로 구성되어 있고 설교학을 전공하는 교수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집필진들의 이러한 특성이 연구방향을 한 사람의 신학과 목회의 과정이나 그의 목회특징 혹은 설교에 대한 단층적인 연구에 그치는 가장 큰 이유로 보인다. 박종현 교수는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아쉬움을 표현한다.
다만 이 책의 연구자들이 교회사가들이 대부분이어서 설교 연구를 위한 설교학적 측면이 소홀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은 이런 연구가 처음 시도되었다는 점에서 차후의 연구서의 발표를 통하여 적절하게 보완될 것으로 생각된다.8)
2. 한종호의 『전병욱 비판적 읽기』
2001년 2월에는 본격적인 설교비평의 장이 열린다. 설교비평이라는 장르의 배에 돛을 올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온라인 신문인 <뉴스앤조이>의 창간을 기념하면서 그간 발표한 기사들을 묶어 『전병욱 비판적 읽기』라는 책에서 한종호 목사는 전병욱 목사의 설교에 관하여 세밀하게 평가한다. “설교비평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라는 이 책의 부제처럼 한종호의 책은 가히 설교비평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많은 대중으로부터 한국 강단을 대표할 만하고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인정받는 젊은 목사를 설교비평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의미를 지니지만 그 비평의 수위가 매우 정교하고 날카롭다는 데서 제대로 된 비평의 효시라 할 만하다. 당시 시대적 요구를 가장 잘 흡수하여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전병욱을 대상으로 한 것은 어쩌면 그의 사상과 맥을 같이하는 한국교회에 대한 성찰을 시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앞길이 창창한 한 젊은 목사를 겨냥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세상에 내어 놓는 이유를 한종호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전병욱 목사 개인에 대한 옹호나 비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설교와 신학적 사고에 깊이 스며 있고 또 거기에서 드러나는 문제들에 주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병욱 목사의 경우 대표적으로 노출되었다 뿐이지 오늘날 한국교회 전반에 걸친 문제들이기 때문입니다.9)
그의 고백대로 전병욱을 제대로 읽어내면 한국교회의 설교 흐름을 이해할 수 있고 그를 제대로 비평한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설교비평을 대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종호가 지적하는 전병욱의 설교에 나타난 문제는 크게 네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비록 그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책임지는 젊은 목회자 세대의 대표주자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그의 신학이 나사렛 예수의 삶이 지향하는 바와 배치되고 각종 인문, 사회과학적 분야에 대한 무지에 기초한 문제투성이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둘째, 한종호는 전병욱에 대해 이토록 젊은 나이에 “구세대의 성장주의 논리와 입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가에 대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결국 전병욱의 논리 역시 기존에 지탄의 대상이 된 대형교회주의자들의 시각과 일치되고 있어서 그를 교정하고자 하는 소원에서 비판에 대한 비판을 각오하면서 총대를 맨다. 셋째, “전병욱 목사의 신학적 모순과 한계를 명확하게 밝혀 나가는 과정을 통해 목회 현장의 진로를 구체적으로 정립”해 나감으로 현세의 요구에 영합하지 않고 한국의 기독교적 상황을 주도할 수 있는 창의적 시도를 위해서다. 넷째, 한종호는 “전병욱 목사의 신학과 신앙에는 바로 한국교회의 모순과 한계가 매우 뿌리 깊게 투영되어 있기에” 이러한 기획기사를 통해 전병욱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기독교가 안고 있는 총체적인 문제점들을 성찰해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10) 그가 지적한 네 가지의 문제는 전병욱 읽기 곳곳에서 나타난다.
한종호의 전병욱 연구는 그의 설교뿐 아니라 책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마른 뼈도 살아날 수 있다』, 『낙타무릎』, 『파워 전도서』, 『부흥.com』 등에 나타난 전병욱이란 한종호의 눈에는 젊은이들에게 ‘성취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설교선동가로 보인다. 젊은이들이 최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시장의 논리에 부합하여 그들의 억눌린 또는 잠재된 성공본능에 성경적인 자극을 가함으로 에너지를 폭발시켜 준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에너지 폭발이 신앙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짐으로써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성공해서 되는가’라는 성공 기피 신드롬에 양약을 제공하고 혹 성공신화에 따르는 양심의 가책에 면죄부를 던진다. 한종호의 눈에 전병욱의 복음은 고난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아니라 기독교를 자신의 꿈을 성취하고 개인적 출세를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는 고등한 종교적 야심에 불과하다.
전병욱 목사가 청년집회에서 “꿈”이라는 주제 아래 세 번 행한 강연 가운데 ‘야베스’라는 인물에 대한 설교를 두고 한종호는 비록 “존귀한 자아의식을 불어넣어 힘찬 기백과 자존의 능력을 가지도록 하는 것은 그 의도에 있어서 외견상 일단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병욱이 주는 위험성에 관하여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메시지는 이 세상에서 강한 자, 능력 있는 자가 되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경쟁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한 인간형이자, 그 지향하는 바에 대한 가치 판단 없이 ‘믿고 하면 된다’ 식의 개발독재형 밀어붙이기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이 점을 주시한다면 그의 논리와 신학적 설파는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새롭게 창조하시고자 했던 인간형은 그러한 유형과는 완전히 대립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11)
전병욱의 설교에 대한 한종호의 비평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비인격적인 설교자, 어른들에 대한 비하적 발언을 일삼는 설교자, 비기독교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의 설교자, 성공지향적이고 성장주의적인 교회관의 소유자, 자기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교만한 설교자, 한 마디로 예수님과 성경을 모르고 세상과 성공에 집착하는 설교자, 그리고 은혜를 모르고 능력과 성취 그리고 엘리트주의에 빠진 착각자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전병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복음을 왜곡하여 자기 발전과 성취를 위한 인간 심성에 신앙의 이름으로 바람을 불어넣는데 성공한 설교자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한종호의 전병욱 비평은 설교비평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해도 지나친 평가는 아니다. 한종호는 전병욱의 책과 설교를 세밀하게 읽고 듣고 난 후 정교하게 비평한다. 전병욱의 겉모습이나 책과 설교에 대한 대충 대충의 비평이 아니라 그의 책과 설교에 정확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설교비평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효시가 될 만하다. 이전의 설교비평이 주로 인물의 사상이나 신학 또는 목회관에 치우쳤다면 한종호는 설교를 통해 인물의 사상과 신학 그리고 그의 세계관을 총체적으로 관찰한다. 설교를 통해 전병욱의 내면세계까지 정돈하려 했던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전병욱 읽기와 씨름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필자는 그의 비평을 읽으면서 전 목사의 설교에서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면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그의 혜안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가 많았다.
한편 한종호의 비판에는 전병욱의 설교에 나타난 의도와 다르게 비평가가 의도하는 대로 해석해 가는 느낌이 자주 발견된다. 하나의 텍스트를 비평한다는 것은 저자의 의도를 좇아 그 의도를 존중하고 그 의도대로 이해한 바탕 위에 비판을 가해야 객관적일 수 있다.12) 예를 들어, 전병욱의 설교 가운데, 유럽에 불어 닥친 태풍 때문에 200년 이상 된 나무가 뿌리 채 뽑힌 것을 보면서 “하나님, 이러한 성령의 바람을 이 한반도에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모습이 나온다. 한종호는 태풍 같은 성령의 은혜를 간구하는 전병욱의 설교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태풍으로 인한 피해로 신음하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는 현실에서 이런 식의 기도를 통해 성령의 바람 운운하는 것은 잘못 아닐까요? 이렇게 고난의 현실에 무감각할 수가 있을까요?13)
현실의 고난에 대한 깊은 인간이해와 고난 받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은 전병욱의 설교전면에 나타나는 사상이기에 전혀 불합리한 비판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이 대목에서 그의 고난에 대해 무관심을 운운하는 것은 아무래도 저자를 설득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이 정도의 비판은 이해할 만하다. 설교에서의 예화란 의미가 통한다고 무작정 제시할 것이 아니라, 그 예화가 듣는 사람들을 세울 수 있는지 즉, 건덕의 의미에서 살펴야 한다. 강한 이미지를 남길 수 있다 할지라도 나의 예화를 통해 혹시라도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바람직한 예화가 될 수 없다. 우리나라에도 태풍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들에게는 ‘태풍’이란 이름만 들어도 아픈 상처가 살아날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한 목사의 표현은 저자의 의도에서 멀리 벗어나 외치는 독백처럼 들린다.
기본적으로 전병욱 목사는 인간의 고난, 그 삶의 아프고 쓰린 사연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처지에서 잘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곤고함에 대하여 이해가 빈곤합니다. 이것은 목회자로서의 근본적인 자질에 중대한 결함이 됩니다.14)
태풍과 같은 성령의 바람을 가지고 인간 고난에 관심 없는 목사로, 사람의 곤고함에 무지한 설교자로 규정하고 결국에는 자질 없는 목회자로 단언하는 그의 평은 아무리 생각해도 심하다는 느낌이다. 설교 비평가는 설교에 나타난 사상, 즉 설교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설교자의 의도를 존중하여 해석하고 평가해야 정당성을 보장 받을 수 있다. 저자의 의도를 벗어난 비판은 “이놈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놈이야”라는 아버지의 고백을 “이런 사람은 어린 아이를 눈에 넣는다는 일이 불가능한 것을 모르는 무지한 자이며, 결코 넣지도 않을 것을 자기 과대망상에 빠져 표현한다”라고 비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종호의 비평은 비평의 한 측면 즉 부정적인 면에만 머문다는 느낌이다. 시종일관 그의 비판은 비평이라기보다 비판에 가깝다.15) 때로 그 비판이 전병욱에 대한 약간의 선입견이나 한 쪽만을 고집하는 자세에서 나오지 않는가까지 의심하게 한다. 예를 들어, 전병욱은 신앙생활에서 십자가의 복음의 원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슬람교도들, 즉 펀더멘털리스트를 언급하면서 원리주의자들의 강력한 헌신을 예로 든다. 이에 대한 반발로 한종호는 펀더멘털리스트는 해악적인 존재이며 “기독교 펀더멘털리즘과 회교도 펀더멘털리즘은 공히 교조적 교리를 내세워, 종교의 생명력을 박탈하고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16)라고 공격한다. 한종호의 눈에 비치는 전병욱은 어떤 말을 해도 이미 그의 눈 밖에 난 사람처럼 여겨진다. 전병욱에게 그런 요소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요소만을 고집하며 보려 하기 때문이다. 정당한 설교비평이란 설교의 빛과 그림자 양면을 주의 깊게 살피는 객관적인 시각을 요구한다. 좋은 점은 바르게 지적함으로 살려내고 잘못된 부분은 과감하게 파헤쳐 수술하는 균형이 유지될 때 설교비평은 한국교회 강단을 바람직하게 세우는데 기여할 것이다.
3. 유경재 외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
2004년 10월 18일은 한국교회 설교비평에 새로운 막을 올린 날이다. 설교비평이라는 배가 공식적으로 항해를 시작한 날로 기록될 수 있다. <기독교사상>은 서울 종로 5가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교회 설교를 말한다’를 주제로 한국에서 가장 성공했다고 알려진 목사들 16명의 설교를 분석하고 비평하는 심포지엄을 가졌다. 이 날의 토론은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 출판을 기념하면서 이 책에 대하여 요약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기독교사상> 2004년 8월호 광고에는 16인의 설교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동기가 나타난다.
한국교회 강단은 거의 ‘폐쇄된 성역화’였습니다. 이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내세워 설교자 개인의 욕망을 채우려 들거나 교권적 군림을 꾀한다든지, 삶과 시대적 상황으로부터의 유리, 설교로 포장된 신변잡기적 잡담, 설교로 포장된 이데올로기 또는 정치적 이기심을 포장하는 경우와 오도된 역사인식을 주입시키는 사례들은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위의 광고에 나타난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는 결국 목회자요 설교자의 문제로 귀결된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 드는 청지기가 아니라 말씀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도구화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킴으로 설교를 잡담의 수준으로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설교에서 찾아보고자 하는 고심으로 시작되었다.
현재 한국교회의 강단에 나타난 문제점들 그리고 16명의 설교자들이 공유하는 문제들은 유경재의 “실존과 역사의 언저리에 서서”라는 제하의 글에 잘 지적된다.
지금 한국교회 강단의 위기는 교회가 사회적 영향력을 잃음으로 이 사회에서 퇴출당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과거로부터 탈피하여 스스로를 개혁하고자 몸부림치고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런 사회적 변화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 영토의 확장과 성장만을 위해 ‘올인’하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교회는 사회개혁이 오히려 교회 부흥의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다.17)
이 책에서 말하는 한국교회 설교의 문제는 유경재의 지적처럼 세 가지로 집약된다. 이 세 가지는 16인의 설교에서 찾아낸 공통점이라 할 수 있는 동시에 결국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첫째,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설교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신학이 없다”는 점이다. 신학이 부재함으로 “성서해석을 자의적으로 흐르게 만들고, 주어진 현실과 타협하게 만든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삼박자 구원’과 ‘청부론’이다.”18) ‘삼박자 구원’이란 조용기 목사가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것’이다. 김세광은 “삼박자 구원. 오중복음에 묻혀버린 역사”의 제목으로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평가하면서 그의 설교가 개인구원에 집중된 삼중축복의 잣대를 넘어 인격과 사회적 성숙을 포괄하는 구원의 메시지로 나아갈 필요성을 역설한다.19) ‘청부론’은 김동호 목사가 기독교의 논리는 청빈이 아니라 청부라고 주장하면서 회자된 말이다. 김회권은 “성숙의 울타리를 넘어 교회의 영광을 꿈꾸는 설교”에서 김동호의 청부론 사상이 기독교회사에 계승되어온 영적 지도자와 영성적 이미지에 배치된다고 지적한다.20) 비록 삼중복음이 실의에 빠지거나 나약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제시하고 기독교란 이름과 가난을 동일시한 이 땅의 젊은이들과 성실한 경제인들에게 신선한 동기부여를 심어주었지만 기독교를 지나치게 개인적 영역에 빠지게 한 것과 영적 면죄부를 준 점들은 비판적 대상임을 밝힌다.
두 번째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는 잘못된 교회론에서 비롯된다. 즉 “교회 중심의 교회론”이 바로 문제다. 교회성장을 하나님의 나라와 직결시켜 이해하는 문제는 개 교회 성장주의로 목회자들을 몰아가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라는 거시적 공동체의 모습은 사라지고 개인주의 신앙을 강조하는 기복신앙을 배태한다. 유경재는 이러한 교회성장을 위한 교회론 대신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는 “역사적, 종말론적 공동체로 이해하는 새로운 교회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21) 공동체에 대한 총체적 시각을 상실한 채 개인주의 또는 개 교회주의에 빠진 작금의 교회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거의 모든 설교자들에게 주어진 공통적 비판이다.
한종호는 “개인주의적 ‘은혜론’과 ‘강청기도론’이 빠지는 함정”이란 제목으로 강준민 목사의 설교를 십자가가 사라진 설교라고 지적하고 사회 속에 교회의 책임 있는 행동이 사라진 경영학 강의 같은 그의 설교를 비판한다.22) 이상훈은 역시 “공존의 틀을 벗어나는 엘리트 의식”이라는 제목으로 옥한음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그가 한스 퀑의 영향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전조임을 인식하고 교회와 세상이라는 이원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여전히 ‘사랑의 교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지적한다.23)
개 교회 성장 중심으로 치우치는 경향은 한국교회 강단의 세 번째의 문제인 “역사의식의 결여”와 직결된다. 설교가 예언적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이다. 혼란한 시대적 상황 속에 한국교회 강단은 기독교인으로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신앙생활에만 집중한다는 말이다. 그는 16인의 설교 가운데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공통적으로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24) 한국강단의 역사의식 결핍 내지 부재현상은 역사와 사회 앞에 책임의식의 부재라는 말과 직결된다. 실재로 역사의식에 대한 비판은 많은 설교자들에게 동일하게 나타난다. 차정식은 “복음과 교양이 만나는 방식”이란 글에서 곽선희 목사의 설교를 “제한된 역사의식”으로 규정하고 역사에 대한 책임정신에서 침묵하는 그를 “역사허무주의 혹은 회의주의”로 평가한다.25) 김세광은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삼박자 구원. 오중복음에 묻혀버린 역사”라는 제목으로 그의 설교가 한국과 세계를 대표하는 교회로서 개인적 기복신앙에 치우친 나머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못한 점을 지적한다.26) 한종호는 전병욱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세속적 성공주의와 역사의 왜곡”이란 제목으로 그의 설교가 서구의 정의와 강자의 승리를 전제로 한 역사관에 근거한다고 지적한다.27)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는 몇 가지 면에서 한국교회 설교비평에 획기적인 선을 그었다. 첫째, 한국교회 대표적인 설교자들을 그 어두움과 빛을 균형 있게 조명하면서 심도 있게 다루었다. 한종호의 책이 다소 부정적인 비판에 일관했다면 이 책은 한 설교자들의 실과 허를 제대로 평가했다고 보인다. 특히 그들의 설교집과 설교를 직접 듣고 비평한 것은 설교비평이 자칫 인물에 머물기 쉬운 한계를 잘 극복했다. 설교와 설교자는 불가불리의 관계이지만 설교자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설교로 들어가지 않고 설교를 통해 설교자를 읽어 들어간 점에서 객관성과 치밀함을 보인다.
둘째, 설교비평의 질에 대한 문제와 이 책이 불러올 순반응에 대한 기대다. 필자는 16인의 설교비평을 읽으면서 평가자들의 연구에 대한 대단한 열정과 탁월한 분석력과 평가에 놀란다. 이 책은 대부분의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가지는 민족과 역사의식의 부재 그리고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의 부재, 개인주의에 사로잡혀 공동체성의 교회론을 상실해 버린 목회철학, 그리고 명확하지 않는 설교철학으로 말미암아 청중의 마음에 영합하는 설교로 경도된 한국교회 강단을 잘 보여준다. 설교자들에 대한 피상적인 평가 혹은 몇 군데 설교에 관하여 언급하는 정도로 피해 가지 않고 설교를 치밀하게 읽고 듣고 정밀하게 분석하고 때로는 가차 없는 메스로 상처난 곳을 도려낸다. 이런 평가는 설교비평의 당사자들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모든 설교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한국교회 설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간접적인 제시의 역할도 한다.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가 비록 한국교회 설교비평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의 일정한 설교신학에 근거하여 객관적인 설교비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보인다. 설교비평이란 일정한 설교신학에 근거하여 체계적인 잣대를 지닌 채 한 사람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일이다. 물론 일정한 설교신학이라고 해도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체계적인 잣대를 규정하는 일은 두 사람만 모여도 일치를 보기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다. 따라서 8명이라는 비평가에게 한 가지 설교신학과 동일한 시각으로 텍스트를 읽어내는 눈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요구다. 그러나 책이란 독자가 읽기를 목적으로 하고 특히 설교자들은 이 책을 통해 설교에 대한 하나의 바람직한 철학을 세우기를 원한다.
예를 들어,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믿고 본문을 풀이하는 설교를 장점으로 인식하는 비평가가 있는가 하면 이를 극단적 근본주의적 영향이라고 판단하는 비평가도 있다. 적용이 뛰어난 점을 장점으로 여기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설교자의 사명은 본문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그칠 뿐 적용까지 나아가는 것을 거부하는 시각도 있다. 여러 사람에게 한 시각을 요구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어쨌든 설교신학의 다양함으로 말미암는 혼란은 독자들이 감수해야 하는 몫이다. 이러한 현상은 설교비평에 어느 정도 일치를 볼 수 있는 설교신학 또는 비평철학이 먼저 제시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설교비평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이다. 설교비평이란 비평가에게 장단점을 골고루 볼 줄 아는 눈을 먼저 요구한다. 장점을 더욱 살려내고 단점에 대한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비판과 바람직한 방향의 제시가 주어질 때 설교비평이 설교발전이라는 대사명에 기여할 수 있다. 시종일관 지정된 설교자에 대해 긍정적 자세로 평가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초반부터 아예 은혜 받기를 거부한 사람처럼 펀치를 날리는 비평가도 있다.
4. 정용섭의 『속 빈 설교 꽉찬 설교』와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2006년 12월, 한국교회는 설교비평이라는 장르가 드디어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되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을 맞는다. 정용섭 목사가 그간 <기독교사상>에 연재하던 설교비평을 『속 빈 설교 꽉찬 설교』로 출판한 것은 지금까지 ‘설교비평’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던 사람들 머릿속에 ‘설교비평’은 정당하고도 당연한 하나의 학문분야로 자리매김을 시켜주었다. 세간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는 2007년 2월 두 번째 설교비평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를 출간한다. 한국교회 설교비평이라는 배가 드디어 망망대해를 항해하게 된 것이다.
신학대학원에서 설교학을 가르치는 필자에게 올해 가장 빈번하게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정용섭의 설교비평’에 관한 ‘비평’이다. 필자는 올해 5월 고려신학교 신학대학원의 초청으로 개혁주의 설교가 나아갈 과제에 관하여 발표했다. 초청된 또 한 분이 정용섭 목사였다. 평소 그의 신학과 설교학적 관점을 고려하면 고려신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초청한 것이 매우 의아하게 보이지만 그만큼 그의 책이 몰고 온 파장은 광범위하고도 신속했다는 말이다. 정용섭이 『속 빈 설교 꽉찬 설교』 머리글에서 밝힌 말은 특히 오늘날 설교학자들에게 강한 도전처럼 들려온다.
특히 설교비평의 대상이 된 분들이나, 설교비평에 관심이 많은 설교학 전문가들로부터 어떤 반응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큰 아쉬움이다. 이런 현상은 아마 신학과 교회의 철저한 소외, 또는 모종의 은밀한 결탁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된다.28)
이제 정용섭은 자신이 홀로 싸운 무대에서 그렇게 아쉬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2007년도 2월 3일과 10일 두 번에 걸쳐 김동호 목사가 자신의 설교평에 대한 반응을 ‘높은 뜻 숭의교회’ 홈페이지에 올리는 것을 포함하여 <기독교사상>에서는 정용섭의 비평에 대한 응답을 실어주고 있다.29) 자신의 설교비평에 대한 설교학 전문가에게 아무런 반응을 접하지 못한 것을 “신학과 교회의 철저한 소외”라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치부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어쨌든 이번 한국설교학회에서 설교비평을 주제로 삼고 특히 그의 ‘설교비평’을 ‘비평’하는 것이 그에게는 매우 반가운 일이 되리라 생각한다.
정용섭은 한국교회 설교자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결정적인 문제로 『속 빈 설교 꽉찬 설교』에서 “성서 읽기의 아마추어리즘”으로 보며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미국 근본주의의 특징인 평신도 성서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한다.30)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는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문제를 두 가지로 규정한다. “하나는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성서 텍스트가 해석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31) 그가 보는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문제는 한 마디로 설교에 성경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성경이 나타날 때도 해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정용섭은 인문학과 조직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것을 강조한다.
성경이 제대로 해석되지 않는 한국교회 강단이라는 정용섭의 평가는 정당하다. 현재 한국교회 강단은 성경말씀이 정직하게 선포되는 자리라기보다 사람의 말이 무성한 강단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점점 사라지고 사람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자리에 인간의 고양된 윤리와 철학이 차지한다. 정용섭은 “예언과 선동의 갈림길에서”라는 제목으로 김동호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심지어 “그의 설교 내용이 비평의 대상이 될 만큼 충실하지 않다”고 혹평한다.32) 김동호 목사에 대한 그의 평은 조금의 우회도 거부하고 직격탄을 날린다. “그토록 확신에 찬 어조로 선포된 그 설교의 내용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빈약했다. 그의 설교에는 신앙간증 이상의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인내심을 발휘해서 15편을 다 읽고 난 뒤에도 복음을 듣고 싶다는 그 기대는 채워지지 않았다.” 정용섭은 김 목사의 설교가 지닌 선동적인 성격으로 “하나는 본말을 뒤집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실을 왜곡한다는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감동적인 이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는데, 그의 설교에는 바로 그것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사족 역할만 할 뿐이다.” 결국 김 목사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실종되고 말았다”고 평가한다.33)
“영웅 이야기에 밀려난 하나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김진홍 목사의 설교를 비평한 정용섭은 본문에 대하여 한마디도 하지 않는 그의 설교를 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태도가 왜 그렇게 불성실한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꼬집는다. 정용섭의 눈에 “김 목사의 설교가 본문에 충실하지 않은 이유는, 김 목사가 성서 텍스트 안으로 들어갈 능력이 없으며, 그럴 생각도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34) 김진홍 목사처럼 본문에서 때로는 깊은 인사이트를 뽑아내는 설교자도 흔하지 않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의 비판은 너무나 통렬하게 들려온다. 주로 영웅적인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을 감동적으로 부각시키는 그의 설교를 보면서 “김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는 듯”하고 “성서 텍스트에 의존하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고 싶어한다”고 종합한다.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성경의 텍스트를 다루지 않고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은 거의 모든 설교자들에게 주어지는 공통적인 지적이다. 정용섭은 대표적인 설교자가 범하는 이러한 오류가 결국에 한국교회 강단을 성경이 아닌 다른 것으로 물들일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한다. 미국 휴스턴서울침례교회를 담임하는 최영기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정용섭은 이렇게 밝힌다.
그의 설교가 성서 텍스트의 깊이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왜곡하는 평신도 수준의 설교라는 사실은 앞으로 내가 그의 설교를 듣지 않으면 해결되겠지만, 그에게 드러난 문제가 한국교회 설교자의 일반적 현상일지 모른다는 사실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청중의 심리적, 종교적, 윤리적 요구를 해소시켜 주는 설교만을 졸속으로 생산해내는 오늘의 강단은 곧 한국교회의 미래와 직결된다.35)
지금까지 정용섭의 설교비평 가운데 그가 가장 강조하는 성경본문을 다루지 않는 예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정용섭의 평에 따르면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는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성경본문을 아예 무시하고 다루지 않는다. 그의 눈에 이러한 현상은 때로 성경을 다룰 줄 아는 능력의 결핍으로 보이며 성경을 대하는 불성실한 태도에 기인하기도 한다. 둘째, 성경을 다룬다 할지라도 거의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거나 평신도의 큐티 정도에 멈추어 서서 종말론적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는 해석학이 부재하다. 결국 성경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 강단은 설교자 자신의 무용담이나 감동적인 예화의 자리로 전락하고, 이는 장차 기독교를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정용섭의 설교비평은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설교비평의 장르를 본선무대에 올려놓을 만하다. 첫째, 정용섭은 한국교회 강단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한다. 설교자들이 성경본문을 제대로 다루지 않거나 제멋대로 다루는 문제는 필자의 눈에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에 사람의 말이 지배적으로 차지한다. 설교자에게 주어진 유일한 특권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날 시대에 알맞게 전하는 것이다. 설교자란 예수님이 오늘날 이 자리에 계신다면 주어진 본문을 통하여 전하실 그 말씀을 대신 전하는 사람이다. 회중 가운데 예수님이 나의 설교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시는가 아니면 당신이 하지 않은 말을 전하는 설교자를 보면서 안타까워하실까? 설교자는 예수님의 눈에 늘 시선을 맞추고 설교해야 한다.
둘째, 정용섭의 설교비평에 대한 엄청난 그의 노력과 열정은 충분히 인정받을 만하다. 그는 매달 한 설교자의 설교를 이해하기 위해 때로는 수십 편의 설교를 읽고 동영상에 나타난 설교를 경청하고 그가 쓴 책을 몇 권이고 탐독한다. 한 사람의 설교를 듣고 읽고 정확하게 평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5월의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강연에서 그는 필자에게 설교비평을 매달 쓴다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런 작업이어서 3권을 발행하고 나면 그만두겠다는 심증을 밝혔다. 그 때 필자는 신학도들을 위하고 이 땅의 목회자들의 설교의 발전을 위해 꼭 계속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당부했다.
정용섭의 설교비평이 이토록 인기를 모으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의 글쓰기에 있다. 그에게는 논객다운 기지와 사물을 직시하고 통찰하는 혜안이 있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풀어낼만한 감칠 나는 문장력이 있다. 그의 문장은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준을 넘어 매우 자극적이고 선동적으로 들려오기까지 한다. 그는 타인을 평가하고 자신을 표현하는데 조금의 거침도 숨김도 없다. 전후좌우의 테두리를 정해놓고 그 안에서 밑줄을 긋고 살아가는 필자에게 그의 글은 사방이 트이고 심지어 성경에까지도 열려있는 자유로움을 보게 한다. 모든 신학과 철학적 사유에 열려있는 그의 자유혼은 때로 필자의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정용섭 목사의 설교비평을 읽으면서 자꾸만 다가오는 불안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그는 청중의 구미에 맞는 글이 무엇이며 눈에 보이는 글을 쓰는 재주를 지닌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렇다고 그의 비평이 모래 위에 짓는 집마냥 의미 없이 감동과 논리로 독설을 품어내는 산물도 아니다. 그 안에는 치밀함과 흥미 그리고 진지함과 솔직함이 베어 난다. 그리고 한국교회 강단을 염려하는 필자의 간절한 애원이 들어있다. 필자의 불안을 부추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가장 강조하는 바로 그 ‘성경’이라는데 있다. 한 마디로 그의 성경관에 마음이 편치 않다. 평소에 한국교회 강단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성경을 다루지 않는 것이라 강조하는 그에게 과연 성경이란 무엇인가? 필자처럼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요 절대적인 진리로 믿는 사람에게 그는 한국교회 강단을 위해서는 위험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성서를 다루어야 한다고 핏대를 올리지만 정작 자신의 성경관에서는 어처구니 없을 만큼 필자를 실망시킨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믿는 것을 혹평하고 나선다. “신화적 설교와 신학적 설교”라는 제목으로 김상복 목사의 설교를 비평한 그의 지적에서 자신의 성경관을 엿보인다. 김 목사의 설교를 비판하면서 그는 “성서의 신화까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일종의 신화적 심리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36) 정용섭은 “성서를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고 주장하는 축자영감설은 미숙한 성서 이해”라고 꼬집는다. 계속해서 그는 “신구약성서에 신화적인 요소가 개입해 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완고한 근본주의자들이 아닌 이상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서의 이런 진술들은 사실적 언어라기보다는 신화적 언어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에 신화가 개입해 있다는 사실을 굳이 감출 필요가 없다.”37)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 그대로 믿는다는 것이 그에게는 주요한 비판의 이유가 된다. 심지어 자신의 눈에도 제대로 된 신학자요 설교자로 비친 로이드 존스에게서도 성경을 온전히 믿는다는 이유로 “함께 길을 갈 수 없는 한계선”을 발견한다.38)
성경을 신화가 아닌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살아가는 필자는 여기서 정용섭 목사에게 묻고 싶어진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성경 텍스트를 존중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말이거나 심지어 신화적 요소까지 들어있다면 왜 설교자가 굳이 성경의 텍스트, 즉 하나님의 자기 의지가 들어있는 텍스트에 집중해야 한단 말인가? 텍스트에 집중해서 무엇을 찾고자 하는가? 텍스트의 권위가 떠난 자리에서 본문이 아닌 사람의 이야기를 마음대로 한다 해도 비판할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필자의 이런 질문에 정용섭은 아마도 성경관에 대한 신학적 차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직도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필자를 깨이지 못한 여린 학자라고 비평할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결국 신학의 문제이며 신학의 문제의 핵심은 성경관에 있다.39) 필자는 진정한 기독교 강단의 회복은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라는 성경관에 기초하고 그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데서 시작된다고 확신한다.
정용섭의 설교비평에서 나타나는 두 번째 문제점은 그의 설교학적 입장과 연결된다. 물론 그는 설교학을 전공한 학자는 아닐지라도 이미 전공자를 압도하는 식견과 설교에 대한 확신으로 책을 세상에 내어 놓았으니 전공자가 아니란 점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연속적으로 설교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해 한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 강단에서 유행하다시피 하는 주일공동예배의 연속 강해설교는 매우 무모한 시도이다. 이런 형식의 연속 강해설교에 의하면 스타 목사는 출현할지 모르지만 성서 텍스트가 스스로 말씀하는 계시의 역사적 신비는 침묵하고 말 것이다.40)
그가 연속설교를 거부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많은 목회자들이 연속 설교에 치우친 나머지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41) 이 부분은 그의 설교신학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연속강해설교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연속적으로 본문을 설교하는 것은 강해설교의 철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42) 연속적으로 본문을 선택하는 것은 본문선택의 한 방법의 문제일 뿐이다. 연속으로 본문을 정하여 설교하는 것이 성경이 스스로 말씀하시는 계시의 역사적 신비를 침묵시킨다는 모호한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수긍하기도 어렵다. 본문선택은 중립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설교자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본문을 택하더라도 본문의 목소리를 듣는 자세이다.43)
그의 비평에서 발견되는 설교학적 문제는 적용에 대한 거부감에서도 발견된다. “큐티 식 설교의 효율성과 미숙성”이란 제목으로 최영기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정용섭은 그의 설교자 적용 중심의 설교 패턴임을 지적한다. 적용적 설교는 최 목사가 자신의 설교철학에서 밝히는 특징이다. 목장 모임이 잘 훈련된 이 교회에서는 설교본문을 성경공부 시간에 미리 다룬다. 따라서 설교자는 강단에서 본문을 오랫동안 다루는 것보다 어느 정도 본문에 익숙하다고 여기고 적용적 설교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정용섭은 다음과 같이 비평한다.
필자는 적용에 무게를 두는 설교를 별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삶의 변화에 앞서서 하나님과 존재론적 만남이 우선하며, 삶의 변화는 목사의 능력이나 영역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몫이기 때문이다.44)
존재가 삶에 우선한다는 그의 말은 기독교의 근본을 잘 지적한다. 따라서 기독교 설교는 존재와 삶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에 근거한 삶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문제는 적용에 대한 부분이다. 성령의 몫으로 적용을 남기는 것은 일견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무책임한 설교자의 자세를 부추길 뿐이다. 설교자의 진정한 사명은 주어진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오늘날 적실하게 적용하여 청중에게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면 그리스도를 알도록 인도해야 하며 이미 구원에 이른 사람이라면 거룩한 삶을 향한 결단을 일으켜야 한다. 누가 변화라는 기적을 일으킬 장본인인가? 진정한 변화는 오직 성령께서 단독으로 하시는 사역이다. 그러나 설교를 통해 성령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성령께서 설교자를 통해 적용하게 하시도록 기회를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범죄한 다윗을 향해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요.”라는 지적까지 나아갈 때 위대한 변화를 목격한다. 말씀을 듣고 난 다음 소위 “so what?”에 대한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말씀과 삶의 변화에 대한 균형은 바울의 설교에 잘 나타난다. 바울의 모든 설교는 전반부의 교리에 근거하여 후반부의 적용으로 나아가는 패턴을 보인다.45)
적용에 대해 부정적인 그의 말은 설교에서의 적용을 거부하는 최근의 설교학자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새로운 설교학(New Homiletic)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크래독의 설교사상을 루시 로즈(Lucy Rose)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크래독은… 청중이 설교에 참여하여 그의 삶에 알맞은 어떤 방식으로든 설교에 결론을 맺는다고 말한다. 사고하고 행동하고 결정을 완전히 내리는 일은 설교자의 일이 아니라 청중의 일이다. … 설교의 목적은 결코 이성적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이 열려 있는 체험에로의 참여에 있다.46)
새 설교학자들이라고 불리는 오늘의 설교학자들 가운데는 설교자가 본문에 근거하여 적용을 제시하는 것을 설교자의 횡포라고 여기기도 한다. 이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성경의 무오나 영감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지닌다는 점이다. 정용섭과 크래독의 공통점은 설교자가 적용을 제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며, 차이는 성령이 적용하게 하는가 아니면 청중이 스스로 적용하는가의 차이다.
설교에서의 적용의 필요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설교의 목적과 직결된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주해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청중의 삶으로 적용되어 거룩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47) 최근에 『성경적인 설교로의 초대』(Invitation to Biblical Preaching)에서 도날드 수누키안은 적용을 향해 나아가야 할 설교의 목적을 잘 피력한다.
설교의 목적은 지식을 보급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정보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회중들에게 좀 더 많이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좀 더 닮아가게 하는데 설교의 목적이 있다.48)
이런 점에서 스펄전은 “적용이 시작될 때 설교가 시작된다”고 적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III. 한국교회 설교비평을 위한 제언
이제 한국교회 설교비평이라는 배가 정확한 목적지로 항해하도록 항도를 제시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언제나 신나는 일이지만 여행을 마치고도 여전히 의미 있는 여행이 제대로 된 여행이다. 필자가 몇 가지 제언하고자 하는 것은 설교비평이라는 거대한 배를 제대로 인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설교비평이라는 배 자체에 대한 인식도 일천할뿐더러 자신도 향방을 알지 못하는 터에 타인의 방향과 한국교회의 방향까지 제시한다는 것은 과도한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이러한 무거운 책임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보다 극복해야 할 즐거운 도전으로 느껴진다. 이는 자신에 대한 무지나 혹은 제대로 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 아니다. 설교비평을 함께 고민하고 열어갈 많은 동료들에 대한 신뢰와 기대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강단을 말씀으로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진리 위에 세우기 위해 설교비평에 필요한 몇 가지를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교회 강단의 바람직한 설교비평을 위해 요구되는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성경적인 설교신학의 정립에 있다. 비평이란 한 사람에 대한 정직한 평가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수긍될 수 있는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일정한 원칙 없이 소견에 좋은 대로 비평하는 것은 자칫 비평이 나아가야 할 건설적 기능, 즉 한국교회를 성경 위에 세우는 일보다 오히려 ‘비평’에 대하여 어떻게 ‘비평’해야 할 지 고민하는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필자는 한국교회가 성경을 무오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경주의적 설교신학에 근거하여 본문에서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여 오늘날 적실하게 적용하는 강해설교가 회복되어야 할 때라고 믿는다. 필자는 이를 ‘개혁주의 강해설교’라고 부른다.
둘째, 균형 잡힌 비평을 위해서는 설교자와 설교에 대한 동시적 연구가 필요하다. 한 사람의 설교란 한 사람의 인격과 신학 그리고 청중이해의 총체적 결집으로 이루어진다.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는 설교의 문제를 다루고는 있지만 상당부분 설교자의 문제에 대한 비평에 치우친 느낌이다. 정용섭의 연구는 설교본문에 대한 비평에 비해 설교자에 대한 연구나 설교 상황에 대한 이해는 결핍된 느낌이다. 설교란 말씀 자체의 영역인 로고스와 설교자의 인격과 성품을 담은 에토스 그리고 설교자가 강단에서 지녀야 할 가슴인 파토스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종합예술과도 같다. 진리의 말씀과 전하는 자의 인격과 설교현장에서 전하는 자의 열정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한 편의 설교다. 설교현장과 목회현장을 도외시한 비평은 지적은 정확하나 수용하기는 어려운 메아리로 끝나버릴 수 있다.
셋째, 설교자의 의도를 존중하여 읽어가는 해석학적 비평 자세가 필요하다. 비평이란 설교를 대하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설교자의 의도를 존중하며 읽을 것인가, 설교본문만 가지고 읽을 것인가, 혹은 비평가가 자신의 시각에 근거하여 읽어 들어갈 것인가. 설교자, 설교본문, 비평가라는 세 축의 균형을 유지하되 비평가는 철저하게 설교문에 드러난 설교자의 의도를 존중해야 한다. 저자의 의도를 벗어난 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비판하는 것은 객관성을 상실한 자신의 불평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비평이 주는 위험성이란 텍스트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불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비평이 되는 대상을 창의적으로 도와 줄 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의도하지 않은 바를 가지고 꼬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인상에 마음까지 상할 수 있다.49)
넷째, 설교자의 설교본문뿐 아니라 설교전달에도 동일한 관심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설교비평은 주로 설교원고에 집중된 한계를 보인다. 설교란 성경본문을 해석한 내용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전달력으로 구성된다. 때로 설교본문이 만족스럽지 못해도 청중에게 거룩한 변화가 일어나는 설교가 있는가 하면 본문해설이 정확할지라도 청중에게 조금의 변화도 찾을 수 없는 설교도 있다. 이는 설교가 설교본문에 완전히 의존된 것이 아니라 전하는 자에게도 어느 정도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변증한다. 또한 설교란 설교자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설교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주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설교란 일정한 예배를 배경으로 행해지는 역동적인 것이기에 한 설교는 하나의 예배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배상황이란 한 교회 공동체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콘텍스트 없는 텍스트의 해석이 잘못된 해석의 씨앗이 되듯이 예배상황 없는 설교해설 역시 소리 없이 자막으로 영화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평가에서 벗어날 위험을 안고 있다. 직접 예배의 현장에 참석하거나 적어도 구체적인 설교가 행해진 동영상을 보면서 그 때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노력이 비평가에게 요구된다.
설교를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비평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대상이다. 그러나 설교는 창의적인 비평을 통해 발전될 수 있다. 설교비평이 하나의 건설적인 학문의 장으로 자리 잡아 한국교회의 설교가 철저하게 성경에 뿌리를 내리고 청중의 삶으로 적실하게 스며들어가 설교 때마다 거룩한 변화를 체험하는 강단이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이 글은 지난 11월 2-3일까지 한일장신대에서 열린 제 6차 한국설교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이라는 주제로 발제한 내용이다.
[출처] 한국교회를 위한 설교 비평(2)-펌|작성자 아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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