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기타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 서평 (1)

새벽지기1 2017. 1. 22. 22:08

들어가면서..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이하 한국)성공한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하고 있지 않다. 한국교회에서 현저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의 설교가 과연 얼마나 신학적이고, 예언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가에 대해 냉철하게 비평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모든 설교자의 설교가 허망하고 공허하다 라는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교회가, 오늘날에 있어서, 사회와 괴리되어 버리고 편협하고 보수적인 개인 집단 체로 전락해 버린 이유를 설교를 통해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가장 큰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고, 그 말씀을 선포하는 것-설교가 예배의 핵심이 되었다. 이러한 정통성이 한국교회에서는 성도들이 말씀으로 교회를 선택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고, 그러한 것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지는 고착화 현상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실정에서 교회의 목회자들은 말씀의 선포에 있어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적용을 통한 역사 고찰이나 회개의 촉구를 담지 못하고 교인들의 비위에 맞추어 말씀을 선포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말씀의 왜곡과 올바른 성경적 역사의식 고취의 불가능을 잉태 하였으며, 이러한 부정적인 요소들이 더욱 더 커지게 됨으로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버린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설교자는 올바른 신학적 소양과 교회론, 역사에 대한 예언자적 소양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이 결여 되었을 때, 예배의 설교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또한 이러한 것들이 지속되게 된다면 한국 교회의 사회 적응성은 날로 떨어지게 될 것이며, 이러한 사회와의 부조화는 결국 성도들의 교회 외면으로 까지 이어지게 될 것이다. 삶과 아무런 상관도 없고 비전도 제시하지 못 하는 교회에 어떤 이가 남아 있으려 하겠는가?

 

한국교회는 성장지상주의의 잘못된 자본주의식 의식을 타파하고, 온전하게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채워진 교회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을 향한 편리함으로 힘과 권력, 물질로 채운다면 한국 교회의 미래는 정말로 암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한국…' 은 이러한 교회의 문제들에 대한, 더 자세히 말하면, 설교자들의 문제에 대한 비평이다. 과연 한국의 설교자들은 성경에 대해 신학적 이해와 역사적 관점에서의 예언자적 시각으로 서서 말씀을 선포하는가? 개인의 도덕적이고 물질적인 완성추구라는 배타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편협한 외침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기 까지 희생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가는 하나님 중심적이고 희생적 외침을 부르짖고 있는가? 에 대한 고찰이라 할 수 있다. 

 

선희 목사의 설교 세계 차정식

 

곽선희 목사에 관하여 차정식 교수의 첫 평은 대체로 좋은 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 곽선희 목사의 설교는 언어가 반듯하며 어법이나 문법상의 오류가 드물고 어휘가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다. 좋은 설교를 위해 에세이 집을 읽으라는 그의 권고에서도 보이듯, 그의 설교는 간결하면서도 평이하고, 평이하면서도 논리적이며, 논리적이면서도 건조하지 않고 역동적이다. , 수사학적 응용이 뛰어나 설교의 구성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회중을 집중 시키고, 간략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설교를 구성력을 통해 완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탕에서 곽 목사는 설교의 본문과 제목에서 유기적인 연관성을 발현하고 있다. 이러한 유기성은 성서의 헬라어 해석과 서양의 지성인들의 저서의 인용을 통해 그 깊이를 더하기도 한다. 또한 각종 예화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의 깊이를 더욱 증폭시킨다. 그의 설교지론은 예화로 시작해 예화로 끝난다 로 대변 될 수 있을 정도로 예화의 비중이 크다.


그의 현대인과 행복시리즈에서 보이는 인간관은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욕망으로 인한 인간의 죄악에 있어서 죄과를 따지기 보다는 상대적인 이해를 촉구한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적이라는 긍정적 부분도 있지만, 인간에 대한 지나친 일반화와 욕망의 지나친 단순화를 야기 할 수 있다. 인간을 변화 된 사람 과 변화 되지 못 한 사람으로 양분화 할 위험성과 욕망에 따른 이기주의자와 반대의 박애주의자의 극단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관에 있어서는 개인적이고 편협하며 회의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있어 역사의 사건이란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보잘것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양분화와 역사에 대한 회의는 그에게 있어 하나님 나라와 인간 세상의 양분화라는 신학적 한계를 드러내게 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교회를 폐쇄적인 선민사상의 집단체로 폄하 시킬 뿐 아니라, 새로운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큰 문제다. 이러한 것을 증명하듯, 곽 목사의 설교는 갈팡질팡 하고 있는 것이다.

 

김진홍 목사의 설교 세계 차정식

 

김진홍 목사는 개교회만이 아닌 한국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설교하는 매우 드문 설교자이며, 개인의 한과 상처를 역사의식과 버무려 승화시킬 줄 아는 희귀한 파토스의 소유자이다. 한국 교회의 성공주의적 축복관, 샤머니즘적 성령관, 물량주의적 교회론을 맹렬하게 비판하였고, 이러한 그의 사상들은 갖은 풍파를 겪으며 살아온 목회자로서의 그의 삶에서 묻어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배경에 의해 그의 설교는 소외된 인생들을 끌어안고자 하며, 성장만을 지향하며 아픈 이웃을 버려두고 있는 기성교회를 성토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파토스는 성서의 말씀을 통해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그의 설교는 성서를 성서로 해석한다. 성서 전반을 관통하는 기본 원리에 충실하고, 강해설교에서는 상식과 상상력이 동시에 작용되고 조화와 균형을 강조하는 변증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그의 설교형식은 대안과 준비로 집중된다. 예로, 아벨의 대안으로 셋이 등장하였듯 회중에게도 이러한 준비와 대안을 설파하는 것이다.


기존의 보수적인 복음주의를 탈피, 교회안팎의 것들을 모두 포함하는 일원론적 통일 신학인 개량 복음주의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종종 자신의 이론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세상과의 구별을 없애야 한다는 그의 발언과는 달리 그는 종종 세상을 교회와 구분 짓기도 하며 치우침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바탕들에서 김 목사의 설교는 자칫 콤플렉스 설교로 비추일 수 있다. 단지 거대한 교회에 대한 콤플렉스 따위로 말이다. 또한 개량된 복음주의가 자기 만족적 복음주의로 퇴락할 가능성도 있다. 개혁적인 복음주의를 주창하면서도 그는 종종 전통적인 성서해석과 결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래에 대한 역사적 식견도 강대국에 의존해야 한다는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보이는 단점도 있다. 또한 유명하지 않은 지식인들에 대한 폄하도 그의 단점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조용기 목사의 설교 세계 김세광

 

조용기 목사에게 복음이란 삼박자 구원을 말한다. 이는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것이다. 죄악을 이기시고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으로 인해, 죄를 짓지 말라고 가르치기 이전에 인간은 죄 용서함을 받았고, 이미 죄를 이겼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오중복음을 말한다. 중생의 복음, 신유의 복음, 재림의 복음, 성령 세례의 복음, 축복의 복음이 그것인데, 이것이 바로 순복음 메시지이며 모든 설교자가 전해야 할 메시지라고 강조한다. 이는 조 목사만의 독특한 신학이 아니라, 미국에서 시작된 오순절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교회의 담임 목사인 조용기 목사의 장점은 다음의 세가지로 구분 될 수 있다. 첫째, 민중을 향한 소망의 복음. 둘째, 대중적으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복음전도 설교. 셋째, 현지어로 하는 복음 선포 등이 그것이다.


반면, 그의 사역과 설교에 관한 비판은 네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성령의 사역만을 강조하는 것, 개인의 복만을 추구하는 기복적 설교, 사회적 책임과 사명을 소홀히 하는 개인구원 지향적 설교, 기적적 신적 치유를 내용으로 하는 극단적 신비주의의 설교라는 것 이다. 이 외에도 조상숭배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발언 와 몇몇의 발언으로 시작된 비판은 1981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에서 시작되어, 1983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는 그의 설교에 사이비성이 있다고 규정 하기까지에 이른다. 이후 수정, 보완을 통해 그의 발언을 정정하였음에도 불구, 여전히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성에도 불구, 조용기 목사의 한국교회에서의 영향력은 무시 할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체험적 신앙의 자리잡음과 성장지향적 교회의 초석을 만들었다는 부분에서 그의 영향력을 쉽게 알 수 있다.

 

김선도 목사의 설교 세계 김세광

 

김선도 목사는 세계최대 규모의 감리교회 목회자 이다. 한국의 10대 설교가 중 두 번째로 꼽힐 정도로 그의 영향력과 설교는 정평이 나 있다. 또한 그는 개척교회로 시작한 여타의 대형교회와는 달리 15년이 된 기성교회에 부임해서 30년간 목회를 하면서 교회를 성장시켰다는 부분이 주목할만하다.


대형교회의 성장에는 반드시 위대한 설교자가 있었듯, 광림교회의 성장에도 김 목사가 있었다. 그의 설교의 매력과 특징은 세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다. 첫째, 철저하게 긍정적 사고와 적극적 신앙을 강조하는 설교. 긍정적 사고와 적극적 신앙은 그의 인생관 이자 신앙관, 설교철학이라 할 수 있었다. 둘째, 이야기체 설교. 그의 설교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거의 모든 분야를 다루는 그의 설교는 진부할 수 있는 주제들에 대한 매너리즘을 극복했다 할 수 있다. 셋째, 치유적 설교와 상담적 설교. 자아정체성에 대한 혼돈과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제반의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설교를 통해 주었다. 이러한 김 목사의 설교는 회중들에게 사회와 온 세계를 향한 극복 의지를 주었다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은 김 목사의 긍정적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측면은 어떨까? 첫째, 긍정적 사고와 적극적 신앙의 반대급부를 들 수 있다. 너무 긍정적인 인간의 사고는 자칫 자기만족에 빠져 버리게 만드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후임 목사의 선출과 관련된 목회자 세속에 관한 문제가 있다. , 소형의 작은 교회에서 아름다운 목사직 의 대물림이 있기는 하지만, 세계최대의 규모의 대형교회에서는 쉬이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교회와 교계 안팎에서 부끄러움 없이 수월히 진행되었기는 하지만, 한국 대형교회의 목회 대물림 현상의 하나로 역사적 평가와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김선도 목사의 설교는 조용기 목사의 설교와 유사성을 많이 보이고 있다. 몇 가지를 들어보면, 교회성장형 설교, 개인의 행복과 성공 추구, 하나님의 모성적 측면 강조, 목회사역 중에서 설교사역에 최선을 다하는 점, 신학적 성격의 성공 이야기가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반면 차이가 나는 것으로는, 성령충만에 대한 해석의 차이, 방언에 관한 차이, 기도에서 관한 해석의 차이 등이 있다.

 

옥한흠 목사의 설교 세계 이상훈

 

성공의 대명사, 목회 세습의 타파, 아름다운 퇴진으로 알려진 사랑의 교회의 옥한흠 목사는 그의 명성과는 달리 실로 오랜 세월 동안 성숙한 신앙에서 묻어 나오는 겸손한 설교를 했다. 그의 명성은 교회의 성공이나 세습의 타파 보다는 평신도 사역을 강조하는 독특한 목회철학을 통해서 알려졌다. 제자 훈련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평신도 사역자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를 본 많은 목회자들이 목회자의 역할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했지만, 기우로 끝났다. 옥한흠 목사가 누구보다도 목회 사역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처받은 자에게 치유를 주고자 했고, 그러한 사랑의 결정이 제자훈련이라는 결과물로 나온 것이다.


옥한흠 목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개인 인격의 변화를 촉구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는 자들이 예전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정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절약과 근검을 가르쳤고, 나누며 함께하는 이웃의 모습을 설교했다. 이러한 설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도들의 자존심을 고취 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에게 자존감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되며, 세상과 사회에 나가 당당하게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구원에만 만족하여서는 안되고, 제자가 되기까지 헌신되어야 한다고 설교했다. 이것이 바로 성도를 제사장으로 세우고자 하는 평신도를 깨우는 제자훈련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옥 목사의 목회에도 몇몇의 작은 흠이 보이곤 한다. 자교회에 대한 지나친 엘리트 의식과 선민사상, 개인의 시각으로 본 타인 혹은 타 단체에 대한 폄하 등이 그것이다.

 

홍정길 목사의 설교 세계 이상훈

 

홍정길 목사는 언제나 소외 받고 멸시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있었다. 성공의 길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난 홍 목사의 설교는 어떠했는가?


그의 설교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는 영광스러운 복음으로의 초대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의 수많은 영혼들을 향하여 영광스러운 복음으로의 초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그만의 전도 방법이었고, 세상을 변화 시키고자 하는 힘의 원동력 이었다. 복음의 힘은 사회와 개인의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사명감이자 소명의식 이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그는 소외 받고 외면 받는 계층의 사람들을 향해 꾸준히 전도 활동을 벌였다.


달변가도 아니고, 재주가 많지도 않은 홍 목사의 설교는 투박하지만 장중하다. 신앙의 기본을 중시하는 그의 설교는 성서를 철저하게 기본으로 하는 강해설교가 주를 이룬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하는 홍 목사에게 신앙의 기본이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또한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선 열정을 가지고 실천하는 모습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반성해야 할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설교에는 뚜렷한 설교학적 패턴이 존재하지 않는다. 강해설교의 형식을 빌리고는 있으나 종종 이 형식에서 벗어나기가 일쑤다. 아직 목회 일선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미완성 이라 할 수 있기에 섣부른 판단은 이르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홍 목사가 열정을 소유한 설교자 인 것은 확실하다. 다만 목회자 한 사람의 열정이 과연 교회와 어떤 식으로 연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귀추를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하용조 목사의 설교 세계 정용섭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있는 하용조 목사의 강해설교는 체계적이기로 유명하다. 설교가 일관성이 있으며, 선명하다. 후학을 위한 지침으로 삼아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 목사의 설교에도 흠은 있다.


다양한 보조도구를 쓰는 하 목사의 예배-설교가 아닌-는 복음성가로 시작이 된다. 복음성가로 분위기를 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분위기를 몰아 예배는 각종 보조기구들-영상기구, 세리모니 등-을 사용해 사람들을 선교의 제일선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은 전장에 있는 군인과도 같은 심정으로 사람들을 몰아간다., 군인이 전장에서 상관의 명령밖에는 들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럴 때 하 목사가 절묘한 타이밍으로 등장하여 설교한다. 이때 그 어느 누가 하 목사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지 않겠는가? 이러한 하 목사의 설교 방식은 청중의 감수성만을 자극할 뿐, 하나님과 연관된 은혜와는 전혀 동 떨어져 있는 것일지 모르는 위험성이 있다. 어쩌면 그의 다양한 볼거리와 감수성을 자극하는 예배는, 자신의 감상주의적 설교가 안고 있는 한계를 은폐시키려는 음모일 수도 있다.


또한 그는 감상주의적 설교에 빠져 성서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성서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이 부족하고, 사족에 불과한 말들이 설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가 열정이 있는 목회자 인 것은 분명하지만, 감성이라는 것이 개인의 감정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것이기에 그의 설교는 깊은 감동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감상주의적 설교는 개인연민에 빠지기 쉽다. 이러한 개인연민은 심한 열등감을 조성할 수도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열등감이란 죄론이 왜곡될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하 목사의 신학적 바탕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비춰준다 할 수 있다.


하 목사는 실제로 이 죄에 대한 부분에서 굉장히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 근본주의적인 독단에 쌓여있는 하 목사에게 죄에 있어서의 정결함이란 청교도와 같은 도덕적 정의를 말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가차없이 단죄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그의 시각은 역사관과 세계관에서도 드러난다. 그가 생각하는 가치와 맞지 않는 자들, 곧 타종교, 진화론, 공산주의, 운동권 학생, 노조운동 등을 대상으로 가차없는 단죄를 퍼붓는다.


그의 설교는 나르시즘으로 채워진 자기만족만 있을 뿐이다.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행위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교회의 성장과 경쟁이 중요하지 않다면서 교회의 성장을 성령의 역사와 직결시킨다. 그의 설교에는 거품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