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러한 그의 뛰어난 설교에 은혜는 없다. 미국에 대한 지나친 사대주의로 인해 설교에서 서양 일색의 예화가 넘쳐나고, 영어를 한국어 보다 더 뛰어나다는 듯 한국어에 앞선 의미로 설명하며, 미국과 대립하는 북한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양상을 보인다. 이것이 과연 한국교회에서의 목회자로서 올바른 역사의식이라 할 수 있는가? 북한을 절대악으로 몰아가는
이러한 사상적 배경으로는 그가 주류에 속해 있다는 일종의 엘리트의식, 선민사상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동성연애자들을 향하여 가차없는 단죄를 날리며,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그들을 악에 속한 이들로 단정지어 버린다. 이에 성서를 규범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더하여, 선과 악의 이분법을 더 확장시켜 자신의 성서해석적 규범에 맞지 않는 자는 모두가 악인으로 낙인 되어 버린다.
또한 세상의 물질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고 설교한다. 이에 따른다면, 장애인들은 물질이나, 지혜, 권력은 필요 없기에 오로지 주 예수의 구원만 바라보고 살아야만 한다. 정말로 그렇다면 사람이 살아야 할 가치가 없잖은가?! 인간의 심리와 기술 좋은 설교력을 가지고 있는 이 목사는 교양강좌 강사로서 안성맞춤인 사람이다.
즉, 인간이 주체로 참여 할 수 없는 부분인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과 사단,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며, 그의 기준에 맞는 선에 속하기란 굉장히 어렵다. 이러한 이분법에서 선의 축에 속한 교회는 끊임없이 악의 세력과 싸워야 하는데, 그 악의 세력엔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교회는 올바른 교리와 실천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적 모습을 지향해야 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김삼환 목사의 설교 세계 –
김삼환 목사는 20명의 교인에서 5만 명의 교인으로 엄청난 성장을 한 명성교회의 담임목사다. 언어 구사력이 뛰어난 김 목사는 낱말을 고르고 언어를 구사하는데 대단히 신경을 쓴다. 표현력과 방법도 다양하고 뛰어나다. 이러한 그의 언어 구사력은 회중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김 목사는 간혹 노래로도 설교를 하는데, 이러한 그의 설교방식은 회중에게 가슴을 울리는 감동을 준다.
김삼환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중심으로 설교한다. 인간이란 세상과 인간의 윤리적 가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로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윤리적 덕목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믿음 안에서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인 것이다. 김 목사의 시대관은 보수적이며,
그러나 한국교회의 위기는 복음이 세상의 주류와 부합하여 버림으로 인한 것이다. 김 목사 는 이러한 사회적, 역사적 맹점들을 주류들로부터 덜어주기 위해 청부론을 거론함으로 세속과 타협하고 만다.
옥한흠 목사의 뒤를 이어 사랑의교회를 맡게 된
그 증거로, 제자훈련을 통한 성육신적 설교를 지향하며, 청소년과 청년부흥에 많은 힘을 쏟고 있다. 또한 민족복음화, 세계선교, 문화변혁을 위한 부흥을 부르짖는 것을 들 수 있다. 새벽기도의 기복신앙을 조장성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과 민족과 나라를 위한 기도가 주가 됨을 강조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설교와 신학적 세계관은 하나님께 묶여있다. 단, 개인주의적 도덕적 주권회복에 너무 강조점을 두는 한계를 범하여 실천력이 떨어지는 것을 보이고 있다.
김 목사는 영적인 체험을 중시하는데, 복음에 의한 영적 감동과 회심을 강조한다. 그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 뵙고 변화되었기에 이러한 것들을 중요시 할 수 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청교도적 교리 중심의 설교를 하는 그는 이론과 실제를 적절하게 소화한다는 평을 받는다.
이론과 실제가 적절하게 조화 된 변화를 회중에게 선사하기 위해 목회자가 변화 되어야 하고, 목회자가 바로 서야 한다고 말한다. 곧 목회자가 바로 서야만 회중이 바로 설 수 있다는 그의 지론에 따른 것으로 목회자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목회자에게 비중을 더 두는 바람에 회중이 오늘의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서 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김서택 목사의 설교 세계 –
김서택 목사는 탁월한 강해설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교회 중심의 구속사적 흐름 속에서 성서를 해석, 적용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목사들과의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교회중심주의에 너무 치우쳐 있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인격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듯, 그는 인격적으로도 실천을 통하여 겸손과 모범을 보여주는 목회자다. 귀납적 강해설교를 하는 그는 성서 본문의 논리적 흐름을 그대로 따른다 할 수 있다.
대중에게 매우 섬세하게 다가서는
이를 증거라도 하듯, 강 목사의 설교는 인간의 성공학이나 축복론으로 빠진다. 이러한 것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 강 목사의 ‘형통의 원리’ 라는 것인데,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삶의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세속적 욕망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해주는 구실을 할 수 있다. 즉, 현대판 기복주의가 될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시대가 당면한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혼란, 문화적 타락과 경제적 모순, 보수주의자들의 호전적 경향 등에 관한 대안을 그의 설교에서는 찾을 수 없다. 형통의 원리에 의한다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은 하나님의 형통을 받지 못 한 자들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과 5년 만에 100명의 신도를 8천여 명으로 늘린 전 목사는 젊은 목회자 세대의 대표주자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는 유난히 성취에 대한 동기부여를 중시한다. 현실, 즉 시장에서의 성공을 강조한다. 성공적인 삶을 위한 다양하고도 체계적인 그의 설교는 낙오의 불안함을 품고 살아가는 현시대의 젊은이들을 쉽게 감화시킨다. 그러나 그는 세속적 성공주의가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는 주범이라는 점을 너무나 쉽게 간과해 버린다. 젊은이들에게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는 말하지만 비전을 제시하지는 않고 그저 비전만 가져라 라고 허망한 외침만 부르짖을 뿐이다. 젊은이들을 불합리한 세상에 저항하고 약한 자의 편에 서게 만드는 비전이 그에게는 없다. 다만 그에게는 1등 론과 세속적 성공론 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믿음으로 역사를 뒤집어 바로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안목과 이해는 말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얄팍하여 올바른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며, 믿음으로 역사를 뒤집어야 한다면서 엘리트 지상주의를 주장한다.
이러한 왜곡된 역사의식과 신학적 사상은 설교의 구성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문학작품의 엉뚱하고도 난잡한 해석은 물론이고, 표절과 복제의 흔적도 심심찮게, 그것도 많이 발견된다. 설교가 말씀의 선포요 증언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과연 이러한 표절과 무식(無識)으로 점철 된 역사이해에서 나오는 설교를 그 어느 누가 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
마치면서..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단순히 한국 교회의 성공한 목회자들의 성공 비결인가 싶었다. 그들의 성공비결인 설교의 스킬(skill)에 관한 내용이겠거니 하는 생각에 별 정이 가질 않았다. 읽는 것도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러나 책을 펼쳐 들었을 때, 나의 편협하고도 치졸한 질투심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거기엔 내가 그 동안 보아오고 자라온 한국교회의 문제들과 가능성이 들어 있었으며, 신학적 소양과 믿음의 경륜이 부족함으로 인해 미쳐 말과 문자로써 표현 할 수 없었던 수많은 말들이 쓰여져 있었다. 그리고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신학적인 지식들과 한국교회의 현 상황과 냉철한 비판, 언제나 의문이 들었던 여러 가지 사실들을 이 책에서는 여과 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책의 본래 취지가 ‘비평’ 이기에 대다수의 내용에서 각 설교자의 약점과 단점들이 유난히 눈에 띈다. 본문에서 다루는 설교자들은 워낙 유명짜한 인물들이어서 어지간한 정보는 이미 다 접해 본 것들이기에 그들을 향한 매섭고도 날카로운 지적은 내게 있어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고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누구나 칭찬하는 한국교회의 대표적 설교자들을 향해 ‘당신은 이러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라고 목소리 높이는 저자들이 내게는 선지자들과 같아 보인다고 하면 너무 경솔한 일일까?
부디 이 책이 보다 더 많은 목회자와 신학생, 일반 성도 등 그리스도인이라 칭함 받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길 바란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 이시지만, 드리는 행위는 사람이라 보았을 때, 성도들에게도 설교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설교자에 대한 치우침 없는 올바른 판단도 성도들에게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