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신앙의 위력 (누가복음 17:5-7)

새벽지기1 2016. 12. 23. 07:19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5-6)

이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주신 신앙에 관한 교훈입니다. 어떤 때에는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 있으면 이 산더러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21).
신앙의 힘은 이와 같이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겨자씨는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은 종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씨를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토지에다 심으면 심은 그 씨가 마르지 않고 썩지도 않은 확실히 불멸의 생명을 가진 참 씨라면 반드시 연한 싹이 트기 시작하여 대지를 뚫고 나올뿐더러 점점 장성하여 잎이 생기고 가지가 펴져 나중에는 큰 나무를 이루어 공중에 나는 새까지도 깃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는 비유로 작은 겨자씨가 이렇게 성장함을 말씀하여 하나니 나라의 확장성을 가르치신 때도 있으나, 오늘 읽은 이 본문은 특별히 우리 신앙에 관하여 귀한 교훈을 베푸셨습니다. 겨자씨가 비록 작고 보잘것없으나 그러나 진정한 생명을 보유한 참씨이므로 땅에 심으면 반드시 싹이 나고 잎이 피고 가지가 자라 큰 나무를 이루는 것 같이 우리의 신앙도 역시 그런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은 너무나 미약합니다. 우리의 믿는 범위는 너무도 좁습니다. 이것은 믿지만 저것은 의심하는 것 같은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내리신 근본 진리에 대하여 확실히, 분명하게, 똑똑히 믿는 그 신앙 곧 참 신앙의 분량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우리는 능히 저 청산을 명하여 바다에 빠지게 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어떠한 신앙을 가리켜 죽지 않고 산 것이라고 합니까? 히브리 11장 1절에『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하였습니다. 신앙의 정의를 이보다 더 분명하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장차 얻으리라고 소망하는 바에 의심 없이 실상과 같이 믿는 그 믿음이 곧 참 믿음이요, 보이지 않는 것을 이미 본 것과 같이 확실하게 분명하게 믿는 그 신앙을 참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참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앙으로 민족을 지도하였고 모든 일을 오직 신앙으로 일관하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 것 같이 분명히 믿고 노력할 때에 그는 민족 해방의 대업을 성취한 것입니다.


바로 왕은 볼 수 있는 인간이었으나 자부(慈父)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신(神)이었습니다. 보이는 바로는 무력으로 모세의 앞길을 막았으나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속히 떠나 나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생사를 결정하는 백척간두(百尺竿頭)의 기동 섰을 때 모세의 취한 길은 오직 신앙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꼭 본 것 같이 믿는 참 신앙이 모세의 가슴속에 끓어올라 저는 분명히 보이는 폭군 바로의 엄명을 거역하고 도리어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능히 강하고 담대하게 60만 대중을 호혈(虎穴)에서 구출하는 역사적 대업을 완수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천래(天來)의 사명과 명령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것을 내가 친히 본 것 같이 확실히 믿는 참 신앙이 내게도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이 내 마음속에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나는 능히 이산이목(移山移木)의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며, 모세와 같이 능히 이 민족을 사활(死活)의 위기에서 구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이상적 평화의 신 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변화 산으로부터 내려오신 예수께서 산 아래에서 아홉 제자가 군중에게 에워싸여 서기관들에게 힐난 받는 것을 보셨습니다. 사귀(邪鬼)들린 자식을 고쳐 주지 못한 제자들은 일반 군중에게서 모욕과 시비를 받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실망한 불쌍한 어린아이의 아버지는 이제 다시 예수 님에게 호소하기 시작하였습니다.『오직 선생님께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사옵거든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사 도와 주시옵소서』 할 때에『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고 예수께서는 참 신앙의 위대한 힘을 다시 한번 외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것이 없다! 이 허락의 말씀을 분명하게 확실히 믿는 참 신앙의 소유자에게는 진실로 능치 못할 것이 없고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심리학 상으로 볼 때 인간 내심의 깊은 곳에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비록 평시에 나타나지 않으나 어떤 경우에 정신적인 자극과 충동으로 기인하여 상상 이외의 위력을 발로하여 전에 능치 못하던 일이 능히 될 수 있는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일을 근거로 하여 허다한 불신자 중에, 혹은 신자 가운데서도 그 신앙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불문하고 믿기만 하면 무소불능인 것으로 오해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내재적 힘은 사실 위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한한 것이요 만능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은 진실로 무소 불능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쳤습니다.『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것이 없다』고.
물론 신앙의 힘은 인간의 내재적 힘이 아님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무소 불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매 그의 무한하신 능력이 그를 믿는 신자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을 말함입니다. 저수지에 넘쳐흐르는 물이 수도관을 통하여 우리의 부엌에까지 들어오는 것입니다. 저수지와 주방을 연결하는 수도관만 불파불색(不破不塞)이면 물은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무한력(無限力)을 소유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관입니다. 이 관이 불파불색이면,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신앙이 절대 진실한 것이라면,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신앙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하여 오해하는 자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난 신앙, 하나님의 경륜과 합일되지 못하는 신앙은 참「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허락 이의 것을 되리라고 믿고 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믿고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을 일방적으로 오신(誤信)하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비록 밤낮으로 쉬지 않고 구한다 해도 못 이룰 것은 정해 놓은 이치입니다. 사람은 걸어다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창조의 원칙일진대 우리의 가진 두 발로 걸어야 할 것이요 주의 뜻이 무엇인가 알아보아 그 뜻대로 믿고 구하는 것이 신앙의 법칙일진대 이 법칙을 무시한 신앙과 기도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얻어 오지 못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의지하는 자는 그의 경륜, 그의 허락을 절대적으로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과 응답은 정비례합니다. 많이 믿으면 많이 얻고 적게 믿으면 적게 얻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하셨습니다. 물론 인간은 약합니다. 인간은 불완전하여 범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너희 불완전한 인간도 신앙의 힘으로 완전해질 수 있으니 확실히 믿고 노력하라. 이룰 것이다』 


형제여, 자매들이여, 우리는 이 허락의 말씀을 얼마나 믿었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완전해지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범치 않나니』하신 이 말씀도 죄악의 멍에 아래 신음하는 연약한 인간일지라도 중생하기만 하면 죄를 계속하여 짓지 않을 수 있다는 허락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믿고 든든히 서십시다. 완전 완미(完美)한 인간이 될 뿐만 아니라 성결(聖潔)무오(無汚)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눈 보임을 얻으려고 나온 소경에게 예수는 먼저 그 신앙 유무를 물으셨습니다.『주여 그리하외다』소경의 참된 신앙 고백은『네 믿음대로 되리라』하시는 주의 음성과 함께 원하던 밝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더러운 인간이 능히 하나님 같이 거룩해질 수 있을까, 부족한 인간이 능히 하늘 아버지와 같이 완전해질 수 있을까, 죄악의 근성으로 악해질 대로 악해진 인간이 능히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는 불가능한 이 사실에 대한 예수 님의 대답은『네 믿음대로 되리라』는 틀림없는 천래(天來)의 응허(應許)입니다. 참으로 믿고 실행하고자 힘써 노력하면 믿는 그대로 이룰 것을 말씀하신 응허입니다.


성경에는 이 같은 응허와 허락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획득할 수 없는 환상적인 소망만을 주는 공허(空虛)가 아니라 참으로 믿고 참으로 구하는 자가 얻을 수 있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큰 죄나 범치 않으면 다행이지 어떻게 인간으로써 그런 지상(至上)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고 핑계할 수 없는 지귀(至貴)한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이러한 교훈을 들은 제자들은『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하였습니다.


예수 님의 모든 교훈을 종합하여 볼 때 이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 할진대『너희가 돌이켜 변하여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한 이 말씀에 머물게 됩니다. 어리고 단순하여 힘없는 아이에게는 부모밖에 의지할 대상이 없습니다. 번개가 번쩍이고 우레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 때도 부모의 품에 안기기만 하면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인생 항로의 파도는 심합니다. 때때로 닥쳐오는 환난은 우리로 낙망의 타락(墮落)에 빠지게 합니다. 극심한 역경 속에서 광풍 폭우를 만날 때 우리의 피난처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으니 그가 나와 함께 계심을 확실히 믿는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여호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도다.
또한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의 막대기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진실로
선함과 인자하심이
나의 사는 날까지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영원토록
거하리로다.

이 시는 다윗의 유명한 체험시(體驗詩)올시다. 절대 한 신앙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없는 것입니다. 절대 한 신앙은 비록 겨자씨만 하더라도 확실히 습래(襲來)하는 폭풍우를 제압하고 흔연히 담대하게 침착하게 참 생명을 위하여 분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기를 만났다고, 난관에 봉착하였다고 낙망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대한 절대 한 신앙으로 담대히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웜스 국회 의장으로 향하는 루터는 생명의 위협과 모든 난관이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는『내 가는 길에 마귀가 그 집 위의 기왓장 같이 많을지라도 나는 가련다』고 말하면서 웜스 국회 의장으로 갔던 것입니다.
여기 평화를 상징하는 그림 두 장이 있습니다. 한 장은 백설이 덮인 고산중록(高山中麓)에 녹음이 우거진 수목이 둘러있는 아름다운 별장을 그린 그림입니다. 푸른 풀밭에 가축이 뛰어 놀고 각가지로 심은 화초 사이에는 봉접(蜂蝶)이 쌍쌍이 춤을 추며 집 옆 맑은 시내는 졸졸 흘러 거울 같은 호수로 들어갑니다. 호수에는 일엽편주가 떠서 간지러운 듯 실바람에 나부껴 미끄러져 가는 그야말로 평화를 상징한 한 폭의 희귀한 풍경화입니다.
다른 한 그림은 이와 반대로 해금강(海金剛)과 같이 험악한 산봉우리가 곳곳이 서 있고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에는 폭포가 떨어지면 천공은 흑운(黑雲)이 미만(彌漫)하고 풍우는 대작하여 천지를 뒤흔드는 벽력지성은 산곡을 뒤집는 듯하고, 산아래 노해(怒海)는 광도(狂濤)가 만장한데 외롭게 떠 있던 일엽편주가 암석에 부딪쳐 깨어지는 광경! 그러나 언덕 옆 한 모퉁이에 미동(微動)도 안 하는 반석 아래 갈매기 한 쌍이 어린 새끼를 따뜻한 품속에 품고 천지지변을 도외시하는 듯 평화롭게 눈들을 깜박이는 기름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참 평화는 이러한 것입니다. 흉흉한 파도에 휩쓸려 생의 방향을 잃고 헤매는 인간이, 폭우가 쏟아지는 위험한 살풍경 속에서 넋을 잃은 인간이, 사회적 위기와 불안의 흑운 속에서 공포에 떠는 인간이 어디서 참 평화를 찾을 수 있습니까? 어디서 이 고해를 건너 안식의 피안(彼岸)에 이를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을 믿는 절대한 신앙밖에는 없습니다. 신앙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열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한 가지 일을 기억하십시다. 신앙은 영양소의 공급이 필요합니다. 생명이 움직이는 참 신앙, 장성하는 신앙은 기도와 묵상의 영양소를 공급받아야 하는 것입니다.『구하라 주실 것이요』하고 예수는 말씀하셨고『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바울은 가르쳤던 것입니다. 헨리 드러몬드는 말하기를『하루에 단 10분간이라도, 아니 10十분이 없으면 단 2분간이라고 세상 복잡한 생각을 완전히 떠나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합일하는 시간이 있다면 하루의 생활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요, 이런 생활을 매일 계속한다면 인격 전체에 큰 변화가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어 자성(自省)하여 보십시다.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이런 기도의 생활이 있었습니까? 기도를 떠난 신앙 생활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고자 할진대 기도 생활을 실천해야 합니다. 기도할 대에는 먼저 고백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겸손히 주 앞에 엎드려 범한 모든 죄를 고백하며 반성하십시다. 이로써 마음에 시원함을 얻고 참 신앙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는 용기와 자신이 생깁니다.


둘째로, 감사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받은 바 은혜는 너무도 큽니다. 감격에 넘치는 감사의 기도는 온 몸과 마음을 완전히 주님께 드리는 신앙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내가 주님으로부터 사명이 무엇인가를 주님께 문의하여 봅시다. 주님의 가는 음성은 나의 기도를 통하여 나의 사명, 나의 할 일, 나를 통하여 이루어질 일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실 것입니다.
넷째로, 남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나만을 위하여 기도할 것이 아니니, 원수까지 위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참 신앙은 기도 외에도 묵상을 통하여 영양을 얻습니다. 시인 워즈워드는 말하기를『아름다운 시는 묵상을 통하여 얻으며 성경 읽는 것도 묵상을 통하여서만 은혜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묵상은 나를 이끌어 하나님과 친교 하는 아름다운 가경(佳境)에 들어가게 합니다. 산상보훈을 읽는다고 합시다. 그 말씀이 역사적 배경, 그 교훈을 주신 연유, 그 말씀의 뜻, 그 말씀과 우리와의 관계, 심지어 당시 그 말씀을 하시던 예수 님의 표정, 그 말씀을 듣던 군중의 태도와 감정 등까지 묵상하면서 읽으면 나에게 무한한 은혜가 되고 나의 생활에 큰 영양소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욜라는 말하기를『성경을 읽고 그 모양이 환하게 나타나기까지 묵상하면 우리의 신앙은 점점 가경으로 들어가 생명이 약동하는 참 신앙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로랜드 헤이스는 유명한 흑인 음악가였습니다. 그의 명성이 전 구라파를 진동할 때 독일 음악계에서는 헤이스를 청하여 독일에 오게 하였습니다. 헤이스의 첫 음악회는 1924년 악성 베토벤 홀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적 우월감을 가진 독일인은 흑인 헤이스의 베토벤 홀 입장은 베토벤 홀에 대한 모독이요 독일인의 수치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의 사람 헤이스였지만 이런 진퇴양난의 어려움을 당할 때 심중에 심한 번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헤이스는 약속한 시간에 베토벤 홀 스테이지에 기어이 나타났습니다. 터질 듯이 모인 청중은 박수로 환영한 것이 아니라 모욕의 언사로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 광경을 본 헤이스는 조용히 손을 맞잡고 피아노 옆에 섰습니다. 헤이스의 머리는 숙여졌습니다. 규례(規例)대로 묵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5분, 10분, 계속하여 헤이스는 묵상에 잠겼습니다. 얼마 안 되어 그칠 줄 모르던 청중의 아우성 소리는 고요해지고 일대 수라장이던 장내는 만뢰구적(萬 俱寂)의 심야(深夜)와 같이 정숙해 졌습니다. 숙였던 헤이스의 머리는 다시 들려졌고 피아노 소리와 함께 헤이스의 아름다운 음성은 전 홀을 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헤이스의 독창 곡목은『당신은 평화시요』였습니다. 헤이스의 묵도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피할 수 없는 역경이 있고 난관이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난국에, 막다른 골목에, 생사의 간두(竿頭)에 처할지라도 우리의 얼굴은 하나님을 향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믿고 간구 하는 기도와 묵상을 주께서는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고, 허락하신 것을 얻기도 하고, 사자의 입을 막기도 하고, 불(火)의 기세를 멸하기도 하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고, 연약하다가 강하게 되기도 하고, 전쟁에 용맹스러워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고…』
(1947년 월일비상·베다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