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오웬

그리스도의 영광 서론 / 존 오웬

새벽지기1 2016. 8. 31. 07:49


서론

신자가 추구해야할 최고의 깨달음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은 [영의 생각, 육의 생각]과 [죄 죽이기]와 함께 존 오웬의 3대 걸작중 하나이다.
이 책의 목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데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일들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기쁨과 찬송의 제일되는 대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그리고 부지런히 현재의 상황을 살펴보고 나서,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참으로 위험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고도 참된 우리의 유일한 안내자를 버리고, 기록된 것보다 더 지혜로워지려고 지나치게 애를 쓴 나머지, 성경의 계시를 떠나 공상과 상상으로 자기들의 생각을 부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참된 지식이 없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뜻을 어둡게 하며,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말하고, 알맹이가 없거나 그들 속에서 전혀 믿음의 신령한 양식이 되지 못하는 것들을 함부로 발설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영광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관점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얻게 되는 그리스도와 그 영광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연약하고 희미할지라도, 그것마저도 다른 모든 이해나 지식보다 말할 수 없이 더 우월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존 오웬 생애 마지막 저작이자 최고의 역작 ' 그리스도의 영광 '

이 책은 존 오웬의 수많은 저작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집필된 작품으로, 그의 학문적 경지의 최완숙기에 집필된 투혼의 불꽃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삶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을 의식하면서, 자신은 물론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복락이 바로 ‘이 땅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면서 살다가 장차 하늘나라에 가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직접 보며 거기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는 임종 직전에 평생토록 열정을 쏟아 부은 신학 연구의 대결론을 이 책에 고스란히 담았다. 참으로 우리를 창조하고 선택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참 하나님으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사 구원 사역을 이루신 그리스도와, 성도를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성령의 그 영광을 보고 누리는 은혜와 특권을 누리기를 소망해 본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날마다 묵상하고 누리라(윤종훈교수)

오웬은 이 작품에서 두 가지 사실을 목도하면서 안타까워한다. 첫 번째로, 오웬은 수많은 성직자들을 위시하여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한다. 목사는 물론 교회의 직분자들이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과 부활의 권능을 통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 아버지’(막 14:36)라고 부르는 특권을 받았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영광은 뒷전으로 하고 자신의 삶에 도취하여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오웬은 개탄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는 아직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해 ‘자기 의’에 도취된 채 흥청망청 살아가고 있는 회심하지 못한 죄인들을 안타까워한다. 바로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향하여, 오웬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진정으로 발견하고 모두 함께 이 영광을 누리게 되기를 호소하고 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17:24).

오웬은 이 한 구절을 가지고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본질이 무엇이며, 왜 불신자는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런 묵상이 가져다주는 엄청나고도 가공할 만한 영적 능력에 대하여 상세하게 제시한다. 그는 성도가 누리게 될 최고의 복은 그 영광을 직접 보는 것임을 논증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지고 무능력한 영성이 회복되며, 그토록 즐기던 죄악된 삶이 쓰디쓴 독초의 맛과 같아지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오웬은 본서를 마무리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해야 할 가장 근원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성도는 예루살렘의 딸들로서, 아가서에 제시된 ‘순결한 신부’로서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데, 바로 이러한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해야만 하는 것이다.

Ⅰ 왜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와 그의 영광을 묵상하는 최상의 책무를 감당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참된 안식이나 만족을 결코 얻을 수 없다.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랑하며,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신의 위치를 뽐낼 수 있다. 인류의 모든 행복이 오직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을 등지고 패역함으로 지옥에까지 낮아져 비참하게 된 우리의 본성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피조물보다 높아진다.

우리의 첫 번째 조상은 인격 안에서 우리의 본성이 처음 만들어질 때, 우리의 본성은 존귀와 영예로 관 씌여졌다.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으며,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바 더 낮은 세계를 지배하는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본성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의 본성을 탁월함과 아름다움과 영광의 보좌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 본성이 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벌거벗겨지고, 진흙구덩이에 내동댕이쳐졌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인간 본성의 모든 내적인 기능들 속에 더러운 정욕이 침입함으로 말미암아 인간 본성 전체가 하나님을 닮지 못하게 하는 것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하여 끝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그 이후 인간의 본성은 사탄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고, 모든 피조물들의 원수인 사탄은 저급해진 인간의 본성 속에서 왕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이 무엇보다 비열하고 야비해지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인간 본성의 수치요 부끄러움이다.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인간은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태였을 때, 즉 타락하여 야비해지고 가난하며 저주받은 상태로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인성(人性)을 취하셨다. 자신의 인격 속에서 조금도 흠이 없고 거룩한 본질을 가지심으로써 극도의 비참에 떨어진 인성이 다시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더 높아진 것이다. 그 인성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높이셨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엡 1:20-21).

그리하여 우리가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큰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그것들 가운데서 뽐낼 수 있고, 그것들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귀하게 여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믿음과 은혜의 빛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가 참여하게 된 그 신적 성품의 존재와 목적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극한 비참함에서 구원받아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허락받은 그 영광스러운 높아짐에 들어가게 된 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의 생각들은 그들의 영혼에 새로운 힘을 주는 은혜로 충만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인성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우리 본성의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하기 때문이다.

2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확보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친구가 서로 사랑하듯이 우리와 하나님은 서로 닮아 있고 서로 만족해하는 그런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이 관계의 연합의 끈은 우리가 하나님을 등지고 반역함으로써 너무나 빨리 끊어지고 말았다. 우리의 본성 전체가 도덕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비참의 깊이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한하신 은혜와 지혜로 다시금 우리의 생명을 회복시키겠노라는 뜻을 세우셨다. 우리의 본성이 다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도록 계획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는 분리되지 않도록 그 일을 해내셨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이 무너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아들의 인격 안에서 우리의 인성을 자기 자신과 본질적으로 연합시키심으로써 그 뜻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성의 충만이 육신을 입고 실제적이고도 영원한 방식으로 아들의 인격 안에 거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가 영원히 보장받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그 자비가 우리 각 사람에게 미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영광을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피조물의 장자가 되셨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분량만큼 그리스도를 본받게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들로서 이 영광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3 사람이 만나기 쉬운 모든 대적들, 심지어 죽음까지도 그리스도 안에서만 극복할 수 있다.
-이 영광에 대해서는 이후에 살펴보기로 한다.

4 눈에 보이는 하늘보다 훨씬 위에 있는, 그리고 빛이 충만한 그 복된 곳에 우리가 거할 수 있다는 보증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루살이의 공격에도 부셔져 버릴 만한’ 흙집에 살고 있다. 또한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의 한 치 높이도 떠서 살수가 없다.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의 밝은 별들은 그곳에서 우리가 함께 거하기에는 너무나도 영광스러워 보인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그 모든 것들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 사실을 이해하고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거대한 천체들이 거하는 우주 공간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영광스러운 곳에서 영원한 삶을 영위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그런 곳에 거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우리 본성에서 조금이라도 존재하는가?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안에서 우리에게 하나의 보증물을 주셨다.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성을 취하신 채로 눈에 보이는 하늘보다 훨씬 더 높이 오르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이 거하는 영원한 처소는 바로 빛과 영광으로 충만한 복된 곳이다. 그리고 그가 계신 곳에 우리도 영원토록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Ⅱ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함으로써 얻게 되는 그 특별한 유익은, 바로 우리를 삶에서든 죽음 앞에서든 기쁨과 안위 하도록 이끌어 준다는 것이다. 그 영광을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살아 있을 때나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가 만나게 되고 갈등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들을 능히 기쁨과 승리감 속에서 극복하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삶이란 무엇인가? 시험과 환난, 격변과 슬픔, 위험과 두려움, 질병을 만나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러한 모든 고통들이 일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어떤 힘과 위안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모두 불확실하며 만족스럽지 못하고, 잠시 있다가 없어질 뿐이다. 모든 것들이 죄로 오염되어 쓴맛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와 관계되어 있는 모든 것 속에 고통과 슬픔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여러 가지 극심한 재난을 겪고 있는 때에는 이러한 것들이 더욱 고조된다.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눅 21:25-26). 많은 곳에서, “모든 주민이 크게 요란하여 사람이 출입이 평안하지 못하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서로 치고 이 성읍과 또한 그리하여 피차 상한 바 되었나니, 이는 하나님이 여러 가지 고난으로 요란하게 하셨음이라”(대하 15:5-6)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악인들의 경건하지 못한 행동에 임하는 고통은 인생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애처롭게도 양심의 증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한다. 여러 부류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분열과 적대감이 만연하다. 인간 삶의 중압감과 허무함과 비참함이 지각 있는 모든 모든 사람들에게 불만을 토로하게 한다.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이교도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악에 대항하여 이길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가? 우리가 이 모든 악에 짓눌려 연약해지지 않고,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고후 4:8-9)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이고도 영원한 것들을 본다면, 모든 고통이 경감되고 우리의 짐이 가벼워지고 우리 영혼이 낙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모든 것들을 합당하게 포괄하고 있는 주제가 곧 그리스도의 영광이요, 그 영광이 그것들을 주도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때문이다.

항상 그 영광을 묵상하는 사람은 악한 일들을 만나 괴롭힘을 당할지라도, 그 모든 악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할지라도 능히 이겨 낼 것이다. ‘그 생각이 하늘에 속한 것들을 향하고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사람들은 곤고함에 직면하면서도 끝내 날아가 버릴 돈을 모르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정말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는 것이야말로 그런 비참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질병을 낫게 할 유일한 향기름이다. 아무리 우리를 압박하고 구차하게 하며 당황하게 하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마음으로 이 영광을 바라보며 우리가 이 영광에 동참하고 있음을 바르게 숙고할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위로와 도움이 베풀어 질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할 때 우리가 그런 하찮은 것들 때문에 고통당하며 마음 아파하는 것이 얼마나 합당하지 못한 일인지 알게 된다

그런 고통과 마음 아픔은 세상에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을 지나치게 귀중하게 여기는 데서 싹이 트고 뿌리를 내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확실한 분별력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하기까지는 오직 두려움과 슬픔과 혼란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곧 이 땅의 모든 것은 일시적이며 끝내 모두 사라져 없어질 것들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반면 우리가 확실하게 분깃으로 받은바 저 하늘에 속한 것들은 지상에 속한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값지고도 우월하다. 바로 이런 가치관을 지닐 수 있는 확실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 영광에 대한우리의 관계를 진실로 볼 수만 있다면, 우리가 그 영광을 바르게 이해하고, 우리의 마음이 그것에 사로잡혀 있고, 우리의 정서가 그 영광을 즐거워하는 데로 기울어져 있다면, 고통과 질병과 슬픔, 두려움과 위험, 사망쯤도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서 충만한 자유를 얻을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할 때 마음이 회복되고 평정을 찾게 된다

사람들의 마음은 본시 고통으로 말미암아 흔들리기 쉽고, 여러 가지 애착과 정욕으로 인해 평정을 잃어 버리기 쉽다. 시편 기자는 곤고할 때 자기 속에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고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 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르게 묵상하면 그 마음이 회복되고 평정을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안정되고도 고요한 심사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믿음은 요동하는 정욕의 바람과 파도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막 4:39)라고 명령할 것이며, 격정의 바람과 파도가 순종할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생이 여러 가지 고난 속에서 궁극적인 안식을 찾아 기댈 곳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뿐이다.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롬 5:2-5)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의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뿐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 편에서 사용해야 할 방식들과 방편들이 있다. 그러한 것들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바로 그 방식과 방편을 통해서, 바로 그 방편이 취해질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각을 베풀어 주셔서 ‘말로 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으로 즐거워하게’ 하실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영광을 진실하게 숙고할 때 기쁨과 위안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여 그 관문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사망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르게 숙고하는 의무를 감당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유익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진실하게 숙고할 때 기쁨과 위안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여 그 관문을 통과하게 되는 것이다. 일관된 기쁨과 승리감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러한 것들이 모자라서 평생을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종노릇하는 삶을 살았다.

우리가 죽음에 직면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어떻게 주장하실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그 시련에 대해서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모든 일을 주권적인 방식으로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땅히 행하라고 요구하신 것들이 있다.

1) 육체를 떠나게 되는 우리 영혼을 하나님의 손, 곧 우리의 영혼을 능히 받아주고 지켜 주고 보호해 줄 수 있으며, 우리의 영혼을 안식과 복락의 상태에 두실 수 있는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는 ‘믿음의 특별한 행위’가 우리에게 요구된다.

영혼은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과 분리되어 영원한 상태로 들어간다. 이 땅에서 외적인 감각을 통해 보고 듣고 누렸던 모든 것들 중 어느 하나도 그렇게 영원히 떠날 때는 잠시도 영혼과 함께 머물 수 없다. 영혼은 믿음으로 받은 것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그 영원한 세계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우리에게로 돌아온 사람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영혼 세계를 전혀 알 수 없도록 그것을 숨기고 계신 것 같다. 다만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믿음으로만 받도록 하셨을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몸을 떠난 후에 영혼이 제멋대로 취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영혼은 이제 더 큰 다른 존재의 주장에 절대적으로 순응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는 사람만이 내세의 상태를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상태가 안식과 복락을 가진 상태임을 알고 처신할 수 있다. 그러기에 사도는 확신에 차서 이렇게 말한다. (딤후 1: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다른 모든 은혜와 마찬가지로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위대한 표본이시다. 그는 몸을 떠나는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셨다. (눅23: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니이다.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시편 기자도 동일한 상황에서 그렇게 하였다. (시 31:5)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시 16:8-11)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주님은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때, 몸을 떠나 있는 자신의 영혼이 결코 악한 것을 만나지 않고 복되게 부활할 자신의 몸과 다시 합하게 되어 영원한 영광 가운데 들어가게 될 것임을 온전히 확신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구속주로 믿는 사람들의 영혼을 즉시 받으신다. 스데반도 그랬다(행 7:55). 그리스도의 영광과 인격, 능력과 높아지심, 그리고 그의 직무와 은혜를 매일 묵상하는 것, 이보다 사람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손에 맡기도록 더 강하게 격려하는 또 무엇이겠는가?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이제 몸을 떠나는 자기 영혼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과 돌보심에 부탁하기를 무서워하며 주저할 수 있겠는가? 우리도 죽어가는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받으시고자 준비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보게 될 것이다.

2) 동일한 목적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또다른 의무는,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이 육체와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우리에게 필요하고 바람직한 모든 것들과 언제라도 기꺼이 결별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전 3:21)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인간의 영혼과 짐승의 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무신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과 짐승의 근본적인 차이를 생각할 때에만 무신론에서 해방될 수 있다. 사람은 짐승과는 달리 불멸하는 영혼, 하늘에 속한 영을 가지고 있다고 지혜자는 말한다. 그런데 몸과 영혼이 특이하고도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기에 그 둘이 나누어지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고정관념이 전체 인성 속에 도사리고 있다. 몸과 영혼이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은 필연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그러므로 이런 성향을 극복할 수 없다면, 우리는 평안하고도 기쁘게 죽을 수가 없다. 신자들은 믿음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 성향을 극복하여 몸과 영혼이 나누어지는 것을 소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망 안에서 안식하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싶을 때가 되면 너를 부를 것이고, 너는 흙속에서 그 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을 행사하셔서 하나님 손으로 정결하게 지으셨던 너의 처음 상태의 그 찬란한 영광을 되찾게 할 것이고, 말할 수 없는 영광과 특권과 영광을 네게 주셔서 너를 영화롭고도 부요하게 만드실 것이다. 그러나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게 만드는 모든 생각들을 떨쳐 버려라. 흙으로 돌아가라.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단 12:13).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되려면, 우리가 지금 연속적인 묵상의 주제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고 숙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그 모든 영광을 소유하고 있는 그분이, 우리가 언젠가는 겪게 될 ‘몸과 영의 분리’를 실제로 겪으셨기 때문이다.

3) 하나님께서 우리로 이 세상에서 떠나게 하실 때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순복해야 한다.

때가 되면 자신이 기꺼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그때가 오지 않기를 바란다. 거의 대부분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고 스스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위해 자기가 감당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연장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예컨대 가족들이나 친척들, 세상의 재물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런 모든 소원의 바탕에는 이생에 대한 애착이 깔려있다. 이런저런 이유들을 버리지 않는 한, 이생에 대한 애착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죽음의 때와 기한에 대한 문제를 하나님의 뜻에 부단히 맡기지 않는 사람 중에는 위안 가운데서 기쁨으로 죽을 사람이 아마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때는 하나님의 주권저긴 손안에 있으며,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결심과 이생에 대한 애착이 포기 없이는 이 세상에서 최소한의 견고한 평화도 누릴 수 없다.

4) 죽음의 방식과 방편에 대해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죽음의 시기와 시간뿐만 아니라 죽음이 다가오는 방법과 방식도 우리에게 특별한 시련이 된다. 이 시련에 대해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고, 죽음의 노예로 묶여 있을 수밖에 없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길목에는 우리의 힘을 소진시키고 곤비하게 하는 것과, 태워 죽이는 열기와 강한 고통, 칼고 불고 고문과 외부적인 수치와 채찍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죽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거기에 필요한 은혜들을 마땅한 도리들을 항상 기꺼운 자세로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모든 일 가운데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주권적이고도 기뻐하시는 뜻에 부단히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실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무서워하는 어떤 일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실 때는 능히 그런 일을 감당할 만한 신령한 능력과 인내심도 함께 주실 것이다. 물론 그 일들이 기뻐하면서 손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평화롭고도 고요한 심정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런 믿음을 행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지금까지 말한 것 중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여기서 잃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탁월한 새 나라를 우리에게 부여해 줄 그 영광을 기대하지 않고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몸을 떠나는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의탁한다든지, 자기의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기꺼이 바란다든지, 그 죽음의 때와 기한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다든지, 죽음에 이르는 방식과 그 상황까지도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맡기겠다는 심정은, 오로지 그 영광에 대한 기대를 가져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현재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혀 바라보지 못하는 한 우리는 그런 자세를 절대 가질 수 없다. 아무리 그런 척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만일 이 세상에 있을 때 그리스도의 영광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그 영광을 조금이라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장차 나타날 것에 대해 이해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자유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직 그 영광이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쉽고도 즐겁게 여기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심지어 죽음 자체까지도 말이다. 왜냐하면 죽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충만한 영광을 누리도록 인도하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권고하는 것 말고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영광을 부지런히 묵상함으로써 얻게 되는 크고도 영광스러운 다른 유익들이 많이 있겠지만, 여기서 강론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영광스럽고도 위대한 유익들의 원천과 동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연약함과 곤비함, 점점 죽음에 가까워지는 건강 상태 때문에 그런 일을 위해 더 진력할 수가 없음을 덧붙여 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