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단상

삶을 욕망한다

새벽지기1 2016. 7. 13. 12:22


젊어서부터 나는 성공보다는 삶에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 부자보다는 삶에 충실한 사람이 항상 부러웠고, 그런 사람을 보면 마음이 설레었으니까 말이다. 아주 오랜 전 기억이다. 추운 겨울밤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친구를 만나러 군산엘 갔었다. 버스정류장을 빠져 나오니 거리가 꽤 복잡했다. 길가에는 노점상들이 줄지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생각하며 약속 장소로 가고 있는데 줄지어 있는 노점상들 속에서 중년의 아주머니가 작은 등불 아래에서 성경을 펴놓고 읽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이들이 스치듯 지나가는 거리의 혼잡함 속에서 성경에 눈을 박고 있는 초라한 행색의 아주머니를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전혀 다른 세계가 눈에 들어왔음을 직감하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나는 혼잡함 속의 평화를 느꼈고, 일상에 깃든 거룩을 보았다. 그 아주머니가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모습이 그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고 아름다워 보였다. 청년 시절에도 나는 젊은 부부가 아이의 손을 잡고 교회로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삶을 꿈꾸었다. 인생의 철학이 담긴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한 때의 꿈도 영화인으로서의 화려함보다는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음이 컸다. 목회를 하면서도 큰 교회를 이루는 것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인간적이고 소박한 삶의 공동체를 꿈꾸었다.

 

그랬다. 내 인생의 화두, 내 존재의 소망은 거의 언제나 삶이었다. 세상에서 삶만큼 아름답고 부럽고 소중한 것이 없었다. 사실 개인의 삶이란 지극히 미미할 뿐 아니라 심히 썩었고 뒤틀려 있다. 작은 힘에도 쉬 구겨지고, 없는 듯 존재하다가 사라져버리는 것이 삶이다. 내 삶의 있고 없음과 상관없이 세상은 굴러간다. 내 삶이 사라진다고 해서 세상에 구멍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삶의 초라함과 썩어 진동하는 냄새에도 불구하고 나의 모든 관심은 온통 삶에 집중되어 있다. 물론 때로는 위대한 성공을 탐하기도 한다. 성공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픈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젊었을 때는 거의 욕망하지 않았던 성공에 눈길이 갈 때가 있다. 하지만 삶은 아직도 내가 욕망하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이다. 삶보다 더 위대하고 소중하고 아름답고 부러운 것이란 없다.

 

내가 삶에 눈을 뜬 것은 하나님을 통해서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들이 붙박이처럼 눈앞에 고정되어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단지 그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창조자 하나님을 알고 나자 놀랍게도 그 모든 것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죽어 있던 것들이 갑자기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고요했던 세상이 하나님의 솜씨와 은총을 노래하는 운율로 출렁이기 시작했다. 희미했던 내 존재와 삶까지도 위대하신 분의 손길이 베푼 가슴 벅찬 선물로 채색되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분의 선물이었고, 그분의 사랑이었다.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고귀한 선물이었다. 넘치도록 풍성하고 다채롭고 아름답고 훌륭한 선물. 진실로 그랬다. 세상은 정말 부족할 게 없는 삶의 충만이었다.

 

물론 정반대의 진실도 눈에 들어왔다. 온 세상이 죄악으로 인해 찢어져버렸다는 것, 모든 피조물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다는 것, 온갖 선함과 아름다움에 가시가 돋아 서로를 찌르며 상처내고 있다는 것, 고귀한 선물들이 욕망의 탈취물로 변해버렸다는 것도 명백한 현실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세상이 문명의 옷으로 화려하게 치장할수록 그 속에서 삶이 질식당하고 있다는 슬픈 역설도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주어졌으나 지금은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이라는 것이 마침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눈앞의 슬픈 현실에도 불구하고 창조자께서 세상을 펼치신 목적이 삶(죽임살이의 반대인 살림살이)이었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나의 믿음이다. 나는 삶이야말로 창조의 오롯한 목표였다고 믿는다. 때문에 우리의 모든 행위는 오직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삶이 너에게도 삶이어야 하고, 너의 삶 또한 나에게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살이는 더 이상 그런 삶이 아니다. 이미 삶은 없다. 삶은 우리가 잃어버린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죄악으로 인해 강탈당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내가 삶에 그토록 목말라하는 것도 사실은 나에게 삶이 없기 때문이다. 삶이 내 존재처럼 썩고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삶이 있다면 그토록 간절히 삶을 노래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미 삶으로 배불렀다면 삶에 굶주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삶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삶을 찾는 것이고, 삶을 노래할 수 없기 때문에 삶을 노래하는 것이다. 진실로 그렇다. 내 안에 삶이 없다. 하여, 나는 아직도 삶에 굶주려 있고, 삶을 찾아 방황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존재에서 찾지 않는다. 그분이 펼치신 세계와 삶에서 찾는다. 나는 스스로 묻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삶을 펼치신 것이 무엇 때문일까? 세상과 삶 없이는 하나님의 존재 의미가 살아날 수 없기 때문 아닐까? 세상과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존재 의미의 장(場)이기 때문 아닐까? 하나님에게 존재가 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가 있을까? 아마도 하나님은 존재 없이 존재하실 것이다. 행위로만 존재하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하나님의 행위와 나누일 수 없는 하나 아닌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과 삶이 하나라고 말해서도 안 되지만 하나님 없이 삶을 말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삶이 무엇인가? 삶은 본디 생명의 들숨과 날숨이다. 하나님의 생기를 호흡하는 것이 생명이고, 그 생명이 자기의 숨을 쉬는 것이 곧 삶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 어떤 변형이나 변질이 없는 생명의 질서가 곧 삶이다. 때문에 생명과 삶은 사람이 계획하거나 관리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진면목을 알 수 없는 신비이며,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피어나는 은총이다.


내가 욕망하는 것이 바로 그 삶이다. 나의 삶이 너의 삶이 되고, 너의 삶이 나의 삶이 되는 삶을 나는 욕망한다. 너무 지나친 욕심일까? 그렇다. 지나친 욕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삶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 또한 사실이다. 하나님을 알고부터 삶이 눈에 들어왔고, 삶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구원의 실체였으며, 세상과 내 안에 결핍되어 있는 근본적 실체 또한 삶이라는 걸 깨우쳤으니까 말이다. 그렇다. 나는 예수님을 통해 삶보다 더 위대하고 소중하고 값진 것이 없다는 것을 깨우쳤고, 내 안에 삶이 없다는 절대 진실을 보았다. 하여, 나는 삶을 욕망한다. 삶을 꿈꾼다. 다른 것을 다 잃더라도 삶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 삶을 붙잡고 싶다. 진실로 삶을 살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랴. 하지만 그런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 삶을 욕망하면서도 삶 아닌 것 주변을 얼쩡거리는 나, 삶을 꿈꾸면서도 삶을 죽이는 죄악을 손으로 잡았다 놓았다 하는 나를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나는 삶 아닌 것에 이끌리면서도 삶을 꿈꾸고, 삶을 꿈꾸면서도 삶 아닌 것에 이끌리는 갈지자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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