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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증 (1/10) - '두세 번 뿐인(?) 인생의 대박 기회'

새벽지기1 2016. 7. 3. 07:15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빨리 빨리의 정신

오래 전 동남아시아의 관광지에 가면 현지인 점원들 누구나 한국말 중에 최소한 세 마디는 구사할 줄 안다는 개그가 유행한 적이 있다. 워낙 관광객이 늘어나고 한류 바람도 거세게 불어서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이 많아진 지금과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한국이 아직 제대로 알려지기 전인데도 한국인 상대로 장사하려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말이었다.

첫째, 무조건 가격부터 깎으려 드니까 “안 비싸요!”라고 해야 하고, 둘째는 혹시 가짜가 아닌지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니까 “진짜요!.”라고 항변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워낙 계산이나 포장을 서두르니까 “빨리 빨리!”라고 맞장구친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특성을 너무나 정확히 꼬집어낸 개그다.

이 중 가장 유별난 것은 아무래도 “빨리 빨리”의 근성일 것이다. 미국 이민 오니까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의 열림과 닫힘 단추를 전혀 누르지 않고 기다리는 것을 보고 참 신기하게 여겨졌다. 한국은 누구나 쉴 새 없이 눌러대는 바람에 표시가 다 벗겨질 정도이지 않는가? 그 전에 미국출장을 왔는데 악천후로 비행기에 탄 채로 공항활주로에 서너 시간 묶인 적이 있었다. 그 때도 어느 한 사람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모두 책을 꺼내 읽으며 조용히 기다리기에 속으로 과연 대국답다는 감탄과 함께 두려움마저 느꼈던 적이 있다.

성질 급한 한국인 Best 10이라는 흥미로운 조사결과를 며칠 전 신문에서 보았다. 그 중 Top 4만 인용해보면, 4위) 커피자판기 동작 완료 불이 꺼지기도 전에 컵 꺼내는 사람, 3위) 컵라면 물 붓고 3분을 못 참아 계속 젓가락으로 뒤적이는 사람, 2위) 현금인출기, 마트, 패스트푸드에서 짧은 줄 찾아 동분서주하는 사람, 1위) 상대방이 통화중인데 전화 안 받는다고 3번 이상 계속 전화하는 사람이다.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이는 각기 다른 네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저를 비롯한 거의 모든 한국인이 이 네 가지 행동을 동시에 다 하고 있다. 이런 객관적 평가를 접하니까 얼마나 조급하게 살고 있는지 스스로도 놀랄 정도다.    

물론 “빨리 빨리”의 정신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런 정신이 없었으면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부흥을 그렇게 단기간에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특별히 IMF 위기를 전 국민 금모으기 운동이나, 초고속 인터넷 망을 이용한 IT 산업의 문자 그대로 초고속 성장을 통해서 극복해내었지 않는가?

급기야 그런 정신이 한국을 신제품의 성공여부를 시험해보는 가장 좋은 시장으로 꼽게 만들었다. 금방 익숙해지지만 금방 싫증도 내니까 과연 새로운 아이디어나 제품이 얼마나 사람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오래 끄는지 한국인들에게 팔아보면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장기간 사용하는 제품은 그만큼 품질과 효용성에서 뛰어나다는 반증이라는 뜻이다. 거기다 휴대폰의 예에서 보듯이 금방 싫증내는 기질로 인해 끊임없이 신기술을 개발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생존조차 못하게 만든다.

오죽하면 호주의 한 미래학자가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려면 한국의 동향을 살피면 된다는 말까지 했겠는가? 자꾸만 새로운 것을 찾기에 미래 지향적이 될 수밖에 없다. 무슨 일이든 재빨리 처리하는 것은 아주 큰 장점이 된다. 최근에 일본이 한국을 두렵게 여기는 까닭도 돌다리도 두 번 세 번 두드려야 직성이 풀리는 자기들과 달리 너무나도 신속하고 융통성 있게 변화에 적용하기에 비록 시행착오는 다소 겪지만 아주 다이나믹하게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국민들의 신속성과 융통성이 국가적 에너지로 결집되면 아주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비록 조변석개 같은 예산 집행으로 낭비도 없진 않지만 이 또한 쉽게 잊어버리는 한국인 특유의 기질 때문에 그리 문제 되지 않는다. 작금의 세계적인 문화, 세태, 조류가 필수적으로 스피드를 요구하기에 그런 면에서 한국은 이미 태생적으로 우위에 서있다고 할 것이다.

득(得)보다 실(失)이 큰 조급함

그러나 조급함이 개인의 일생에 미치는 영향을 따져 보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아무래도 득보다 실이 훨씬 크다. 급하게 설쳐선 이익을 얻기보다 낭패를 볼 확률이 훨씬 높다. 신규사업계획의 타당성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선뜻 투자했다가 쫄딱 망한다. 단 하루도 못 참고 주식을 팔아 치우는 바람에 빚내서 투자한 원금을 갚을 길이 막막하다.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진 말로 대판 부부 싸움을 하고 급기야 이혼까지 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성경의 인물들도 크게 예외는 아니다. 아니 조급함의 잘못을 범해 큰 낭패를 보지 않은 인물을 찾기가 오히려 더 힘들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하녀에게서 아들을 낳아 가족 간의 갈등뿐 아니라 지금까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불씨를 제공했다. 모세는 불같은 성격을 참지 못해 애굽 관원을 죽이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애굽의 왕자에서 도망자 신세로 전락해서 40년간이나 광야에서 양치기로 숨어 지내야만 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조급함의 대명사로 스스로 제사를 지내려 했고 다윗만 보면 죽이려 들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 요나는 죄악이 관영한 이방 도시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제 멋대로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고래 뱃속에서 사흘을 지내야 했다. 베드로는 알다시피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잘 고백해놓고는 금방 인간적 의리를 앞세우다 야단맞았고 급기야 하루 저녁에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비겁한 자의 대표가 되었다. 이 외에도 예를 들자면 수도 없이 많다.  

그래서 성경은 조급함을 죽이라고 곳곳에서 직간접으로 권면하고 있는데 잠언에서 그 대표적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 14:29)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잠 21:5)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잠 29:20)

잠언서 기자는 조급함을 어리석음과 동일시하며 궁핍함을 불러오는 원인으로 꼽고 있다. 우선 성질 급한 자의 지능이 모자라다는 뜻이 아니다. 전후 사정을 자세하고도 정확하게 알아보지 않으면 엉뚱하고도 백해무익한 판단과 행동을 불러 온다는 것이다. 또 그래서 경영하는 사업을 망하게 하여서 궁핍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실감할 수 있는 말씀이다.

거기다 성경은 언어에 조급한 자는 미련한 자보다 오히려 더 못하다고 말한다. 조금 어수룩해서 어눌한 자와 상대를 하는 것이 낫지 성격이 급해 함부로 말을 내뱉는 자는 신뢰성을 까먹고 비호감만 조성할 뿐이다. 예수님은 심지어 말로 형제를 바보라고 저주하는 자는 살인을 범한 것과 같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실제로 말로 다른 사람의 인격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일은 비일비재한데 불행하게도 거의 대부분 그러는 줄도 모르고 지나친다.  

이런 조급함이 결정적으로 확장되어진 모습이 무엇인가? 바로 자살이다. 한국은 자살 천국이다. 교통사고로 죽는 이보다 더 많고, OECD 국가에서 자살률 1위이다. 선진국 문턱에 다다랐음에도 국민들 스스로 느끼는 행복지수는 전 세계에서 꼴찌에 가깝다. 이 모든 것이 조급성 때문이다. 아주 좋게 해석해야 다들 너무 똑똑해서 남들에게 뒤처지는 것을 못 견디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경쟁하여 발전하는 것을 도모하는 것까지는 좋아도 스스로 자기 분을 못 이기면 자기만 손해다.    

불신자의 경우 조급함의 궁극적 도착지가 자살이지만 신자의 경우는 하나님께 대한 의심, 불만, 원망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성경 곳곳에서 조급하지 말라고 명했고 실제로 잘못된 예도 수도 없이 많이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신자는 순전히 자기 조급함으로 인해 부정적 결과가 생겼음에도 하나님 왜 내게 이런 일을 허락하는가라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기 일쑤다. 우리가 겪는 환난의 거의 대부분을 잘 살펴보면 자신의 잘못이 가장 큰데도 그런 반성은커녕 분석도 않으려 든다. 무슨 일이든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하니까 무조건 기도라는 형식만 갖추고선 하나님께 불경한 말을 함부로 내뱉기 일쑤다. 거기다 하루 빨리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매일 새벽마다 마치 빚쟁이처럼 독촉한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실감하는 조급함의 폐해를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초조 염려 분노가 덮치면 속으로 조용히 하나에서 열까지 헤아리며 마인드 컨트롤을 해야 하는가? 일단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서 그 일은 잊도록 노력하고 차분히 다시 묵상하여야 하는가? 신자이기에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 전이나, 하는 중에 기도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시행해야 하는가? 그러나 자칫 종교적 수사에 불과하지 현실적으로는 아무리 기도해도 그분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께 인내심과 평정심을 부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할 것 같은데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그러는 것인가?

가장 자주 범하면서도 잘못인줄 모르는 신앙의 오류

한국 신자와 강단이 너무나 자주 범하는 잘못이 하나 있다. 사실 표면적으로는 아주 좋고 옳은 일이다. 그러나 엄밀히 그 내면을 따지고 들어가면, 잘못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아주 부족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 부족분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의 성숙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기에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어떤 문제라도 생기면 무조건 믿음을 강하게 하고 기도하여서 이겨내라고 권하는 것이다. 본 주제와 연관시키면 조급해서 손해를 자주 보고 때로는 죄까지 짓는 문제도 믿음의 기도를 통해 인내심을 얻어 이겨내라는 것이다. 반면에 솔직한 현실은 아무리 기도해도 인내심이 생기지 않고 욱하는 성질부터 튀어나와 그나마 있던 믿음마저 속수무책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근본 원인부터 알아내어야 한다. 원인을 알면 이미 그 문제는 반 이상 해결 된 것이다. 정확한 원인에 맞춘 정확한 해결책이 수립되면 그 해결책대로 따르면 된다. 해결책을 손에 쥔 이상 시간과 여유에 맞추어 자신과 싸울 일만 남았다. 신자더러 믿음과 기도는 등한시하고 전문가에게 현실적 해결책을 강구하여 그대로 실천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조급함의 본질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 또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서 그에 맞추어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용서하기 힘들다고 무조건 용서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달라고 기도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또 상대가 자신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용서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용서를 통해 무엇을 바라며, 이루고자 하는 결과가 무엇인지 등등을 모른 채 무조건 용서만 한다면 두뇌와 심장 모두가 빠진 신자가 된다. 무조건 용서할 수 있는 용서의 마취약은 없으며 하나님도 그런 약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신자가 자기 속을 깎아내는 고통과 번민과 갈등을 겪으면서 당신과 이웃 사랑의 본질을 깊이 깨닫고 난 후에 용서하길 원하신다.  

그럼에도 많은 신자들이 목사가 믿음으로 기도하여 용서하라고 권하면 무조건 아멘하고 대답한다. ‘믿음’과 ‘기도’라는 너무나 은혜로운(?) 용어가 동원된 너무나 지당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부부싸움을 밥 먹듯이 하다가 이혼 직전까지 간 부부에게 믿음으로 기도하여서 다시 사랑하라고 권면하는 것과 같다. 도무지 사랑할 수 없어서 그 지경까지 갔는데 그 원인과 해결책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부부간의 사랑의 본질부터, 또 하나님이 과연 부부의 사랑을 통해 무엇을 바라고 이루려는지 확신하지 못 하는 이상 어떤 힘도 발휘하지 않는 권면이다. 그저 종교적으로 옳은 말만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인간의 체질은 진토 같아서 사랑하지 못하는 원인과 해결책에 대한 성경적 개념과 원리를 확신하게 되어도 실제 실천하기는 요원한 일이다. 믿음과 기도가 필요한 시점이 바로 여기다. 너무나 연약하며 어리석은데다 죄의 본성까지 살아 있어서 제대로 실천 못하므로 성령의 인도와 간섭을 소원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나아가 기도한 후에는 하나님의 권능을 온전히 믿고 의지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요컨대 조급함에 대해서도 성경은 단순히 어리석다, 분쟁을 일으킨다, 그러니 인내하라는 권면으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바가 훨씬 심오하며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는다. 성경이 조급함을 어떻게 말하는지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전에 먼저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조급함이 생기는 일차적 직접적 원인과 또 그 해결책도 바로 시간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시간의 두 가지 개념

헬라어에는 시간을 나타내는데 두 가지 단어가 사용된다. 둘 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神)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먼저 “크로노스”는 그리스 모든 신의 우두머리인 제우스의 아버지다. 크로노스는 자신의 아들이 커서 아비를 죽일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서 아들들이 태어나자마자 자신이 삼키어 먹어버렸다. 크로노스의 아내는 제우스가 태어나자 또 죽게 버려둘 수 없다고 여기고 돌을 아기인양 강보에 싸서 남편을 속이고 태아는 몰래 숨겨 키웠다. 제우스는 장성하자 예언대로 아버지 크로노스를 죽여서 지하세계에 영원히 묻어버렸다.

그래서 크로노스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물리적 시간을 뜻한다.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흘러가는 그대로 두고 볼 수밖에 없으며 인간이 붙잡을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서 죽게 마련이며, 그 중간과정인 일생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의 연속일 뿐이다. 시간에 묶이는 세상만사도 일단 시작된 것은 반드시 끝을 향해 달려가게 마련으로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시간이다. .

시간의 또 다른 단어는 “카이로스”다. 이는 “기회(機會)의 신”의 이름이다. 긴 머리카락이 앞 얼굴을 무성히 가리고 있어서 사람들은 기회가 찾아와도 기회인지 잘 모른다. 또 어깨에 큰 날개가 둘 달려 있고 발에도 작은 날개가 둘 달렸다. 기회를 주었는데도 잡지 않고 주저하고 있으면 곧바로 날라 가버린다. 뒷머리는 완전한 대머리로 머리카락이라곤 없다. 기회가 지나간 뒤에 후회하며 뒤늦게 잡으려 들어도 도무지 잡을 수 없음을 뜻한다.

따라서 카이로스의 시간은 단순히 기계적인 시간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시간 안에 담긴 가치와 의미를 중시하는 개념이다. 아무리 많고 고달픈 일을 해도 그 일을 함으로써 예상되는 결과가 보람차다면 전혀 괴롭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신이 난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한다. 아주 쉽고 편한 일을 해도 일상 반복되는 일이면 그저 짜증나고 귀찮다. 또 진짜로 좋아하는 연인과 함께라면 아무 일 없이 쳐다만 보고 있어도 시간이 모자라 아쉽다.  반면에 마음에 들지 않은 상대와는 아무리 최고급 식당에서 식사하고 근사한 오페라를 구경해도 연신 하품만 나올 것이다.

크로노스는 인간의 통제 밖에서 그저 흘러가버리는 객관적 시간이다. 반면에 카이로스는 그 객관적 대상 안에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자기만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객관적 길이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생각하기에 따라 바뀌는 주관적 시간이다.  
    
크로노스의 인생

사람이 크로노스 시간에 묶이면 그저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오늘 안에 처리할 일의 목록대로 완수되지 못하면 초조와 불안이 엄습한다. 어떻게 하면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해치우느냐에 모든 관심이 쏠린다. 자기 삶과 인생의 성공여부를 가름 하는 잣대도 오직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뽑는 경제원칙 뿐이다. 여러 일을 동시에 하다 보니 자연히 생각도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성경에 너무나 좋은 예가 나온다.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38-42)

다들 잘 아는 이야기다. 예수님을 잘 대접하려는 마르다의 진심어린 성의는 높이 사줄만 하다. 그러나 식사 대접과 예수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려 했다. 자연히 주님의 말씀에 집중이 안 되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마리아가 자기 일을 거들어주면  빨리 대접할 수 있고 그런 후에 함께 교제를 나누면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반면에 마리아는 둘 중에 한 가지 일만 택했기에 평온한 마음으로 주님 말씀에 완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예수님의 뜻도 식사보다 교제를 나누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마르다로선 그 선한 본심과는 달리 대접 받는 자가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만 참 대접이라는 기본 예의마저 지키지 않은 꼴이 되어버렸다. 그저 일의 효용성을 중시해서 크로노스의 시간을 가능한 쪼개어 아껴 쓰며 더 많은 결과를 맺으려 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마르다에게 가장 의미 있고 꼭 하고 싶은 일 한 가지만 해도 족하다고 권했다. 두 마리 토끼 잡으려다 한 마리도 제대로 못 잡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마리아에게는 자기가 좋아하는 한 가지 일에 집중했으니 진짜 100% 이상의 효용성이 보장된다고 칭찬했다. 마리아는 자기가 택한 일을 빼앗기는 법이 없다고 했으니, 마르다는 오히려 아무리 찾고 찾아도 얻지 못하고 있는 것마저 빼앗긴다고 깨우쳐 준 셈이다. 당시 상황에선 요리 준비마저 제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7)

성경은 그래서 크로노스의 인생을 사는 자는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의심하면서 구하는 자는 주께 얻지 못한다고 했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두 마음은 물론 믿음과 의심의 둘을 뜻한다. 마르다처럼 여러 가지 일을 한 번에 하려는 것과는 원칙적으로 다르다. 거기다 야고보 사도가 성경을 저작할 때에 이런 시간의 두 개념을 의식적으로 고려한 것도 결코 아니다. 그러나 본문의 원론적인 의미를 실제 삶에 적용하면 그런 결과가 도출 된다는 것이다. 마르다처럼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하려는 것도 일종의 두 마음을 품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일을 단번에 아주 효율적으로 이루려는 욕심이 우리의 기도에 많이 내포된다. 아니 거의 전부일 것이다. 지금 신자가 처한 모든 여건에서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다. 심지어 거창하게 하나님의 뜻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자신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게 이뤄내야 할 일도 정확하게 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이 것 저 것 하고 싶은 일을 주저리주저리 아뢸 뿐이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면서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고 꼭 해야만 할 일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면 그 개수에는 상관없이 당연히 온전한 믿음으로 아뢸 것이며 또 생각이 분산될 리도 없다.  

카이로스의 인생

모든 사람이 시간 개념에서 크게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해 충실하게 살겠다고 다짐하거나 또는 그렇게 산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물론 아주 좋은 삶의 태도로서 믿음과 상관없이 누구라도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인간이 인식하는 시간에는 현재라고는 전혀 없다. 어떤 사물, 사건, 사안이 자신의 지정의로 인식되면 벌써 과거가 되어버린 후다.

시간은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하는 것과 동일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우리를 덮치듯 다가와선 단 일초라도 붙잡을 여유는 전혀 주지 않고 우리 뒤로 쏜살 같이 달아나버린다. 기회의 시간 카이로스가 비록 인생에 몇 번 없고 놓치기도 쉽지만 간혹 정신을 바짝 차리면 잡을 수는 있다. 반면에 크로노스의 시간은 째깍, 째깍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이미 과거가 되어있다. 도무지 통제 불가능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너무나 어리석게도 그 언에 붙들려서 어떻게 하든 그것을 쪼개서 쓰려 한다.

크로노스 시간 개념으로 따지면 인간은 과거를 사는 자와 미래를 사는 자 둘로만 나뉠 뿐이다. 순간순간 느끼는 시간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음에도 이전의 영화나 이미 날라 가버린 기회만 탄식하고 있다면 크로노스 형 인간이다. 반면에 과거에 대한 미련은 전부 잊어버리고 앞날만 바라보는 자는 카이로스 형 인간이다.

서두에 인용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뒤에 있는 것 즉, 이미 자기가 행한 일은 완전히 잊어버린다고 한다. 대신에 오직 앞에 있는 푯대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상을 잡기 위해서 산다고 한다. 그 부르심의 상은 그리스도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이다. 천국에서 완성될 영광스런 구원만이 그의 삶과 인생의 의미요 가치요 목적이었다.  

다른 말로 그는 미래를 향해서만 살았다. 비록 도무지 잡을 수도 통제할 수 없는 물리적 시간 안에 갇혀 살지만 그는 그 시간 안에 자기 고유의 소망과 기쁨으로 가득 채우며 살아간 것이다. 매 순간을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꾼 것이다. 한 마디로 내가 지금 왜 살며, 무엇을 향해 걸어가고 있으며,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확신하면서 살아간 것이다.  

필연적으로 그에게 조급증이 생길 이유라곤 없었다. 지난 실패니 미진한 부분에 자꾸만 미련과 후회가 쌓인다면 언제 다시 성공할 수 있을지 염려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지난날처럼 또 실패하지나 않나 초조함부터 생기게 마련이다. 바울도 인간인지라 지나간 허물, 잘못, 실수, 실패, 낙심, 후회 등이 생기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그는 과거의 아무리 큰 실패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더 크고 풍성하며 영광스런 하나님의 미래만 바라보았던 것이다. 과거는 자연히 잊혀지게 되며 그 상처는 물론 흔적도 남을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크로노스의 인간은 오직 시간 대비 효율성과 생산성만 따진다. 현실에서 열매가 얼마나 풍족하게 열렸느냐가 유일한 관심사다. 심지어 신자들이 영적인 면에서도 그렇게 따지려 드는 경우를 종종 본다. 자신이 몇 시간 기도했으며, 며칠이나 금식했으며, 얼마나 헌금했으며, 새벽 기도에 하루 안 빠지고 개근했으며, 등등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기준이 주로 외적으로 경건을 실천한 양(量)이다.

자연히 하나님에게 바라는 은혜도 현실에서의 외적인 보상이다. 재물, 명예, 권세만 바란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영적으로 그만큼 투자했으니 자기에겐 더 확실하고도 화끈하게 체감할 수 있는 영적인 기쁨과 평안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영성에서마저 투자한 만큼 비례하여 결과가 보장되지 않으면 은혜가 없다고 여긴다.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

효율성, 생산성, 경제 원리 같은 것은 하나님에겐 전혀 해당되지 않는 용어다. 그분의 세상을 통치하는 일반 은총에는 적용될 수 있을지 몰라도 신자가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 누리는 측면에선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간단히 말해 부모가 이해타산을 따져서 자식을 사랑하는 법은 없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천부께서 우리를 그렇게 다스리겠는가?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그 고유의 가치와 의미만 따진다. 아니 모든 일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분이다. 쉽게 말해 신자를 당신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바꾸어서 당신의 영광을 세상 앞에 드러내기만 원하신다는 것이다. 신자더러 바울처럼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꾸어서 살아가라는 것이다.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흔히들 현실적으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신분, 능력, 여건에 처한 사람이라도 평생에 세 번쯤 절호의 기회는 온다고 말한다. 바로 그 세 번의 기회 중에 한 번이라도 잘 포착하여 적극 활용한다면 극적인 인생 반전을 이루어서 얼마든지 남부럽지 않은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부동산 경기의 막차를 탄 사람, 미모만 가진 여자에 홀려 끈질기게 따라 다니는 갑부 집 딸을 걷어 찬 사람, 새 아이디어로 동업하자고 찾아 온 친구를 문전박대 했더니 대박이 난 것을 뒤늦게 안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실감이 나는 말이다. 또 그런 대박 찬스는 평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함도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그리스인들이 카이로스의 신을 그런 모습으로 고안한 것을 보면 고대나 지금이나 인생살이의 고달픔은 동일하고 또 인간의 욕심도 여전한 것 같다.      

그러나 신자에게도 과연 평생에 성공할 기회가 두세 번뿐이겠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평생에 겨우 두세 번의 기회만, 그것도 아주 희미한 모습인지라 제대로 붙잡지 않으면 쉽게 날라 가버리는 식으로 주는 그런 쩨쩨한 분이 결코 아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평생에 한두 번 도와주고 말 것인가? 자식이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죽기 전까지 뒷바라지 할 용의가 있다. 인간적 능력의 한계로 끝까지 도와주지 못하긴 해도 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 하나님 안에 있으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인생이 괴로워서 고난의 해결을 구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항상 기쁘지 않으면, 또 범사에 감사가 안 되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뜻이 무엇인지 묵상하고 그 뜻을 붙들기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하나님 안에 사는 자는 모든 순간이 인생 성공의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접하는 모든 사건, 사람, 환경 등이 그분 안에선 절대 실패할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일생에 세 번의 기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열 번이 넘게 그분의 기회는 찾아온다. 신자가 하는 모든 말, 행동, 일을 통해서 그분의 거룩함이 묻어져 나오며 그분의 이 땅을 다스리는 완전하고도 의로운 섭리가 실현된다. 당신의 기회는 기껏 수량적 효율성과 생산성을 갖고 따질 계제가 전혀 아니다 그분의 그분다우심이 인간이 기대, 예상, 계측, 상상 하는 것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되게끔 신비롭고도 풍성하게 드러난다. 문자 그대로 신묘막측(神妙莫測)할 뿐이다.  

성경이 신자더러 어떤 적은 자, 적은 일에라도 충성하라고 권하는 까닭이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당신께 한 일과 같다고 한다. 모든 일이 당신의 기회가 아니고는 그럴 수 없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범사를 통해 당신의 사랑과 권세가 완벽하게 신자에게 전해지며 또 신자를 거쳐 주위에 나눠지게끔 당신께서 일하신다. 신자의 눈에는 당장 그런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아도 눈에 안 보이는 영역에 있는 참 실체에는 너무나도 정확하게 그렇게 된다.

심지어 신자가 스스로 실망하다 못해 하나님께 의심, 불만, 원망하고 있어도 그분의 신자를 통한 역사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요컨대 신자는 신자가 된 것만으로도 평생을 감사할 수 있으며 전 우주의 모든 좋은 기회를 이미 다 거머쥔 것과 같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하셨는데 다른 모든 좋은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을 리는 없다. 하나님 그분이 항상 함께 하시는데 어찌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분 안에 있는 신자에게는 지구의 회전 속도와 맞먹는 속도로 다가오는 크로노스의 시간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분의 카이로스의 시간일 뿐이다. 모든 순간이 복 받는 순간이며, 모든 일이 복 받은 일이며, 모든 사람이 그분의 사랑을 주고받을 대상이며, 모든 여건에 그분의 완전하심이 내포되어 있다. 어떡하든 대박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하며 발버둥 칠 이유는 없다. 모든 것을 그분께 완전히 내려놓고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그분의 놀라운 섭리만 잠잠히 지켜보면 된다.

그 때 비로소 인간적 조급함은 사라진다. 조급함으로 인한 인생의 실패도 없어진다. 조급함이란 한두 번의 기회만 있을 때에, 그것도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지 모를 때에 생기는 법이다. 그러나 모든 순간이 기회라면 구태여 하나씩 잡으려 들 필요 없이 그저 누리고 즐기면 된다. 그렇게 안 되는 유일한 이유는 신자가 되어서도 어떡하든 범사를 자기만의 기회로 삼으려는 욕심이 생생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과 사건이 그분의 기회라고 확신한다면 조급증은 사라질 것이다. 시편 기자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바로 그렇게 소리치지 않았는가?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84: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