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오웬

존 오웬과 ‘영의 생각’(롬8:6) / 최승락 교수

새벽지기1 2016. 6. 22. 12:18


존 오웬과 ‘영의 생각’(롬8:6)


들어가는 말


영국이 낳은 신앙의 거장 중 한 사람인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은 롬8:6에 나오는 “영의 생각”(phronema tou pneumatos)이라는 표현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인의 성결이 어떤 특성을 가지는지에 대해 긴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글은 그의 선포된 설교에 기인한다. 그는 자기 인생의 종반기인 1681년에 이 주제에 대한 긴 연속 설교를 행하였다. 이 설교는 원래 그가 병이 들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땅의 것이 아닌 위의 것과 성령의 일에 전적으로 부합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스스로를 위한 지침으로 작성한 내용이었다. 병에서 회복된 뒤에 오웬은 이를 설교로 작성하여 선포하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전과 유익을 주었다. 혹자는 오웬의 많은 글들 가운데서 가장 빛나고 유익한 글로 이 설교를 꼽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오웬의 주된 관심은 우리의 영혼이 성령의 일에 깊은 애정을 담아 전적으로 몰입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우리의 마음과 삶의 자세들을 훈련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성령의 생각(프로네마)’이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애정/애착(affections)과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에 먼저 우리의 마음이 진실되게 점검되어야 한다는 것을 오웬은 잘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설교를 훈련에 관한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성령의 프로네마’가 단순한 지식이나 지적 활동만이 아닌 것처럼 또한 단순한 감정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분별력 있는 정서이며, 헤아려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열정이다.


‘성령의 생각’에 대한 오웬의 설교

먼저 오웬은 ‘성령의 프로네마’에 대한 설교가 왜 성도들에게 필요한지에 관하여 그의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이 책을 내면서 본인이 의도하는 목적을 위하여 주목해야 하는 제일 되는 요점은, 세상이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기 위하여 안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상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자기 정신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채우려고 별의별 방식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를 온전히 자기 방식대로 장악할 수 있다면, 세상은 어떤 이들의 마음 속에서 요새를 구축하여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을 전혀 가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의 마음 속에서는 모든 은혜를 약화시킬 것입니다. 또한 영원한 파멸의 위기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 한글번역은 서문 강 목사의 번역 <존 오웬의 영적 사고방식> (3판, 서울: 청교도신앙사, 2003), p. 7에서 인용한 것이다. 영어본을 사용하는 경우는 본문 속에 전집 권수와 페이지 수를 표기한다. 필자가 사용한 영어본은 The Works of John Owen, vol. VII (Edinburgh: T & T Clark, 1862)이다.

오웬이 의도하는 것은 이와 반대의 결과를 이루는 것이다. 곧, 성도들이 세상에 그 마음과 관심과 사랑을 빼앗기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그의 일에 온 마음을 드리도록 세우기 위함이다.

오웬은 ‘성령의 프로네마’를 정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된 마음의 실제적 실행”(actual exercise of the mind as renewed by the Holy Ghost)으로 보고 있다(VII.270). 따라서 그것은 어떤 사실만을 파악하는 기계적 정신으로 머물지 않고, 성령의 빛으로 조명을 받기도 하며, 영적인 일들에 대해 애착과 끌림을 가지기도 하고, 또한 그 가운데서 얻는 맛과 향취에 깊이 만족을 누리기도 한다. 단순한 지적 기능만이 아니라 감정과 갈망, 판단과 결단, 선택 등을 포함하는 총체적이고 역동적인 마음의 활동을 가리킨다. 이는 행동을 위한 동기를 유발하며 행동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따라서 오웬은 이를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절대적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그 작용하는 힘과 주도적 활동의 관점에서 이를 이해하고 있다.

오웬은 ‘성령의 프로네마’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이에 접근하고 있다. 첫째는, 마음이 그 애착에 있어서 어떤 습관적 틀과 성향과 경향을 가지는지에 대해, 둘째는, 어떻게 마음의 생각과 묵상과 갈망이 하늘의 일들을 향할 수 있도록 일상적으로 훈련할 것인지에 대해, 셋째는, 영적인 일들을 생각하고 묵상할 때 우러나는 맛과 향취를 통해 마음이 어떤 만족을 얻게 되는지에 대해서이다.

이 세 주제 가운데서도 오웬은 두번째 부분을 먼저 다루고 있다. 첫째와 셋째 부분은 둘을 하나로 묶어서 설교의 후반부(제2부)에서 다루고 있다. 실제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성도의 마음 깊이에서 작용하는 애정/애착(affections)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내용이겠지만, 오웬이 일상적 훈련의 부분을 먼저 다루고 있는 것은 ‘성령의 프로네마’가 단순히 감정이나 경험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분별력과 의지력이 동반되지 않는 단순한 감정 차원의 영성은 ‘맹목적 애정’(blind affections)에 그치고 말 위험성을 가진다(VII.445).

훈련의 부분을 먼저 다루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성령의 프로네마’를 가졌느냐 하는 것을 판가름해볼 수 있는 것은 우선은 그 외양적 결과들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오웬은 특별한 경우보다 일상적 경우를 먼저 살피고 있다. 강압이나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의 생각이 아니라 일상적인 경우에 자의적으로 어떤 생각들을 하느냐 하는 것이(the predominancy of voluntary thoughts)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낸다. 오웬은 프로네마의 특성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늘 되돌아가는 생각의 과정이나 흐름(the course and stream of those thoughts which we ordinarily retreat unto) 속에서 살피고 있다(VII.277). 오웬은 이를 토양과 풀의 관계를 통해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토양의 성질이 어떠하냐 하는 것은 거기에서 자라나는 풀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사람이 매일같이 그 마음으로부터 쏟아내는 것들을 보면 그 마음의 성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의 프로네마’로부터는 진흙과 더러운 것이 늘 솟구쳐 나온다(사57:20). 반면 ‘성령의 프로네마’로부터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들이 늘 솟구쳐 나온다.

오웬은 이런 일상적 ‘흐름’을 특별한 경우의 일시적 ‘소낙비’(thunder-showers)와 구분한다. 일시적 소낙비로 사람의 마음이 잠시간 차고 넘치게 될 수도 있지만,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곧 강이 마르고 그 흐름이 소멸하게 된다. 오웬은 여기에 비해서 진정한 ‘성령의 프로네마’는 “압도적인 내적 은혜의 원리(preval‎ent internal principle of grace)”에서부터 솟아나오는 것이며, “한결같고 지속적인(even and constant)” 특성을 가진다고 밝힌다(VII.281). 외부적 영향에 의해 일시적으로, 간헐적으로 영적 특성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내적 원리, 성향, 경향이 온전히 새롭게 된 사람이 ‘성령의 프로네마’로 사는 사람이다. 사람이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로 가능하다. 은혜로 말미암아 그 본성이 변화와 새로움을 입어야만 한다(He is made so by grace, in the change and renovation of his nature. VII.279). 이것은 오웬의 분명한 출발점이다.

그러나 오웬이 동시에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 땅이 열매 맺는 좋은 땅이라 할지라도 때로 기경을 하고 거름이 줄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땅의 성질 자체가 본래 좋지 못한 땅에 거름을 주어서 때때로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땅의 성질은 좋은데 여러 가지 이유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경우에는 거름을 주는 것이 매우 효율적으로 작용하여(exciting its own virtue and power) 그 땅의 본래의 자질과 능력에 합당한 열매를 풍성히 맺히게 할 수 있다(VII.281). 오웬이 이런 비유를 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성령의 프로네마’를 위한 훈련의 부분이다. 훈련이 은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훈련이 있음으로 은혜를 은혜답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웬은 은혜의 출발점을 든든히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훈련과 의무(duty)와 방편들(means)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 두 요소를 뗄 수 없는 하나로 보고 있다. 그래서 그가 다루고 있는 것도 ‘성령의 프로네마’를 위한 “은혜와 의무”(grace and duty)이다. 기도 또한 같은 목적에서 “기도의 의무”(duty of prayer)로 표현되고 있다.

오웬은 이런 이유 때문에 말씀이나 기도나 예배 등의 방편들이 늘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음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 마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런 방편들은 일시적 효과를 가져 올 뿐이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도 잠시 즐거워할 뿐 근본적인 변화에는 이르지 못한다. 방편이 은혜를 선행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은혜가 있는 곳에 방편들은 매우 유익한 결과들을 빚어낸다. 이것들이 우리의 거룩한 영적 정서들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우리의 생각과 열망이 하나님과 영적인 일들을 지속적으로 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기도의 의무”를 두고 오웬은 이렇게 말한다. 이 ‘의무’의 가장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은혜의 원리”(the principle of grace)를 “자극하고, 불러일으키고, 도출시켜”(excite, stir up, and draw forth)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영적인 일들에 대해 합당한 애정/애착을 가지고 거룩한 생각들 속에서 바르게 시행되도록 하기 위함이다(VII.284). ‘은혜의 원리’에 근거할 때 ‘기도의 의무’는 ‘성령의 프로네마’가 온전히 작용하게 하는 윤활유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은혜의 뿌리가 없이 그 외적 의무만을 수행하는 것은 기껏해야 간헐적이고 일시적인 마음의 인상만을 남길 뿐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오웬에게 있어서 은혜와 의무의 연속선이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발견한다.

오웬이 주고 있는 좋은 요약적 표현을 인용해보자. “그러므로 마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의 작용이 없으면, 어떤 은사도 구원얻는 믿음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원의 은혜가 있는 곳에서는 그 영적인 은사들이 그 은혜가 향기를 발하게 하는 하나의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존 오웬의 영적 사고방식>, p. 80.
오웬은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죽어지지 아니한 자아중심적 추구로 말미암아 은사들이나 여러 은혜의 방편들이 그 자체로서 가장 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름더미 위에 쪼이는 햇빛의 경우처럼 온갖 악취와 악한 결과들을 빚어낼 수도 있음을 잘 지적하고 있다. 반면 ‘은혜’의 기초 위에서 은사들을 바르게 사용하는 자들은 이를 통해 ‘은혜’의 향기를 더욱 아름답게 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은혜와 의무의 분가분리성에 기초하여 ‘성령의 프로네마’를 위한 훈련의 부분을 다각도로 다룬 후에 오웬은 보다 본질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다. 성도의 ‘영적 애정/애착’(spiritual affections)에 대해 그는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심층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오웬의 정의에 따르면 ‘성령의 프로네마’의 원천과 본질을 이루는 것은 이 ‘영적 애정/애착’이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영적인 일들에 집착하게(adhere unto) 만드는데, 이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영적인 일들이 가지는 맛과 향취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안식과 만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VII.395).

우리의 애정/애착을 요구하는 분은 하나님만이 아니다. 사탄 역시 우리의 애정/애착을 끌기 위해 세상의 모든 반짝이들을 이용한다. 세상이 주는 약속들, 세상이 꾸미는 모든 치장들, 이런 것들이 우리의 관심을 영적인 일들이 아니라 세상의 일들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오웬은 이 애정/애착을 배의 키에 비유하고 있다. 하나님께 그 키가 사로잡히면 우리의 영혼이 우리 앞에 닥쳐오는 모든 시험과 유혹의 물결 앞에서도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모든 일들에 그 방향을 맞추어 세상 속에서 표류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세상과 부합하게 되면 우리의 영혼이 그 모든 힘을 다해 세상의 관심과 이익을 향해 달려가게 만든다. 오웬은 세상의 일들이 사람을 끄는 자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현실적으로 잘 지적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사람의 속에 있는 “애정/애착의 힘”(the power of our affections)이 얼마나 “압도적인 정도로”(in a prevailing degree) 작용하는지를 강조하고 있다(VII.397).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성도들의 마음이 영적인 일들에 향하게 하시기 위해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는 경멸을 쏟아 부으신다. 이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에서 나타났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다루시는 방식 가운데서 나타났으며(특히 고전4:9-11), 또한 하나님께서 세상의 좋은 것들을 가장 악한 자들이나 네로와 같이 하나님의 원수 되기로 작정한 자들에게 주어서 누리게 하시는 방식으로, 나아가서 그들이 여기에서 만족을 얻을 줄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불안정과 불만족만을 얻게 하시는 방식으로 이런 것들에 대한 그의 경멸을 나타내고 계신다.

물론 오웬은 염세주의적이고 비관적인 세계관 속에서 이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세상의 것들에 사람들의 ‘애정/애착’이 온통 향하여 그것들에 그 마음이 달라붙게 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오웬은 성도들에게 세상의 것들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과 오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분간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들에 대한 절대적 소유자 의식을 버리고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신실함과 지혜로움으로 이것들을 잘 관리하는 한편, 맡겨주신 분 자신을 넘어 이것들 자체에 그 애정/애착이 향할 때는 끊임없이 이를 ‘죽이기’(mortification)를 힘써야 한다.

앞서 우리의 생각에 있어서 영적인 일들에 대한 간헐적인 생각과 지속적인 생각을 구분하였던 것처럼, 오웬은 우리의 ‘애정/애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구분을 하고 있다. 우리의 애정이 근본적인 변화 없이도 일시적으로 영적인 일들에 쏟아 부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것은 곧 시들어버리고 말며 어떤 계기가 생기면 또 다시 되살아난다. 오웬은 이런 형태의 ‘습관적 변화’(habitual change)와 ‘은혜에 의한 전적 쇄신’(gracious renovation 또는 renovation by grace)을 구분한다(VII.413, 417). ‘습관적 변화’와 관계된 애정은 항상 단발적으로, 상황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성령의 프로네마’ 배후에는 이처럼 감정에 따라 요동치는 애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뜻과 삶의 동기와 목표, 그리고 양심 전체를 일관되게 움직이고 또 그 속에 작용함으로 영혼이 전적으로 또 순전하게 하나님을 기뻐하고 사랑하게 만드는 지속적이고 한결같은 애정/애착이 놓여 있다. 오웬은 그리스도인의 애정/애착이 가지고 있는 이 총괄적 특성을 ‘성령의 프로네마’를 위한 중요한 기준과 지침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가리켜 ‘총체성’(universality)이라 부른다. “일시적이요 상황적 인상들”(temporary and occasional impressions, VII.416)은 이런 총체성을 결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새롭게 된 애정/애착 속에는 이런 총체성이 드러난다. 그런 면에서 이는 단순한 감정과 확연히 구분된다.

‘성령의 프로네마’로 사는 사람 속에 이런 총체성이 나타나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성화 자체가 부분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부분만 성화되고 다른 부분은 성화되지 못하는 이런 절름발이 현상이 나타날 수 없다. 만일 그런 경우가 있다면 이는 일시적이고 상황적 인상에 의한 결과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애정/애착이 향하는 대상인 하나님이 부분적인 분이 아니며, 또한 그분과의 관계를 위한 예배나 기타의 영적 의무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그 자체만을 위해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적인 의무들 자체만을 즐기고 그 안에서 진정으로 우리의 사랑과 기쁨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것들을 통해 그분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와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이는 모두 외식적인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런 외적 의무들이 그 세우신 목적을 위해 바르게 사용될 때는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애정/애착이 온전히 집중하게 되고, 마침내는 영적인 일들에 우리 자신이 동화(assimilation) 되는 결과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본(pattern)이 이루어지게 된다(VII.467, 468). 이 목표에 이르도록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 애정/애착’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일들 속에서 “맛과 즐거운 기호와 향취”(a gust, a pleasant taste, a relish)를 취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VII.471).

‘성령의 생각’과 말씀 사역

‘성령의 프로네마’에 대한 오웬의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성결과 관련하여 신적 ‘은혜’의 요소와 인간적 ‘의무’의 요소가 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웬에 따르면 우리가 ‘성령의 프로네마’로 사는 것은 은혜이면서 동시에 의무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그의 전반적 가르침이 이 두 축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은혜 없이 의무만을 행할 때 나타나는 ‘소나기’ 효과나 외식적 결과를 오웬이 충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동시에 은혜만 강조하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할 때 나타나는 해악을 그는 힘 있게 지적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등한히 하거나 간과한다면, 성화의 일이 ‘은혜’의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게 될 것이다”(III.405). 또 다른 곳에서 오웬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모든 의무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범(example)을 따르는 것은  종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사용함에 있어서 이제 제시한 예의 두 번째 부분이다”(I.175). 이렇게 양자가 분리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그의 자녀로, 또 그와의 언약의 당사자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함을 그 삶을 통해 나타내는 것은 큰 특권이요 능력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강단이 이런 균형을 잃어버리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넘치는 강조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의 결과들이 수반되지 아니하는 기현상을 낳고 있다. 이는 오늘날 수적으로 20% 이상의 기독교 인구를 가지고서도 이 사회 가운데서 바른 삶의 길을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빈번히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한국교회 현실의 뿌리에 놓여 있는 근원적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교회는 너무 손쉬운 ‘은혜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은혜’가 ‘의무’로 연결되지 않는(아니, 그렇게 연결되면 마치 이상한 사상인 양 인식하는) 매우 왜곡된 가르침이 이런 결과를 빚어내고 있다. 바울의 가르침과 오웬의 설교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은혜는 의무를 부른다. 은혜의 목표는 모든 종류의 짐을 다 벗어 던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달게 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이, 은혜로 말미암아 기쁘게 질 수 있는 멍에이다.

나아가서 오웬의 설교는 우리에게 보편적 영성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보여준다. 단순히 성경지식이 많다거나 한 특정 기능에 뛰어나다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감정과 의지와 하나님을 기뻐함과 은사 사용과 공동체성 전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관점에 의해 지배되는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전체성을 이루어가는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설교의 비전이 넓어져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설교자의 시야가 너무 좁다는 것이 오늘 우리가 극복해야 할 현실적 과제이다.

심지어 그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퇴보의 조짐이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적인 호소나 감정적 호소에 부분적으로 치우치는 경우나, 또는 은사들의 무분별한 사용을 통한 일시적 효과에 의존하는 경우들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많은 경우에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가 설명과 진술에 치우치고 적용과 지시적 권면, 합당한 반응 및 삶을 빚는 일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 설교로 전락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방식으로 감성적 영성에 호소하는 경우들이 흔하다. 말씀의 원리를 따라 설교하지 아니하고 감정적 반응을 성공의 척도로 삼으려 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또 이를 위한 인위적 조작의 유혹이 도처에 널려 있다. 나아가서 은사들의 무분별한 사용 또한 문제이다. 오웬의 말처럼 종이 되어야 할 것을 주인자리에 올려놓으려 하다가 생기는 비정상적 결과들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오웬의 말을 다시 한번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영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으로 영적인 일에 대하여 그저 관념이나 지식을 가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마땅한 도리들을 부단하게 풍성하게 행하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마음에 은혜가 조금도 없는데 그러한 영적인 것들에 대한 관념들과 지식을 가질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마땅한 의무들을 부단하게 행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생각이 돌아간다는 것은 하늘에 속한 것들, 위에 있는 것들, 특히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를 즐거움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서와 거룩한 생각으로 즐겁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께 우리 마음을 드린 것이 전혀 아닙니다. 바로 우리 마음의 정서와 생각들이 하나님을 기쁨으로 향하면,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존 오웬의 영적 사고방식>, p. 202, 그리고 p. 267.
생각과 정서와 의지와, 또한 삶의 갈망과 추구와 동기와 목표 등이 서로 분리되지 아니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분리되지 아니하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그의 교회와 그의 창조세계를 일관된 변화된 자세로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모든 종류의 단편적이고 비총체적인 왜곡 현상들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의 설교는 바울을 따라, 또 오웬을 따라 ‘성령의 프로네마’로 잘 균형 잡혀서 은혜와 의무가 동시에 시행되게 하고, 성도의 총체적 삶 속에 은혜의 결과들이 값지게 이루어지도록 인도해야 하며, 은혜의 방편들이 피상적이고 외향적이며 일시적 자기만족 상태에서 끝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잘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오웬이 그의 청중을 향하여 던지고 있는 적용 질문들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시켜보자. “이러므로 여러분의 마음과 정서가 여러분을 이끌어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가요? 마치 생수의 샘에서 물이 나는 것 같이 그러한 생각들이 솟아납니까? 기회만 있으면 그러한 생각들을 즐기려 하고 그러한 것들과 교제하고 싶어집니까? 있는 힘을 다해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나 여러 가지의 의무들을 시행할 때에 여러분에게 유익한 것을 가지기 위하여 필요한 노력을 기울이고 싶습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십니까? 복음에 속한 일들과 여러분의 영혼의 일상적인 행위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존 오웬의 영적 사고방식>, p. 281.

우리는 여기에 이런 질문을 덧보탤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을 포함하여 여러분에게 맡겨진 영혼들 속에 이런 삶을 온전히 세우고자 하는 강하고 거역할 수 없는 열망 가운데서 말씀의 사역을 행하고 있습니까?”

맺는 말

‘성령의 프로네마’라는 표현을 통해 사도 바울이 가리치고 또 오웬이 설교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은 다름 아니라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산 연합으로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이 그 새 창조적 존재에 온전히 이르는 전인개조의 과정을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는 영성을 세상의 다른 일상사들과 분리하여 종교적 영역에 속한 일에만 국한되는 개념으로 보는 일반적 영성 개념과는 분명한 차이를 가진다. ‘성령의 프로네마’로 사는 사람은 영성의 일부 표적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그 마음 틀이 전적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이제 이를 이루어감에 있어서 ‘성령의 프로네마’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진리의 기준과 틀을 철저히 말씀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단순히 성경 지식이 탁월한 그리스도인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그 생각과 비전과 목표와 동기가 말씀에 따라 철저히 재구성되고 지속적으로 말씀의 영인 성령에 의해 인도받는 사람 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 개개인의 성품, 이 시대의 보물단지처럼 떠받들림을 받는 개성(個性)이 바뀌어서 성령의 성품으로 바뀌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사람은 그 애정과 애착이 바뀌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찬송가들이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이전엔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라는 산 고백이 그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이작 와츠(Isaac Watts)의 위대한 찬송시(147장)처럼 “나의 모든 자랑에 경멸을 퍼붓네. 이제 내게 그리스도의 죽음 밖에는 다른 어떤 자랑도 있게 마소서” 마음 깊이 외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 ‘성령의 프로네마’로 사는 사람에게는 공동체 세움과 하나님 나라가 우선되는 차원에서 개인주의적 삶이 철저히 극복되어야 한다.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아니하고 내게 맡기신 모든 영육간 은사들을 공동체 세움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부요를 드러내는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사고, 그 애착, 그 추구, 그 선택, 그 우선순위, 그 공동체성 등의 면에서 ‘성령의 프로네마’에 따른 총체적 전인개조가 이루어지지 않는 차원에서의 영성 추구는 가장 놀라운 성령의 새 창조 사역을 한갓 인간론적 자기개발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실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종말론적 창조미와 영광이 빛나지 않는 희한한 영성운동이 판치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서 말씀을 따라 새로운 물줄기를 잡아가야 할 책임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바울과 또 오웬의 ‘성령의 프로네마’ 사상을 통해 배우는 참 영성은 성령에 붙들린 산 영혼의 총체적 활동이요 개조이며, 죽음의 세상에 대해서는 창조의 능력으로 역사하는 힘임을 알게 된다.

- 최승락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