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오웬

존 오웬, 비국교도운동을 이끈 칼빈주의자 / 오덕교

새벽지기1 2016. 6. 23. 14:00



1660년 찰스 2세에 의한 왕정 복고와 함께 청교도 사회는 붕괴의 걸음을 걷게 되었다. 청교도 목회자들은 설교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였고, 거주의 한계를 5마일 이내로 제한받았으며, 국교도 운동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체포되거나 감옥에 던져졌다. 이와 같은 시기에 비국교도 운동을 전개하면서 교회를 지키려고 수고하던 청교도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크롬웰 당시 회중 교회 운동을 널리 전개하던 칼빈주의 신학자 존 오웬(1616-1683)이었다.

 

오웬은 1616년 영국의 옥스퍼드 남쪽에 위치한 스타댐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웨일스 출신의 청교도 목사였다. 오웬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통해 세상적인 명예나 부귀보다는 경건을 중시하는 훈련을 받으며 자라났고, 12살이 되던 1628년에는 옥스퍼드 대학의 퀸즈 칼리지에 진학하였다. 그는 책읽기를 좋아하여, 16세기 영국의 종교개혁자들, 마틴 부쳐와 존 칼빈 등 대륙의 종교 개혁자들을 연구했고, 이를 통해 학문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오웬은 공부 벌레였다. 겨우 4시간 정도로 수면 외에는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이러한 버릇은 그의 평생 동안 계속 되어 노년에는 건강을 잃고 고통을 당하였다. 1632년 대학을 졸업한 뒤에 한때 삶에 대한 회의 가운데 빠지기도 하였다. 그는 죄 문제로 고민하다가 3개월 이상 언어 장애를 겪을 정도로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그때부터 목회자가 될 결심을 하고 헬라어와 라틴어 연구를 시작하였다.

 

오웬은 1637년 21세의 나이에 영국 성공회의 사제로 안수를 받았고, 이때부터 교회 정치의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교회 위에 군림하는 윌리엄 로우드 대주교의 폭정을 오웬은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부정하는 죄로 여겼고, 로우드의 폭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대학을 떠나 러블레이스 경의 전속 사제로 부임하였다. 오웬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제가 되었지만, 아직도 그 자신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이렇게 생활하던 그는 1642년 런던으로 건너가 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토마스 굿윈의 설교를 듣고 큰 은혜와 영적인 도움을 받았고, 더 많은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 리처드 십스와 존 코튼의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가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 것은 성 마리아 교회에서 한 무명의 청교도 설교자가 마8:26을 본문으로 설교한 말씀을 통해서였다. “즉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자신은 세상이 조성되기 전 그리스도안에서 선택되었으며, 그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그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오웬은 회심 체험과 함께 성경에 기초하여 신학을 세우고자 하였다. 굿윈과 코튼의 영향을 받아 바른 신학은 교회의 전통이 아닌 성경의 권위에 기초해야 된다고 본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참된 교회를 통해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교회는 하나님이 성경 안에서 말씀하신 것만을 선포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인 성경은 교회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다. 교회는 다만 성경의 권위를 선포할 따름이지 권위를 창출하지 못하며, 도리어 성경의 권위에 자신을 종속시켜야 한다”. 이와 같이 오웬은 회심 체험을 통해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척도로 간주하게 되었으며, 이를 기초로 그의 신학을 세워 가게 되었다.

 

세상과 신학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된 오웬은 영국 성공회의 의식주의적 예배의 공허함과 교회 지도자들의 위선, 신학적 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인한 교회의 혼란, 왕권신수설에 기초한 찰스 1세의 폭정을 목도하였다. 오웬은 알미니우스 사상의 확산으로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이 도전받는 것을 보자, 1643년 그의 첫 번째 저작인 <알미니우스주의의 실상>이라는 책을 펴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알미니우스 사상이 기독교의 구원 교리를 파괴한다고 비판하고,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전적인 예정을 강조하는 칼빈주의 신학 사상을 옹호했다.

 

그는 찰스 대신 공화정을 주장하는 의회를 지지하여 청교도 혁명에 앞장섰다. 계급 구조적인 성공회 정치를 대신할 수 있는 성경적인 교회 정부 형태를 찾고 있던 오웬은 1646년 존 코튼의 책을 읽고 회중 정치 사상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교회의 자율과 평등을 중시하는 회중 정치를 교권주의를 잠재울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보고, 영국 성공회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정화하고 자율과 평등을 기초로 하여 모든 교구마다 회중 중심의 교회로 개혁할 것을 역설하였다.그의 명성이 높아졌다. 장기 의회 앞에서 설교하였고, 1649년 올리버 크롬웰이 종군 목사로 동역할 것을 요구하자. 목회를 통해 회중 정치 운동을 벌이는 것과 정부의 힘을 빌어 운동을 확산하는 것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의회군에 참여하였다. 그는 종군 목사로 크롬웰과 함께 아일랜드 원정에 동반하였고, 스코틀랜드까지 가서 청교도 혁명에 앞장섰다. 1649년 1월 의회군이 찰스 1세를 처형하고 난 후 사회는 점차 안정되고 정국은 크롬웰을 비롯한 청교도들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1650년대는 오웬의 전성기였다. 1652년 옥스퍼드 대학의 부총장으로 임명받은 오웬은 대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영국 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경건한 목사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옥스퍼드를 청교도의 요람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목회자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지도할 방법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염두에 두고 늘 기도해야 한다.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혀 힘썼다”고 주장하면서 기도에 열심을 낼 것을 호소하였고, 강단에서 설교한 것을 삶에 실천함으로써 성도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노아의 하인들은 방주를 만들었지만 정작 그들은 다 물에 빠져 죽었다. 하나님은 악마에게 사로잡힌 영혼의 입술을 받으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친히 본을 보이고 가르치셨다.’ 만약 사람이 진실하게 가르치고, 부정직하게 행동한다면, 교리를 정립한 업적보다는 부정한 행실로 인해 더 깊은 나락에 빠질 것이다”라고 설교하였다. 목회자들이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 감으로써 성도들의 존경을 받도록 권면하였던 것이다.

 

오웬은 성직자 임면 과정을 살피는 감독관의 한 사람으로 임명받아 목회자의 윤리 강화를 위해 일했고, 1654년 영국 의회 의원으로 피선되어 정부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적용될 수 있도록 일조하였다. 그후 독립파, 장로파, 침례교도 등 38명으로 구성된 성직록 수혜자의 자역을 심사하는 권한을 가진 ‘트라이어즈’의 일원으로 임명되어, 교회가 부양해야 할 목사의 자격을 규정하고 교회를 위해 일할 인재를 개발하고 후원하는 일을 맡았다.

 

오웬은 크롬웰이 호민관 지위를 넘어 섭정에 취임하려 하자 극구 반대하여 섭정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는 등 정치 문제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오웬은 또한 사보이 선언의 선문을 쓰고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리처드 크롬웰의 실정과 독립파에 대한 장로교도의 공격이 심화되면서 영국의 정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럽게 되었고 오웬의 입지도 약화되었다. 1660년 장로교도들이 네덜란드에 있던 찰스 2세를 초청하여 왕정복고를 이루려 하자 독립파들은 더욱 힘을 잃게 되었다. 더구나 찰스 2세가 장로교를 국교로 삼겠다던 당초의 약속과 달리 성공회 정책을 펴는 바람에 오웬을 비롯한 청교도들은 극심한 박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해 오웬은 런던 교회의 담임 목사직에서 해임당하였고, 다행이도 오웬은 감옥행을 면했는데, 이는 그가 뛰어난 학자로 존경을 받았고 상류 사회의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662년청교도 목사들을 교회로부터 추방하는 <대퇴거령>이 내려지고, <통일령>이 선포 되었다. 오웬은 2,000여 명의 목사와 함께 비국교도 운동을 전개하였다. 오웬은 그의 집에 교회를 개척하고 청교도 운동을 계속한 일로 인하여 피소되었고, 1664년과 1665년에 걸쳐 체포령이 내려지자 런던으로 피신하여 여전히 설교 운동을 전개하였다. 찰스 2세는 <5마일령>을 내려 청교도에 대한 압박을 더욱 강화하였다. 오웬은 영국 정부의 청교도 박해 정책에 대하여 강력하게 저항하였고, 리처드 백스터를 비롯한 장로교도들과의 모임을 여러 차례 주도해 그들과 연대하여 청교도 운동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는 예배 의식만을 주장하는 의식주의자들에 대하여 경고하고, 기도에 따라 예배하는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요4:23)는 말씀에 배치된다고 비난하였으며, 의식에 얽매이는 예배의 문제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널빤지나 공기 주머니를 가지지 않고 물 속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은 평생 수영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도의 고정된 형식에만 계속 의존하는 것은 은사나 은총 안에서 성장하는 길을 방해하고, 때로는 성령의 역사를 소멸시키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683년 찰스 2세는 비국교도에 대한 박해를 다시 시작하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오웬의 책들을 불살랐다. 그해 8월24일 오웬은 런던의 세인트 폴 성당에서 서쪽으로 14KM 지점에 있는 일렁에서 “나는 이제 내 영혼을 사랑하는 그분, 아니 내 모든 위로의 온전한 근원이시며 영원한 사랑으로 나를 이끌어 주신 그분께 간다. 여행길이 매우 지루하고 피곤하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오웬은 청교도 지식인을 대표하는 설교자였고, 17세기 청교도 신학의 거장이었다. 왕정 복고 이후 그는 23년 이상 비국교도 운동을 전개하면서 다수의 책을 출판해 영국 청교도를 대변하는 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오웬은 26세에 첫 번째 책을 저술한 이래 평생 동안 80여 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그의 학문은 방대하고 다양하며 심오하였지만 사상은 결코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아서, 누구나 그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전집은 청교도 신학을 연구하고자 하는 신학도들에게 보고가 되고 있으며, 저작에서는 고전적인 교리인 삼위일체 교리의 옹호와 비국교도와 회중 정치 사상의 옹호, 알미니우스의 사상과 로마 카톨릭 교회를 비판하는 글 등 다양한 주제들로 이루어져 있다.

 

오웬은 신학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대한 겸손한 의존에서 생기는 삶의 방식으로 이해하였다. 자기 성찰을 통하여 죄성을 고발함으로써 성화된 삶을 추구하였고, 죄를 멀리 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는 성화를 “자기 이성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실천할 수 있는 도덕적인 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가 성화에 이르는 유일한 뿌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기초하지 않은 성화는 위선이라고 지적하고, “정화되고 성화되고 거룩한 삶을 살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훗날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치명적인 것은 없다. 이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고 하나님에게 상급을 받을 리도 만무하다. 참으로 거룩함이란 천국에서 완성되는 것이지만, 그 시작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는 말로, 성화 과정이 없는 구원이 존재할 수 없음을 설명하였다.

 

1656년에 발표한 <죄의 억제>라는 논문에서 오웬은 인간 속에 감추어져 있는 죄의 위험성과 사람의 영혼을 속이는 죄의 기만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죄의 기만성에는 3가지 개념이 있다. 첫째는 사람들은 자신이 탐닉하고 있는 죄가 오직 하나뿐이며 다른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깨끗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기꺼이 탐닉하고 있는 한 가지 죄는 그 사람의 영혼을 온전히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 비록 자기들의 죄를 근절하지 않더라도 계속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하나님은 전혀 사랑받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셋째, 사람들이 자기들의 정욕이나 쾌락을 만족시킨 뒤 죄가 자신을 파멸시키지 않을 정도까지만 죄를 포기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 죄를 끊지 않는 사람은 계속하여 죄를 범하겠다는 것으로, 절대로 죄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1658년에 쓴 <유혹에 관하여>에서 오웬은 그 자신과 동료 청교도 속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도덕적 부패, 오만함, 외식주의에 대하여 경계하였고, “유혹은 칼과 같아서 고기를 자를 수도 있지만 사람의 목을 찌를 수도 있다. 즉, 유혹은 유익이 될 수도 있지만 치명적인 해악을 초래할 수도 잇다”고 죄를 유발하는 유혹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그것을 피하는 방법으로 “마귀가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면서 주님을 유혹했을 때, 주님은 그 영광을 바라보고 만국을 고려하면서 머뭇거리고 서 있지 않았다. 오히려 주님은 지체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다. 당신은 시험에 부딪쳤을 때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신앙으로 그 시험에 대처하라. 그러면 시험은 사라질 것이다. 시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결코 협상을 시도하지 말고 논쟁하려고도 하지 말라”고 하였다.

 

1688년에 유고로 출판된 <신자 속에 내재하는 죄>라는 글에서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범하는 죄 가운데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은 불신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죄가 습관이 되면 죄책감이 마비된다. 세상은 죄의 부끄러움을 앗아 간다”고 죄악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죄를 이기기 위해 매일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고 자신의 육적인 자아를 부단히 죽이는 생활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648년에 쓴 <유일한 구세주 거룩한 예수>에서 오웬은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만인 구원설을 비판하면서 “그리스도는 ‘만일 믿는다면’이란 조건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 믿도록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내용의 제한 속죄를 주장하였다. 1654년에 출판한 <성도의 견인 교리를 설명하고 비준함>에서는 신자의 행동 여부에 따라 구원이 결정된다는 알미니우스의 주장에 대하여, 구원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며,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시기 때문에 그의 손에서 누구도 택한 자를 빼앗아 갈 수 없으므로 선택자의 구원은 확실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적인 음성을 중시하는 퀘이커 교회의 위험성을 인식하여 1665년 <신적인 본래 권위에 관하여, 성경의 자증의 빛과 권세>를 써서 성경의 영감을 주장하고, 태양이 하늘에 떠 있을 때 낮이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성경 자체가 지니고 있는 그 고유한 빛으로부터 스스로 권위를 드러내는” 능력 때문이라고 하였다. 1677년에서 78년 사이에는 <성령론>을 출판하여 성령의 인격성과 사역을 논하고, 성령은 기록된 말씀과 함께 일하신다고 주장하였다.

 

오웬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속죄 사역을 부인하는 소시니주의자들이 일어나자, 교회를 그릇된 이단 사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사망 안에서 죽음의 죽음>을 써서 속죄 교리에 대한 고전적이고 개혁주의적 입장을 밝히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신 사람으로서 고난을 받았다”고 하였다. 1657년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교제>를 발표해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했고, 1681년에는 <기독론>, <신령과 마음의 은혜와 의무>,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묵상과 강화> 등 3편의 논문으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속죄 사역의 성격에 대하여 논함으로서 정통적인 신앙을 옹호하였다. 오웬의 정통적 청교도 신학은 18세기 영국과 미국의 복음적인 신학자들을 통해 소개되고 확산됨으로써 개혁주의 신학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 오덕교,「청교도이야기」, pp 143-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