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들은 더 이상 자연과 초자연이라는 2층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이 갖고 있는 죄의 성품을 하나님의 은혜에 연결시키는 다른 방법을 찾고자 한다. 그것은 중세 사상이 주장한 단순한 관계를 대치하는 것이다. 이 과제를 처음으로 풀어보려 한 사람이 바로 루터다. 그는 성경의 전통인 이중적 하나님 형상을 그의 글에서 나타내고 있다.
창세기 1장 26절의 말씀을 주석하면서 루터는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것이 이중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공적이고 사적이다. 사도 바울은 사적인 것을 말하지만, 본문은 공적인 것을 말한다. “우리의 모양”은 사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 모양은 오늘날까지 죄 아래에 있다. 타락이 아담으로부터 그 모양을 빼앗지 않았다. 하지만 바울은 더 높은 것을 말한다, 곧 죄가 제거하지 않은 모양 곧 선함과 의로움이다.
루터가 사람이 갖고 있는 보편적 형상을 말하고 있는 또 다른 구절은 요한복음 1장 4절에 대한 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말씀을 통해 그 존재가 보존되는 방식을 말하고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안에 있는 생명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는 모든 피조물에 생명을 주되, 더욱 두드러지게 사람들에게 주어 그들이 영원토록 살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빛 곧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빛을 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에게 너무나 가깝게 다가와서 그들의 빛이 되었다. 그 빛은 모든 비이성적인 동물과 짐승들이 볼 수 있는 빛과 전혀 다른 것이다. 소나 돼지도 사람과 같이 낮에는 햇빛을, 밤에는 달빛을 갖는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이성과 이해라는 특별히 부여받은 재능이 있다. 사람들이 지혜와 기술 혹은 솜씨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고안하고 만드는 것은 이 빛 곧 사람의 빛이었던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빛 곧 그리스도는 단지 자신만을 위한 빛이 아니라, 이 빛으로 사람들을 비춘다. 따라서 거짓되거나 사탄에 속한 것이 아닌 모든 이해, 솜씨 및 기술은 이 빛 곧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이 빛을 넘어 또 다른 특별한 빛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자신의 백성에게 주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 그리고 입술의 말씀을 통해 스스로를 밝히시고 그의 사람들에게 빛이 되고자 한다. 이처럼 루터는 타락한 사람이 갖는 보편적 인간성을 로고와 연결시킨다. 사람과 짐승을 대조하고, 말씀의 영혼에 임하는 내적 빛과 볼 수 있는 빛을 대조시킨다.
‘그 빛이 어두움에 비친다’라는 말씀을 주석하면서 루터는 이성의 빛이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강한 어조로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생명이 없고, 죽었고 저주를 받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두운 가운데서 행할 뿐만 아니라 어두움 자체이기 때문에 어떻게 생명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처럼 루터에게서 우리는 두 형상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그는 타락한 인류가 갖는 보편적 인간성을 로고스와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면 왜 요한복음을 주석하는 긴 구절에서 루터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성을 보편적 형상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것은 그의 가르침의 흐름이 다른 방향에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를 다루는 모든 항목에서 루터는 하나님 형상을 사람이 가진 본래의 의와 동일시한다.
창세기 1장 26절을 설교하면서 루터는 지적하기를, 어거스틴은 하나님 형상을 자연적인 기억, 이해 및 의지의 능력으로 해석했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하나님의 모양을 자연을 완전하게 하는 은혜의 선물로 해석했다, 곧 기억은 희망에 의해, 이해는 믿음에 의해, 의지는 사랑에 돋보인다.<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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