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 받은 존재는 그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사람은 그 본질 안에서 모든 것을 동시에 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진 진리 안에서 모든 진리를 소유할 것이고, 자신의 자선에서 모든 선한 행위를 할 것이다.
이처럼 아퀴나스의 하나님 형상 개념에는 이성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갖는 특성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복음의 중심을 이루는 사상인데도 말이다. 사람이 가진 하나님 형상에 관한 아퀴나스의 가르침은 놀라운 통찰을 줌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합리성 일변도의 하나님 형상 이해는 그리스도의 세계보다 사람의 이성에 초점을 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로 더 멀리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초기 교회 때부터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 하나님 형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및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들은 모두 구약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형상과 신약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형상이 서로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구약성경은 하나님 형상을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이 지은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리와 똑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의 근거다. 이런 뜻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닮았다.
하지만 사람이 비인간성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 성품을 손상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이것에 비해,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목적을 강조한다.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그 선물은 오직 인류를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해주는 그리스도의 속죄 행위를 믿고, 믿음의 공동체에서 그와 사귐을 갖는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것이다.
보편적 하나님 형상은 없어진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너무나 낙관적인 관점으로 봄으로써 그리스도의 역사적 계시에 대한 믿음과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떠나서 구원에 이르는 두 번째 문이 열려 있다고 여기는 잘못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 하나님 형상은 이성적 능력보다 훨씬 더 넓은 것이다. 그것은 신적 불의 점화가 아니다. 그것이 믿음에 의해 새로워지는 것은 신성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초자연적 은혜의 상실에도 영향 받지 않는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음으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하나님 형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핀다. 먼저 그가 직면한 문제가 무엇인가? 구약이 말하는 하나님 형상과 신약이 말하는 하나님 형상은 정확하게 같은 것을 뜻하지 않는다. 여기에 그 둘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가 있다. 그 둘 사이의 이면에는 확실히 어떤 통일성이 있다, 그 둘이 똑 같은 말을 쓰고 있다는 것이 단순히 우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둘 사이에는 틀림없이 불연속성이 없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죄 때문에 황폐된 결과를 고려하지 않게 되고,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표어로 삼는 루터에게 토마스 아퀴나스의 하나님 형상론에 만족할 수 없다. 아퀴나스는 보편적 하나님 형상과 은혜에 따른 하나님 형상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사람이 가진 죄의 충동과 초자연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은혜로운 자선 행위를 똑 같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퀴나스는 은혜가 자연을 완전하게 한다고 보았다. 두말 할 것 없이, 은혜는 자연을 지은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한다. 하지만 자연은 죄 때문에 그 목적에서 벗어났고, 더 이상 본래의 모습에 머물러 있지 않다.<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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