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50)

새벽지기1 2016. 6. 2. 11:13


루터는 이러한 사변을 즉각 비판하지 않지만 그것의 유용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이 너무나 쉽게 오해될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는 원리를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의지를 갖고 있지만 그것은 부패하고 심각하게 약해진 것이다. 만약 이 재능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사탄도 하나님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재능이 우리가 갖고 있는 재능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루터는 어거스틴의 하나님 형상 개념을 언급하면서 신약의 두 구절과 연결한다. 하나는 고린도전서 15장 48절과 49절인데, 그것의 중심 내용은 사람이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나 앞으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에베소서 4장 21절부터 24절까지인데,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새 사람이란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것이다.


루터가 보기에, 사람은 누구나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아담은 죄인이었다, 비록 그는 그렇게 지으심을 받지 않았지만. 그리스도는 빛과 사랑이 넘치는 하늘의 형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형상을 가져야 하고 그의 고난도 받아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거나 마귀의 형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가 본받아야 할 둘 가운데 어느 하나와 같기 때문이다. 사람은 본래 의를 가졌으나 선한 상태로 머물러 있지 않고 그 형상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사람은 마귀와 같게 되었다.


이제 루터가 어거스틴 뿐만 아니라 아퀴나스의 하나님 형상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동기가 분명해졌다. 루터는 시편 51편을 설교하면서 이 점을 더욱 강력하게 밝혔다. 그는 말한다, ‘의지는 자연적인 적이다. 그러나 그들 곧 스콜라주의자들은 단지 의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선을 행하려는 의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부른다. 잘못은 이것에 있다. 의지는 마귀의 손에 잡혀 있다. 그것은 이단자의 손에 있다. 나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의지는 선하지 않다. 그리고 지성은 옳지 않다. 더구나 그것은 빛을 받고 있지 않다.’ 이것은 아퀴나스의 하나님 형상론을 공격한 것이다. 아퀴나스는 모든 사람이 기억하고 이해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능력을 갖고 있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루터의 하나님의 형상 이해는 이제까지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큰 변화를 보였다. 이것의 주된 동기는 다른 이해는 믿음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리가 위험에 빠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루터의 판단에 따르면, 하나님 형상이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반응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본다면, 하나님 형상은 타락한 사람에게는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루터가 이것과 다른 견해를 가진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 1장 26절 뒷부분의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라는 말씀을 주석하면서, 루터는 오늘날 우리가 동물을 다스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 형상의 잔재라고 말한다. 타락한 인류는 아담과 이브가 가진 지식을 갖고 있되 그것이 무뎌지거나 실은 죽은 잔재일 뿐이다.

 

다른 동물은 그것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창조주와 자신들의 기원과 목적 및 왜 자신들이 지음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것들은 하나님 형상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시편 32장 9절은 노래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이와 같이, 사람이 비록 하나님 형상을 거의 전적으로 잃어버렸을지라도, 사람과 다른 동물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