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기 전에는 이 차이가 훨씬 컸고 더욱 두드러졌다.
루터가 하나님 형상을 사람이 본래부터 가진 의로 보는 것이 옳다면 창세기 9장 6절의 말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여기서 타락한 사람은 존엄성을 가지고 있어서 함부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다루면서 루터는 논증하기를, 사람은 가장 존엄한 피조물이다. 그는 다른 동물과 같은 방식으로 지음 받지 않고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죄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렸을지라도 그 잃어버림이 말씀과 성령으로 회복될 수 없는 그러한 종류가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 형상에 대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존중히 여기고 폭력의 방식으로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루터가 보기에 하나님 형상은 사람에게서 제거되었으나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에서 그것이 잔존해 있다. 이 하나님의 의도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할지라도 그들이 갖고 있는 인간성을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한갓 가능성에 그칠 뿐이다. 그것은 성경 본문을 편견 없이 읽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루터가 성경 본문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의 목적이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하나님 형상의 잔재 개념을 사용한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이, 루터는 사람이 가진 하나님 형상에 대한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사변적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아퀴나스가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것이 공로적인 것이 아니고 구원을 얻는 조건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복음의 원리를 위험에 빠뜨리는 또한 루터가 하나님 모양을 하나님 형상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운 성품이라고 보지 않는 것도 놀라운 통찰이다.
어떤 이는 하나님 모양은 아담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 잃어버렸으나 하나님 형상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하나님 모양을 하나님 형상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해석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 둘을 같은 뜻으로 교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루터가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 모양과 하나님 형상을 사람이 본래부터 갖고 있는 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 그 근거는 창세기 9장 6절이다. 일단 이 본문에 대한 루터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그의 논증은 일관성이 있고 그럴듯하다.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 형상을 흔적도 없이 잃어버렸다.
타락한 인류가 로고스(Logos)와 갖는 관계가 루터가 주장한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 직면이 하나님 형상과 뚜렷이 분리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나타내는 하나님 형상의 단 하나의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하나님 형상’이란 말은 구약과 신약에서 오직 일반적인 하나의 의미만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타락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하나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사람에게 회복되어 가고 있고 마지막에는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완전하게 밝혀질 것이다.
루터에게는 이러한 견해가 역사적 타락 사건을 믿는 것과 연계되어 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본래적인 의가 있는데 이것이 사람에게 영광을 주고 지혜를 갖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 형상에 관한 이러한 교리는 역사적인 타락 사건과 관계없이도 주장될 수 있다. 루터의 창세기 9장 6절의 해석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일반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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