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34)

새벽지기1 2016. 5. 16. 20:47


강대국들이 소극적 평화의 유지라는 명분으로 대량 학살 무기로 서로 위협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폭력 행사와 잠재적 위협을 예방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하다. 대량 학살이 자행되면 인권과 정의를 염려할 기회마저 없게 되기 때문이다. 1963년 바이쟈커는 세계의 평화란 ”기술의 시대에 생명의 조건“이라고 역설하였다. 한동안 세계는 소극적 의미에서의 평화가 생명에 필요한 우선적 조건으로 받아들이는데 의견이 일치하는 듯했다. 하지만  평화에 대한 이러한 최소한의 일치가 미국에 있는 어떤 정치가들이나 군사 책임자들이 갖고 있는 핵전쟁도 할 수 있다는 주장에 의해 위태롭게 되고 있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세계의 평화를 소극적인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평화를 이렇게 소극적인 뜻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평화를 전쟁이나 집단적 폭력이 없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그것은 독재, 압제, 사람을 어떤 특정한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 및 자연 파괴 등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평화는 정의롭지 못함과 창조 질서의 파괴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의 평화는 무기를 침묵시키는 것을 넘어가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것의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서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인류가 하나가 되는 공동체다. 하나님 나라는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것과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둘째, 인류가 정의로운 삶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기대했던 하나님 나라는 세계가 정의를 이루는 것이었다. 사람마다 자신이 가진 능력에 따라 자기 몫을 나눠 가지는 것이 요구된다.

셋째, 인류가 자기희생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계가 단지 정의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자기희생의 사랑에 지배받을 때 실현된다. 궁극적 정의는 오직 자기희생의 사랑을 통해서만 성취된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갖는 존엄성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넷째, 인류가 보편적 삶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민족, 언어, 사회 계층, 문화 및 종교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류가 서로 섬기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개인이 서로 섬기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일한다.

 

세계의 평화가 위협받을 때 그것을 지키기 위한 전쟁 곧 이른바 ‘정당한 전쟁’은 가능한 것인가? 기독교 역사에서 일반적인 전통은 그것의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가령, 독일 루터교회의 “아우그수부르그 신앙고백” 제16조는 “그리스도인들이 악을 범하는 자들을 처벌하기 위하여 통치자들과 심판자들로서 무기를 사용하여 정의로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적법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고백서는 방어적이지 않은 전쟁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전쟁 자체는 미화될 수 없고 최소화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전통적인 뜻에서 ‘정당한 전쟁’은 실제로 일어날 수 없다. 대량 살상 무기 기술이 최첨단으로 발달한 오늘의 시대에 한 강대국이 다른 강대국에게 핵무기를 발사하면 공격한 국가도 비슷한 정도로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핵전쟁의 양상에서는 승리의 가능성이 기대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정당한 전쟁’은 현실적으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타당한 이유에서 시작한 전쟁이라 할지라도 일단 그것에 휩싸이게 되면 의로운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일단 전쟁이 터지면, 어떠한 도덕적 제한들이라도 적을 쳐부수려는 목표에 뒤지고 만다. 이것이 죄의 성품을 지니고 있는 현실의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성이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