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32)

새벽지기1 2016. 5. 14. 08:55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선택을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행하신 행위로부터 분리시켜서 그것을 오직 타계적인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았다. 그 결과 교회를 선택한 것이 인간의 역사 과정에서 그것이 하는 기능과 분리되었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오직 하나의 하나님 백성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교회를 선택한 것은 모든 인류의 미래 종국을 향해 일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서 보게 될 새로운 인류의 선취를 이루는 것이다. 이처럼 판넨베르크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 되는 것은 오직 미래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인류의 보편적 정치적 종국을 상징적으로 예기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다음과 같은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다.
첫째,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보편 역사의 관점에서 보는 인류의 미래 종국이 아니라 구속적인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구속의 질서로 다스리는 것과 동일시 될 수 있다. 이 구속적 주되심은 하나님 나라에서 실현되는데 그것의 목적은 인간의 역사 과정을 포함한 모든 것을 구속의 질서로 다스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보편 연사의 과정과 동일시될 수 없다.


둘째,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복음 사역을 통해 이미 현재적으로 임하였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속 사건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현재적으로 경험하였고 그것의 최종적 완성을 바라보고 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표징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특별하게 나타낼 종말 사건과 관계된다. 이것은 이러한 사건들이 역사의 끝에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 사건과 교회에서 이미 일어났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새 창조의 부분이지만 효과적인 실현이다.


성령이 교회 안에 임한 것은 미래에 있을 새 창조의 첫 지불액이다. 왜냐하면 성령을 통해 교회는 새 생명을 받고 나타내기 때문이다. 새 창조가 이미 실현된 실제(reality)라는 것에 근거할 때만이 교회는 미래에 있을 새로운 창조에 참여할 수 있고 관련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로 이해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여전히 불완전한 형태의 하나님 나라로 남아 있지만 말이다.


셋째,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 되는 것은 그것이 인류의 미래 종국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적 하나님 나라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의 모든 것을 주로서 다스리도록 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의 사역을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주되심을 실현하고자 한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세울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노력으로 증진되거나 지탱되지 않는다.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수동적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오히려 복음의 선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매개하는 능력과 책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따라서 사도적 선포를 통해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과제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깔뱅이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왕권이 되는 복음을 맡겼고 그것을 사역자들에 의해 지켜가도록 위임하였으며 전 세계가 그의 다스림을 받게 하였고, 많은 정사들을 그의 권위아래 두게 하였다‘라고 주장한 것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시편주석 45: 16).


넷째,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 되는 모델은 성례적 상징에서가 아니라 예언에서 찾을 수 있다. 예언적 메시지를 통해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고 매개하도록 부름 받았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따르면, 예언 자체가 표징이다. 교회의 예언적 메시지는 먼저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요구한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